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42화
서준은 코코아엔터 신사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원래는 좀 더 빨리, 이전하자마자 올 생각이었는데 [화]의 오디션(?) 연습 때문에 조금 늦어졌다. 안다호가 회사는 아직 어수선하다며 집에서 연습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반짝반짝한 10층짜리 새 건물(지하도 있다)에 새삼 감탄이 흘러나왔다.
“우리 회사 엄청 커졌네.”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랐던 코코아엔터의 첫 번째 사무실이 떠올랐다. 1층에 식당, 2층에 태권도 학원이 있었던 낡은 사무실. 그다음으로 서은찬이 인수한 후 10년 넘게 머물렀던 5층짜리 건물도 스쳐 지나갔다.
점점 커지는 게 보이니 왠지 투자자, 서준의 마음까지 뿌듯해졌다.
모자를 쓴 서준이 신사옥 로비에 발을 디뎠다.
입구로 들어오는 인물을 눈치채고 다가오던 경비원 셋 중 하나가 인물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을 풀더니 미소를 지었다. 서준도 그를 알아보고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서은찬이 인수한 후부터 코코아엔터의 경비를 맡고 있는 경비팀 팀장이었다. 서준과도 제법 친분이 있었다.
“오. 언제 오나 했더니…… 신사옥에서는 처음 보는 거지?”
“네. 신사옥은 어때요?”
“회사도 커진 데다가 새로 들어온 사람들도 많아서 한동안은 고생해야 할 것 같더라. 이쪽은 이번에 회사 확장하면서 새로 들어온 직원들.”
경비팀 팀장의 옆에는 조금 기합이 들어간 듯한 경비원 두 명이 보였다. 둘 다 모자를 쓰고 있는 서준을 못 알아본 것 같았지만 일단 꾸벅 인사를 했다.
그들 앞에서는 계속 무섭게 바라보던 상사가 편안히 대화하는 상대가 누군지 궁금한 눈치였다.
“이쪽은 우리 회사 이서준 배우님. 자주 이런 모습으로 올 테니까 잘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거다.”
경비팀장의 소개에 두 경비원의 눈이 커졌다.
나타나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몰려들게 분명한 이서준 배우가 이렇게 모자 하나 쓰고 경호원이나 매니저도 없이 터덜터덜 들어온다고? 얼핏보면 학원에 들어오는 학생인 줄 알 것 같았다.
“그럼 전 올라가 볼게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경비팀장과 말없이 눈만 반짝이는 두 경비원에게 인사한 서준은, 안다호가 준 카드를 찍고 안으로 들어가(이것도 구사옥에는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곧 지하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타고 있었다.
“어, 1팀, 아니, 김 이사님.”
지하주차장에서 올라온 듯한 김상진 이사였다.
“흐흐. 서준이 네가 이사님이라니까 되게 이상하네.”
“하하. 다호 형도 그래요. 아직 어색하대요.”
서준이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9층, 10층?”
“저도 10층 가요.”
김상진 이사의 목적지도 10층이었으니 따로 버튼을 누를 필요는 없었다.
“어때, 신사옥은?”
“좋아요. 로비도 멋지던데요.”
로비 벽에 소속 가수들과 서준의 사진들이 붙어 있는 것은 똑같았지만, 단정하던 이전의 로비와는 달리 신사옥의 로비는 조금 화려해졌다.
“구사옥보다 화려해지긴 했지. 비어있는 곳은 아마 다음 주에 새 배우들이 오면 하나둘 채워질 거야.”
서준이 아쉬운 듯 말했다.
“구사옥에서는 로비에서 연습생들하고 소파에 앉아서 놀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아쉽긴 해요.”
“1층에 카페도 있고 6층에 식당 옆에 휴식 공간도 있긴 하지만…… 구사옥만큼 편한 느낌은 아니겠지.”
김상진 이사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제 들어오는 연습생들은 서준이 너보다 어려서 친해지기는 어렵지 않나? 걔들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서준이 넌 스타였을 테니까.”
하긴. 그럴 수도 있었다.
동생으로서 귀여움받았던 화이트 형들, 레드크라운 누나들, 그리고 같은 학교 또래로 친구로서 친해지기 쉬웠던 블루문과는 달랐다. 이제 들어올 연습생들과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뭐, 네 유명세에도 딴생각 없이 친해질 수 있으면, 그것도 물건이겠네.”
배짱이나 넉살 같은 면에서 말이다.
연예인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 담력은 있어야지, 하고 생각하던 김상진 이사가 혹한 듯 말했다.
“다음 달에 연습생 오디션 보는데 너도 참석할래?”
서준은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고 기겁할 연습생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애들 얼어서 제대로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분야가 다르니까 전 빠질게요.”
“괜찮다니까. 블루문으로 활동도 했잖아. 너 아이돌 해도 잘한다니까? 아니면 솔로? 우리 솔로도 생각 중이거든.”
“안 돼요. 안 사요. 싫어요.”
킬킬 웃으며 말하는 김성진 이사에 서준도 키득키득 웃으며 거절했다.
띵-
그때 8층에서 문이 열렸다.
자신이 소속된 3팀에 배정된 연습실을 살펴보고 지하 자료실로 가려던 최태우였다. 반사적으로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던 최태우가 엘리베이터 안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수팀 김상진 이사님과 이서준 배우가 거기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화살표가 위로 향하고 있었다.
최태우는 자신이 오기 전부터 눌러져 있던 위층으로 향하는 버튼이 떠올랐다. 누군진 몰라도 9층으로 갈 예정이었나 보다.
‘……근데 어디 갔어?!’
그리고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굳은 자세 그대로 발을 뒤로 빼, 인사만 하고 사라지려던 최태우를 발견한 김상진 이사가 활짝 웃으며 열림 버튼을 눌렸다. 닫히려던 문이 열렸다.
“아, 서준아. 이쪽이 표절 대본 발견한 최태우 매니저야.”
“오. 정말요?”
놀라는 서준과 함께 최태우도 놀라버렸다.
아니, 뭐 이서준 배우의 일이니 알려지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긴 했지만, 자신의 얼굴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가수팀 이사님이.
“최 매니저. 얼른 타요. 문 닫히겠어.”
“타세요.”
넓은 공간임에도 옆으로 비켜주기까지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최태우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 아니, 저는…….”
지하에 갑니다만.
“감사합니다…….”
최태우가 눈물을 삼키고 이사와 탑배우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쩐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이쪽으로 오다가 뒷걸음질 치는 매니저들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위로 가는 버튼 누른 거…… 너희구나.’
* * *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는 금세 10층에 도착했다.
서준이 아쉬운 얼굴로 최태우와 인사를 하고 김상진 이사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대본 찾아주셔서 감사했어요. 최 매니저님.”
“아, 아닙니다!”
시간과 정신의 방이 따로 없는 엘리베이터에서 반쯤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최태우가 서준의 인사에 반사적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던 서준이 문득 든 생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안 내리셨지?”
“그거야 서준이 너랑 내가 있으니까? 원래 가려던 곳도 다른 곳이었겠지.”
최태우의 마음을 다 아는 김상진 이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서준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새삼, 새로운 직원들이 들어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구사옥에서는 건물도 작고 직원 수도 적어서 이리저리 오고 가며 인사를 하고 말을 나눴었다.
‘좋은 쪽으로 가족 같은 회사랄까.’
직위도 그렇게 많이 나뉘어 있지 않아, 팀장 아니면 직원, 신입 정도였다. 서로 아주 친하지는 않더라도, 최태우처럼 바짝 얼어붙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직위도 많이 나뉘었고 직원들도 많이 들어왔고 팀들도 많아졌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소속된 곳이 아니면 예전처럼 친해지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건 좀 아쉽네.’
김상진 이사가 서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호는 방에 있을 거야. 들어가 봐.”
“네.”
김상진 이사가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고 서준도 안다호의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안다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왔어요. 다호 형.”
“그래. 어서 와.”
서준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앉아있던 안다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스 먹을래?”
“네. 주세요.”
안다호가 첫 개시를 하게 된 간식 테이블에서 오렌지 주스와 간식을 준비하는 사이 서준은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다호 형의 사무실이라니,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책상 위에 장식된 나침반을 발견한 서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은색 메달처럼 놓여 있었다.
“잘 어울리지? 장식대를 하나 주문 제작했어.”
“네. 예뻐요.”
폭신한 소파에 앉은 서준의 앞에 주스와 간식을, 자신의 앞에는 커피를 놓아둔 안다호가 소파에 앉았다.
“오디션은 어땠어?”
갑자기 불러내서 연기를 보여준 걸 오디션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잘한 것 같아요. 열심히 했거든요.”
서준이 열심히 했다는 말에 안다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걱정 없겠네.”
“근데 계획대로 될까요?”
멋진 연기를 보여줘서 황지윤의 마음에 든다.
일반적인 오디션이라면야 최고의 방법이겠지만, 감독이 굳게 각오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너무 단순하면서 불확실한 계획이 아닐까 싶었다.
안다호가 웃으며 설명했다.
“독립영화는 감독이 상상하는 걸 그대로 담아내려는 영화잖아. 흥행이나 상업성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네. 그렇죠.”
“황지윤 감독님은 신인이나 무명 배우하고만 촬영해 봤을 테고.”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본이 없는 학생 감독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 진의 첫 팬, 김수한 감독도 그랬다.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는 친구들을 데려와 촬영을 했다.
그런 것처럼 아직 학생인 황지윤이 고를 수 있는 배우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한계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황지윤의 상상하고 있는 [화]도 그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황지윤 감독님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을 거야. 자신의 작품에, 엄청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가 나오면 어떤 느낌인지를.”
오랜 시간 구상한 작품이다.
황지윤은 제작비나 배우의 연기력, 배경 등의 한계를 미리 파악하고 그 수준에서 작품을 구상했을 거다.
다른 사람의 간섭은 1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계획에, 서준이 물감을 끼얹었다.
겨우 연기 한 번.
긴 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배우 이서준의 연기다.
그것도 열심히 했다고 본인이 말할 정도의 연기.
그 연기 한 번에, 흑백으로 가득하던 황지윤 감독의 상상에 알록달록한, 살아 숨 쉬는 캐릭터가 등장한 것이었다.
‘독립영화가 감독이 상상한 것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한 거라면, 그 상상에 서준이의 연기를 넣어주면 되는 거지.’
흑백 작품만 떠올리다가 처음으로 색이 가득한 캐릭터를 만나버린 황지윤 감독은 과연 이전의 흑백 작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지 못할 거다.
눈 꼭 감고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하지 못할 거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좋았다.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눈에 보이는 이상, 황지윤은 하루종일 서준의 연기만 떠올릴 터였다. 이전에 어떤 작품을 상상했는지도 새까맣게 잊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이 계획은 서준의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뛰어나야만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지만, 안다호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영화계에서 오래 활동한 우정한 감독님도 네 실기시험을 보고 역을 촬영했을 정도야. 신인 감독이라면 더 쉽지.”
오.
서준이 감탄했다.
안다호가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이 문제라면 시선을 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때마침 적당한 사건이 있었다.
원래는 그냥 묻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활용하게 되었다.
바로 표절 사건.
안다호와 1팀은 부정적인 기사들로 ‘서준의 차기작이 올해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차기작을 하더라도 학생 작품은 절대 아닐 거다.’ 등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제 아무도 서준의 차기작이 대학생의 작품이며, 올해 촬영할 예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잘 먹혔으면 좋겠네.”
“그러게 말이에요.”
안다호와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 * *
“……미쳤나 봐…….”
이제 막 해가 뜨려는 새벽.
침대에 누워있던 황지윤이 벌떡 일어났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게 한숨도 못 잔 것 같았다.
“……무명 화가가 안 죽어……!”
분명히 가장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죽어야 하는 무명 화가가, 죽음으로서 영화의 대미를 장식해야 하는 무명 화가가 죽지를 않는다.
몇 번을 대본 그대로 진행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떠올린 카메라 속에서 무명 화가는 혼자서 살아 숨 쉬는 듯 움직이면서 감독인 자신이 떠올리는 온갖 죽음을 피해 다녔다.
“왜 안 죽냐고……!”
글 속 캐릭터가 창작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황지윤이 마른세수를 했다.
다시 차근차근 떠올려보았다. 처음 등장하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점점 바뀐다. 자신이 적었던 결말과 달라졌다.
근데 이게 너무…….
“……좋아…….”
너무 좋았다.
가볍게 적었던 초본을 빼놓고는, 그동안 대본은 이리저리 바꾸면서도 결말만은 유지해왔는데…… 그게 엎어지게 생겼다. 근데 그게 전혀 싫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것이 문제였다.
단 하루다.
아니, 오후 5시쯤에 이서준의 연기를 본 것을 생각하면 이제 겨우 12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그 연기가 머릿속에 콱 박혀, 결말까지 바꿔 버린 것이었다.
“간섭 싫다며, 이 멍청아…….”
황지윤이 이불에 머리를 박아댔다.
“대본 바꾸기 싫다며…….”
한 입으로 두말하게 된 황지윤의 상상 속, 말간 얼굴의 무명 화가가 눈을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그 무명 화가의 얼굴은 당연하게도,
배우 이서준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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