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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43화 (54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43화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황도윤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 뒤를 돌아봤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 왜 그래?”

하룻밤 사이 황지윤이 수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비틀비틀 부엌으로 걸어가 물 한 잔 마신 황지윤이 입을 열었다.

“엄마랑 아빠는?”

“오늘부터 1박 2일로 놀러 가신다고 했잖아.”

“아…… 그게 오늘이었어? 근데 오늘 토요일 아니야? 오빤 어디 가는데?”

“좀 있으면 축제잖아. 연극 살펴보러 가야지.”

아. 그랬지.

진짜 한숨도 못 잤는지, 조금 멍한 얼굴의 황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 안에 샌드위치 있으니까 먹든가.”

“으응.”

황도윤이 영 탐탁지 않은 눈으로 주섬주섬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거실 테이블로 가는 황지윤을 바라보았다. 황지윤은 익숙하게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작업할 때는 매번 저런 모습이긴 하지만…….’

여름방학 중 모든 대본 작업을 끝낸 뒤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너 대본 다 쓴 거 아니었어? 왜 다시 작업 모드야?”

“……하아…….”

웬 한숨?

거실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황지윤의 모습에 황도윤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난 뮤즈 같은 거 안 믿었는데…….”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말하는 목소리가 아련하기 그지없다.

“……뭔 소리야?”

황도윤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런 황지윤을 바라보았다.

* * *

“와. 내가 출연한 작품이 표절작이었으면 진짜…….”

“그러게 말이야.”

어제 터진 기사들로 사건에 관련될 뻔했던 배우 이서준이 있는 연기과도 떠들썩했다.

“서준이 너도 마음고생 많이 했겠다.”

“고생했어.”

오늘 축제에 올릴 연극의 연습을 구경하러 왔던 서준에게 다들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배우다 보니 사건의 당사자들인 영화과 학생들보다 어쩌다 휩쓸려버린 서준에게 더 감정 이입한 것 같았다.

친구들과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던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좋은 소속사와 일 잘하는 매니저를 둔 덕분에 마음고생은 1초도 하지 않았던 탓에 괜히 민망해졌다.

“도윤이 네 동생도 꽤 큰일이었겠다.”

“괜찮으시대요?”

연극을 점검하러 온 황도윤도 마찬가지였다.

황지윤과 오성태가 싸우던 자리에 끼어있었던 연기과 학생들도 있어서 다른 곳보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코코아엔터에서도 잘 대처해 줘서 마음 편하게 작업하고 있어.”

“그러면 다행이네요.”

“진짜 마음고생 많이 했을 텐데…….”

학생회 임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황도윤이 턱을 매만졌다.

그 마음고생 한 동생이 서준의 출연을 거절할 정도로 팔팔하다는 말은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준과 황도윤의 시선이 부딪혔고, 이내 웃고 말았다.

이어지던 연습이 잠시 멈추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이 다시 한번 동선을 확인하는 사이, 서준이 황도윤에게 말을 걸었다.

“도윤 선배님. 황지윤 선배님은 어떠세요?”

“평소랑 똑같지 뭐. 잘 지내고 있어. 오늘은 대본 작업한다고 밤새웠더라.”

“대본 작업이요?”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더라. 더 좋은 결말이 생각났다던데?”

“……으음. 그래요?”

서준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조금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서준을 보며, 황도윤은 무언가를 깨닫고 말았다.

* * *

코코아엔터.

안다호의 사무실.

“깊은 인상을 주려고 했더니, 대본을 수정할 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네. 얼마나 잘한 거야?”

약간의 장난기가 스며든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제 연기를 보고 수정해 주신 건 고마운 일이지만, 결말이 달라지면 출연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작품의 흐름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수정이라면 서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결말의 수정은 신중히 생각해야 했다.

결말은 그 영화의 인상을 결정하는 부분으로, 아무리 앞부분이 재미있어도 결말이 망하면 그 영화는 다시는 보기 싫어지는 법이었다.

만약, [이스케이프]에서 좀비를 막기 위해 병원에 폭탄을 떨어뜨려 버렸다면 어땠을까? 이제 어렵게 구해온 백신을 스프링클러로 뿌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아마 난리가 났겠지.’

그렇게 주인공들까지 허무하게 다 죽여버리는 결말이었다면, 테마파크나 핼러윈 축제 같은 이벤트가 나올 정도로 흥행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서 결말은 그 어떤 부분보다 중요했다.

황지윤이 어떤 수정본을 가져올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화]의 내용과 결말이 마음에 들었던 서준으로서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제프리 감독님은 경험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비슷한 상황이었던 [생존자들].

하지만 제프리 로덕스 감독은 경력이 제법 있어서 또 다른 결말도 멋지게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아직 학생인 황지윤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서준의 말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야지. 계약서도 아직 안 썼으니까. 일단 수정본 오는 대로 읽어보고 생각해 보자.”

“네.”

“다음 작품 고르는 게 쉽지가 않네. 삼잰가?”

표절에, 출연 거절에, 결말 수정까지.

휴대폰으로 올해 삼재 띠를 검색해 보는 안다호의 모습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야야야! 황지윤! 그거 수정하지 마!

황지윤이 휴대폰 건너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휴대폰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이건 또 무슨…….

“뭐야. 왜?”

-서준이한테 너 대본 수정한다고 말했는데…….

“아니, 그걸 왜 말해?!”

-서준이한테 보낼 거잖아. 아니야?

“그건 맞지만…… 좀 더 생각하고 나서 보내려고 했다. 이 웬수야.”

노트북에서 손을 뗀 황지윤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말인데?”

-서준이가 고른 건 수정 안 한 대본이잖아! 결말을 수정해 버린 게 서준이 마음에 안 들면 서준이가 출연 안 할 거 아니야!

황도윤의 이야기를 듣던 황지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러네? 나는 왜 수정본이 당연히 이서준 배우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했지?’

아마도 한 번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연기를 보여줄 정도로 [화]에 대해 진심인 이서준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대단한 배우가 그런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니, 수정본도 기꺼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조금 우쭐한 모양이었다. 황지윤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부끄럽다. 진짜.

‘……생각해 보자.’

이서준 배우가 마음에 들어 한 건 수정 전 대본이었다. 수정 후의 대본은 어떨지 모른다.

입술을 깨문 황지윤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대본 속 캐릭터들이 색을 입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가장 눈이 가는 건 무명 화가였다.

“……근데 이거 재미있는데……?”

-너한텐 그렇겠지만, 서준인 다를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수정…….

황도윤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황지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겨우 하루가 지났지만, 이제는 이서준의 무명 화가가 아닌 다른 무명 화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황지윤은 흥행에 대한 부담감이니 대본 간섭이니 사람들의 관심이니, 그런 것들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을 더 빛나게 해줄 이서준 배우를 출연하게 할 수만 있다면 다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작품(수정본)이 문제가 될 줄이야.

‘이서준 배우가 안 한다고 하면…… 그냥 수정 전 대본으로 찍을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일 밤잠을 못 잘 것 같았다. 더 좋은 이야기가 여기 있는데 그보다 부족한 대본을 찍으라니…… 저절로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서준 배우냐, 작품이냐.

둘 다 놓치기 싫은 황지윤이 이마를 짚었다.

“내가 왜 거절했을까…….”

계약하고 수정본을 줬으면 조금이라도 타협의 여지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안 고칠 거지?

황도윤의 목소리에 황지윤이 고개를 들었다. 노트북 속 무명 화가의 대사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이서준이 그 대사를 내뱉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서준이 아닌 무명 화가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수정본이 아닌 대본도 이제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이게 더 좋아. 수정본으로 찍을 거야.”

-……서준이가 안 찍는다고 하면?

“어쩔……수 없지.”

-아, 저 황소고집.

휴대폰 건너에서 황도윤의 탄식이 들려왔다. 가볍게 말하긴 했지만, 황지윤의 손은 초조한 듯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서준 배우가 진심을 보여준 만큼…….’

이번엔 자신이 진심을 보여줄 차례였다.

황지윤은 서준이 보여준 연기를 떠올리며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 * *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소파에 앉은 황지윤이 달달달 다리를 떨어댔다.

조금 전 코코아엔터로 수정한 대본을 보냈다. 이제 이서준 배우가 [화(수정본)]을 읽고 대답만 해주면 된다.

시계를 연신 살펴보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모르겠다. 깐죽대는 황도윤이라도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벌써 다음 주로 다가온 축제로 학생회장은 아직 학교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 황지윤이 얼른 휴대폰을 들었다.

[김세연]

바짝 긴장해 있던 어깨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황지윤이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배우가 뭐래?

[화]의 조감독이 될 김세연이 본론부터 말했다.

-우리 할 거 산더미인 거 알지? 음악팀, 미술팀, 의상팀, 촬영팀, 배우들까지 다 모아야 한다고. 촬영 장비들도 신청해야 하는데, 대본 수정한다고 일주일이나 날린 거 알지? 그래서 배우가 한대? 안 한대?

“이제 막 대본 보냈어…….”

-하아, 그래?

감독인 황지윤 못지않게 촬영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 조감독, 김세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얼마나 연기를 잘하길래 대본까지 수정한 거야?

“진짜. 엄청 잘해. 이제 이 배우 아니면 다른 배우는 생각도 못 하겠어.”

-안 한다고 하면?

황지윤이 흐, 웃었다.

얼마 전,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하고 답장을 보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해탈한 황지윤이 말했다.

“못 찍는 거지, 뭐.”

-……그래요. 네 작품이니 알아서 하세요. 일단 촬영팀은 모아뒀어. 박 선배님이 카메라 맡아주시기로 했고…….

이어지는 김세연의 말에 황지윤이 볼을 긁적였다. 진심으로 한 말인데 김세연은 농담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황지윤과 김세연이 통화로 앞으로의 회의 일정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황지윤이 그 메시지를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가 내쉰 황지윤이 휴대폰 건너 김세연을 불렀다.

“……세연아.”

-일단 공고는 학교 게시판이랑…… 응?

“너 내일 시간 있어?”

-시간이야 많지.

“그럼 나랑 같이 배우 만나러 가자. 우리 영화에 출연하겠대! 계약서 쓰재!”

-그래? 다행이네. 근데 그렇게 기뻐할 일이야?

환호하는 황지윤의 목소리를 들으며, 순간 김세연은 ‘이 배우 아니면 못 찍는다.’고 했던 황지윤의 말이 진심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음 날.

“……여기가 어디야?”

“코코아엔터 신사옥!”

“……예?”

황지윤을 따라온 김세연이 눈앞의 건물을 보고 눈을 끔벅였다.

우리 영화에 출연할 배우라고 해서, 어디 카페나 극단에서 같은 곳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코코아엔터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 코코아엔터 배우 새로 들어왔지.”

저번 주 기사가 났고 제법 화제가 됐었다.

그 이서준 배우가 있는 코코아엔터다. 게다가 10년이 넘도록 다른 배우가 없었는데 새로운 배우들이 들어온 것이었다.

어떤 배우들과 계약했는지, 그 배우들의 연기력은 어떤지, 앞으로의 활동은 어떨 것인지, 연예계는 물론이고 관심 있는 일반인들까지 자신들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신인도 있고 무명도 있네. 기준이 뭘까?

=22 고른 기준이 궁금하다.

=코코아엔터랑 계약했는데 연기는 기본이겠지!

=ㅇㅇ 왠지 모를 믿음이 있음.

-곧바로 할리우드 가는 배우도 있겠지?

=코코아엔터라도 그건 무리 아님?

-누가 제일 먼저 활동할지 궁금하다.

=의외로 첫 번째부터 망하는 거 아님?ㅋㅋㅋ

소속 연예인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로비에서 방문증을 받은 김세연은 며칠 전 키득거리며 봤던 댓글들을 떠올렸다.

“그 첫 번째가 우리는 아니겠지…….”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친구인 황지윤은 마냥 즐겁기만 한지 들뜬 얼굴로 방문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김세연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독립영화인데 망해도 괜찮을 거야.’

아니면, 망해도 관심을 못 받을지도 몰랐다.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한 김세연은 익숙하게 직원을 따라 이동하는 황지윤의 뒤를 따라갔다. 1층의 한 회의실에 도착했다.

“지윤아. 너 여기 와본 적 있어? 익숙해 보인다?”

“표절 때문에 여기 이 회의실에서 배우팀 팀장님하고 이야기했었거든.”

아하.

그 일로 배우를 알게 됐나 보다.

“어떤 배우야?”

“어…… 예전에 연극 한 번 했었고 공익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지. 너도 봤을걸? 엄청 화제였어.”

“그래?”

엄청 화제였던 공익 광고라.

생각나는 건 [한 걸음]뿐인데, 거기 나온 배우들은 아닐 터였다.

‘그럼 다른 광고일 텐데…….’

생각에 잠긴 김세연을 보는 황지윤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기억 나는 배우는 없는데…… 다른 작품은 뭐 있어?”

“없어. 근데 연기는 진짜 잘해.”

뭐, 대학생의 독립영화라면 그 정도 수준의 배우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코코아엔터가 연기 못하는 배우랑 계약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짧게 회의를 하고 있던 황지윤과 김세연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배우와 매니저였다. 배우를 본 황지윤은 활짝 웃었고 김세연은 입을 쩌억 벌렸다.

배우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배우 나 진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나 배우님. 황지윤입니다.”

……뭐?

“저희 나 진 배우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네?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와 나 진과 매니저의 모습에, 홀로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김세연은 눈도 깜빡하지 못했다.

‘……이서준이잖아요?’

누가 봐도 배우 이서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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