0살부터 슈퍼스타 545화
코코아엔터 8층, 배우 연습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낯선 연습실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흠 하나 없는 마루부터 지문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거울, 밝은 조명과 한쪽에 정돈된 카메라들.
그 카메라로 찍은 것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모니터와 잘 먹으면서 연습하라는 듯 준비된 간식과 음료들.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연습실에 아직도 감탄만 나왔다.
10년 차 무명 배우, 배승원은 이런 좋은 환경에서 연습해 본 적이 없어서 많이 어색했다.
“……조금만 쉬었다 할까?”
뒷목을 매만지던 배승원이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6층 구내식당 옆에 따로 휴게실이 있었지만, 8층에도 자그마한 휴게실이 있었다.
“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배승원처럼 아직 넓은 연습실이 낯선 신인, 무명 배우들이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다들 손에 대본을 들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연습실이 커서 좋기는 한데, 마음이 안정이 안 된달까요?”
“이런 것도 징크스 같은 거겠지?”
배우들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던 안다호와 배우팀이 들었다면 조금 시무룩해졌을 거다.
“그래도 곧 익숙해지겠죠. 카메라 쓰니까 확실히 편하고 좋더라구요.”
“전 벌써 익숙해졌습니다! 간이침대도 가져왔어요!”
“하긴 샤워실도 있고 식당도 있으니 여기서 살아도 되겠더라.”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겨우 일주일 전에 처음 만났지만, 다들 연기를 좋아하다 보니 분위기가 좋았다.
배우들은 코코아엔터에서 추천한 연기 강사의 수업을 들을 건지, 곧바로 촬영할 작품을 고를 건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일단 강의부터 들으려고요!”
“나도. 필요하니까 수업을 들으라는 거겠지. 우리보다야 코코아엔터가 더 잘 알 테니까 말이야.”
한 배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아엔터만 믿고 활동하면 이서준 배우만큼은 아니더라도 훌륭한 배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가장 연장자인 배승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배우들은 매니저들이 골랐던 작품들에 대한 감상도 떠들어댔다.
“잘 골랐더라구요. 저 이런 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난 조금 걱정되던데…… 안 해봤던 역이라서.”
“그래도 강요 안 한다고 하니까 다른 거 찾아보는 건 어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 가슴이 벅찬 듯한 한숨이었다.
“하아, 내가 진짜 코코아엔터랑 계약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저희 엄만 아직도 안 믿어요. 사기꾼 아니냐고 하던데요.”
“우리 부모님도 그랬어.”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무명 배우들과 아무런 볼 것도 없는 신인 배우들이었다.
누군가는 장난삼아, 누군가는 진심으로, 누군가는 마지막 도전으로 코코아엔터에 지원했다.
여기 있던 모두가 ‘될 리가 없지’ 하고 생각했을 거다.
“근데 여기 들어오게 될 줄이야…….”
“계약하던 날은 진짜,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배승원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늦게 시작한 연기자 생활. 거기에 무명으로 10년을 흘려보냈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죄송하기만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안 되면 그만두자. 재능이 없다는 거겠지’ 하고 9할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코코아엔터 지원서였는데,
그게 덜컥 합격해 버렸다.
……왜? 왜? 이게 됐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오류가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쪽에 조그마한 희망을 가지고 코코아엔터로 향하던 그 날을, 배승원은 평생 잊지 못할 터였다.
“근데 같은 학원 애가 그러더라구요. 이서준 배우가 잘하는 거지 코코아엔터가 잘하는 건 아니라고.”
“그건 그래. 아무리 유명한 소속사라도 망하는 연예인들은 있으니까.”
“우리도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좋은 연습실도 있는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응?”
“이서준 배우 보신 분 있어요?”
그 말에 모두 눈을 끔벅이다 얼른 고개를 저었다.
“개강해서 못 오는 거 아닐까요?”
“그러게. 아직 학생이라서 바쁠걸. 그리고 이서준 배우 정도면 다른 곳에 따로 연습실이 있는 거 아니야?”
“제일 안쪽에 전용 연습실이 있잖아.”
“그냥 만들어둔 거 아닐까요?”
“에휴.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저 이서준 선배님 만나면 사인받으려고 사인지 챙겨 다니는데…….”
“사인해 드릴까요?”
“네. 그럼 감사하……?!”
가장 어린 배우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배승원과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오…….
배승원과 배우들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안녕하세요. 이서준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서준이 활짝 웃고 있었는데, ‘같은 소속사 배우들’이 생겨 기쁜 나머지 평소보다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바짝 얼어붙은 배우들이 차례차례 서준과 인사를 나누었다.
배우들 중 가장 어린 배우(그래도 서준보다 연상이다.)는 벅찬 듯 서준이 사인한 사인지를 가슴에 꼭 껴안고 있었고, 다른 배우들도 감격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배승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서준 배우.”
배승원이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활짝 웃고 있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이서준 배우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처음 데뷔 때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던 슈퍼스타이며, 유례없는 수상 기록과 훌륭한 연기력에 존경심마저 들었던 배우가.
코코아엔터에 들어온 이상 언젠가 한 번 스쳐 지나가겠거니,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다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서준의 말에도 다들 식은땀만 흘렸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모르겠지만, 모두 지금 당장은 그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그 긴장이 눈에 보였다. 작게 웃은 서준이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이야기 하시던 중이셨어요?”
“어, 그게…… 수업! 수업이요! 연기 수업!”
“네! 맞아요. 그거 들을까, 아니면 작품에 출연할까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오! 연기 수업. 좋죠. 안 이사님이 잘 가르쳐 주시는 강사님을 부르셨대요. 저도 들어보려구요.”
“그, 그렇군요.”
서준의 말에 배우들이 연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품에 출연하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저희 회사가 작품 추천은 아주 잘하거든요.”
“아, 매니저분들이 고른 대본 봤어요. 다들 고심한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그쵸? 다들 좋으신 분이에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긴장으로 가득 차 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미디어를 통해서만 봤던 이서준 배우가 실제로는 어떤 성격일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배우들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려진 대로 정말 착한 것 같았다.
그래서 배승원에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도 몰랐다.
코코아엔터의 계약서에 사인하면서, 언젠가 한 번 이서준과 친해지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을 꺼내놓았다.
“그, 바쁘시지 않으면 제 연기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허억!
배우들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거 괜찮은 건가? 괜찮은 거예요?
이서준 배우인데?!
성격이 착한 건 상관없이, 그저 탑배우에게 그런 부탁을 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매니저나 직원한테 걸리면 큰일인 거 아니야?’ 하고 배우들이 놀란 표정 그대로 서준을 바라봤다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당연히 괜찮죠!”
서준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는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코코아엔터에 나말고 다른 배우가 있어!
게다가 나랑 연습하고 싶대!
“어떤 역할이에요? 장면은요? 상대역 해드릴까요? 전에 연습하신 적 있으세요? 그럼 조금 다른 느낌으로 가도 좋을 것 같은데! 아, 카메라로 촬영도 할까요? 나중에 보면 도움이 많이 돼요. 다른 분들도 같이하실래요? 대형 연습실도 있는데!”
……어쩐지, 조금은 이서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 것 같은 기분이 든 배우들이었다.
* * *
다음 날.
[화]의 회의를 위해, 황지윤과 김세연, 그리고 네 명의 영화과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오성태 때문에 못 할 줄 알았더니, 하네.”
“흐. 제가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요.”
[화]의 촬영감독을 맡아줄 영화과 4학년 박우진의 말에 황지윤이 흐흐 웃었다.
여기 있는 영화과 학생들은 황지윤이 예전부터 노리고 있었던 실력자들로, 다들 황지윤이 ‘내년에 저랑 영화 찍죠!’라는 말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거절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머지 스태프는 모집하면 충분할 터였다.
“카메라는 뭐 써? 대본상으로는 적어도…… 우리 학교에 다힐 3200이 있었지?”
“어. 그게 제일 좋을걸.”
촬영팀이 될 박우진과 4학년 선배가 콘티를 팔랑팔랑 넘기며 이야기를 나눌 때, 황지윤과 김세연이 히히히 웃었다.
학생들이 의아한 듯 감독과 조감독을 바라보았다.
“크흠. 저희, 카메라 다힐 아니에요.”
“다힐이 아니라고?”
“뭐야, 벌써 다 빌려 갔대?”
다힐 3200이 아니면 뭘 써야 하나, 고민하는 박우진과 학생들에 황지윤이 입을 열었다.
“키드 100 쓸 거예요. 그것도 2대나!”
“……키드 100?”
보통 때라면 무덤덤하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박우진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나머지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작년에 나온 그거?!”
“진짜?!”
어디서 하악하악,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좋은 기능을 가진 카메라만큼 감독 지망생들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것 없으리라.
“뭐야, 뭘 어떻게 하면 키드 100을 빌릴 수 있는 건데?”
“그거 빌려주는 곳도 별로 없을 텐데!”
친구들의 성화에 황지윤과 김세연이 하하하 웃으며, 이번 독립영화에 투자를 해주겠다고 한 곳이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감탄했다.
“어딘진 몰라도 참 감사한 곳이네.”
“투자를 받을 정도로 대본 잘 만든 지윤이도 대단하구요.”
“지윤아. 촬영 전에 키드 100 좀 쓸 수 있을까? 아무래도 처음 다루는 거라 연습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네. 괜찮을 거예요.”
박우진의 물음에 황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영화과 학생들의 눈이 번뜩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 나도 한 번만 만져보자. 키드 100. 나 진짜 키드 100으로 찍어보는 거 평생의 소원이었어!”
“그거 작년에 나왔잖아.”
“그 정도로 찍어보고 싶다고!”
카메라 이야기로 시작된 회의는 부드럽게 흘러갔다.
간간이 오성태과 그 무리들, 이번 사건으로 잘릴락 말락 하는 몇몇 교수들의 뒷담화가 이어졌다.
황지윤이 흐뭇하게 웃었다. 좋은 분위기였다.
“촬영팀은 됐고. 다른 팀은 어떻게 구할 거야?”
“무대미술과랑 미술과, 음악과 앞에 공고문 붙여놓고, 인터넷에도 올릴 예정이에요.”
“배우들은?”
“무명 화가는 구했어요.”
황지윤의 말에 박우진과 세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했어? 빠르네.”
“그럼 자잘한 엑스트라는 스태프를 쓰면 될 거고. 민한 역 빼고는 다 나이가 있어서 연기과 학생은 안 어울릴 테니까, 외부인 써야겠다.”
“근데 무명 화가 역, 어떤 배우야? 어디 출연했었대?”
친구의 물음에 황지윤과 김세연이 키득키득 웃었다.
“있어. 연기 엄청 잘하는 배우.”
박우진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황도윤이야?”
“아! 선배! 절대 아니거든요!”
* * *
한국예술대학교 축젯날.
한예대는 아침부터 시끌벅적했다.
“세아야!”
권세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반가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언니!”
음악과를 졸업한 선배로, 권세아가 영화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준 사람이기도 했다.
현재는 영화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꺄아아악! 하며 반가워하다 진정한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진로를 영화음악 쪽으로 잡았다며?”
“네. 일단 도전해 보려고 공부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작곡은 바이올린보다는 피아노가 기본이 되니까 피아노도 배우고 있어요. 근데 맨날 혼나요.”
선배는 싱숭생숭한 얼굴로 권세아를 바라보았다. 괜히 잘나가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끌어들인 게 아닌가, 싶었다. 권세아가 그걸 알아차리고 활짝 웃었다.
“작곡 엄청 재미있어요! 제가 쓴 곡 있는데 들어볼래요?”
“그래!”
이어폰으로 권세아의 자작곡을 듣던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흘러가다, 같은 잔잔한 영화랑 잘 어울리겠다.”
“그쵸? 그걸 모티브로 만든 거예요.”
물론 부족한 점들이 많이 보였지만, 배운지 얼마 안 된 것 치고는 잘 만들어진 곡이었다.
“이 정도면 바로 만들어봐도 되겠는데?”
“……바로요?”
“아까 보니까 공고문 있더라.”
선배가 권세아의 손을 잡고 가까운 게시판 앞으로 향했다. 축제 안내를 하는 게시판 옆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 프로젝트팀 공고 붙어 있어. 여기서 골라서 한번 만들어보는 거 어때? 나도 그랬거든.”
“……제가요?! 벌써요?!”
권세아의 눈이 요동쳤다.
“너무 이르지 않아요? 잘 못 만들면 민폐일 거예요!”
“독립영화는 원래 실수도 하고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는 법이야. 거기다 이 작품처럼 영화과 3학년이 감독인 거 보면 저쪽도 완전 초보일걸?”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쪽에서도 테스트를 할 테니까, 세아 네가 된다는 법도 없고 말이야.”
“아…… 그렇네요.”
그제야 권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재미있어 보이는 거 골라봐.”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권세아의 시선이 게시판으로 향했다.
꽤 많은 공고문이 있었다.
영화과 4학년이 대다수였고 3학년도 종종 보였다.
그중, 권세아의 눈길을 사로잡는 공고문이 있었다.
[제목 : 화]
[감독 : 영화과 3학년 황지윤]
일단, 3학년이라는 글자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화]의 공고문에 적힌 줄거리를 읽은 권세아의 옆에,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황도윤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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