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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41화 (541/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41화

잠깐의 통화 끝에, 서준과 약속을 잡은 황지윤은 한예대로 향했다.

금요일이라 수업은 없지만, 표절 문제도 해결되고 대본 복구도 끝났으니 프로젝트 팀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예술대학교의 프로젝트 팀.

정확히는 연기과와 영화과에서 주도하는 영화 제작 지원 프로젝트로, 한예대 학생들은 물론이고 외부 사람들까지 참여할 수 있으며, 영화 제작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또 현장에서 사용하다가 새로운 장비로 바꾸면서 학교에 기부된 촬영 장비들을 빌릴 수도 있었다.

‘조건이 까다롭긴 하지만 말이야.’

외부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지만 참여하는 한예대 학생들의 수보다 많으면 안 되고, 프로젝트팀 담당자들이 2주에 한 번, 작업 진행 상황과 제작비 사용 현황을 살펴본다. 팀장인 황지윤은 그때마다 보고서를 써야 했다.

까다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작비의 얼마 정도는 팀의 회식비나 간식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규칙이 있어 생각보다 널널했다.

‘촬영을 핑계로 놀고먹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게다가 보고서에 따라 제작비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다른 서류 심사 없이 더 지원해 줄 수도 있어서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버스에 오른 황지윤은 여름 방학 동안 몇 번이나 고쳐 쓴 기획서를 살펴보았다.

팀장이 될 자신의 정보와 이후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기획서 중간쯤 쓰여 있는 ‘목표’에 황지윤의 시선이 닿았다.

제작비를 지원을 해주는 한예대는 학교의 이름을 알릴 가시적인 결과를 얻기를 바랐다. 그 때문에 프로젝트 팀은 그 팀의 목적을 확실히 명시해야 했다.

영화과이니 당연하게도 영화제 출품.

황지윤의 목표도 그것과 다르지 않게 내년 4월에 있을 ‘한국 독립영화제’에 출품하는 것이었다.

‘상을 받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자.

황지윤이 빙그레 웃으며 기획서를 가방 안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 * *

한예대에 도착한 황지윤은 본관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학생들이 여기저기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다 오늘 아침에 터진 기사 이야기뿐이었다.

“밖이 이 정도인데 영화과는 진짜 난리 났겠네.”

자신이 오성태와 그 무리가 다른 애들 작품을 표절했다고 이야기했을 때 진지하게 들어줬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황지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윤아!”

본관 프로젝트 팀 담당실로 사려던 황지윤이 그 앞에 서 있는 친구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팀을 만들게 되면 가장 먼저 합류해 촬영을 도와줄 친구, 김세연이었다. 오늘 서류를 제출하고 회의를 하기로 했다.

“영화과 분위기는 어때?”

“완전 극과 극이지, 뭐. 우리 쪽 애들은 통쾌해 하고, 오성태 쪽 애들은 아예 몇 명 오지도 않은 것 같더라. 교수들도 난리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김세연이 상쾌한 표정으로 웃었다.

“처음에는 한예대 영화과 다 욕먹었는데, 애들이 본인이 당했던 이야기도 하고 기사 분위기도 그쪽으로 흘러가니까, 지금은 오성태 무리랑 교수들만 욕먹고 있어. 이 기회에 교수들도 싹 갈아버렸으면 좋겠다.”

“되려나?”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몇몇 교수들을 떠올린 황지윤이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김세연에게 말했다.

“세연아. 나 서류 제출하고 올게.”

“그래.”

연기과, 영화과와 관련된 프로젝트 팀 담당실도 차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만약에 촬영 다 끝나고 표절인 거 밝혀졌으면 지금보다 더 난리 났겠죠?”

“그렇겠지. 표절작을 왜 보냐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표절작이라도 재미있으면 된 거지, 하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기사도 엄청 나왔을걸요. 감독 본인이 밝히지 않는 이상, 이서준 배우는 표절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텐데, 사람들이나 기자들은 얼굴도 모르는 감독보다 유명한 이서준 배우만 공격했을 게 분명해요.”

“그래도 뭐, 어디 영화제에서 상이라도 받으면 마지막엔 다 잊고 원작자만 힘든 상황이 되겠지.”

직원들의 이야기에 원작자, 황지윤은 씁쓸한 얼굴로 내심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 프로젝트 팀 신청하러 왔는데요.”

“아, 이쪽으로 주세요.”

황지윤은 손을 든 직원에게 신청서를 건네주었다. 빠진 서류가 없나, 직원이 확인하는 사이 다른 직원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표절작이 마음에 들었으면 원작도 꽤 마음에 들었을 것 같은데, 이서준 차기작은 그거 찍으려나?”

“오. 그럼 우리 학교 학생 중에 이서준이랑 찍는 감독 나오는 거네? 이야. 그 학생은 커리어 시작부터 장난 아니겠다.”

“기사 못 봤어? 더욱더 신중히 고른다고 하잖아. 대본 검토 빡세게 하겠지.”

“게다가 학생 작품에 출연하려다가 이렇게 크게 데였는데 또 학생이랑 촬영하겠어요? 저 같으면 그냥 할리우드 작품 찍을 것 같아요.”

“그건 그러네. 또 학생이랑 작업하다가 문제 생기면 골치 아플 테니까.”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황지윤에게 서류를 검토하던 직원이 말을 걸었다.

“네. 서류는 다 맞네요. 대본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그런데 합격 여부는 조금 늦게 나올 거에요. 오늘 사건 때문에 위에서 철저하게 대본 검토하라는 연락이 와서요. 그래도 대본만 괜찮으면 떨어질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 빌릴 수 있는 촬영 장비들은 이거고, 필요하시다면 촬영 장소나 소품을 빌리는 데 학교 측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이어지는 직원의 설명에 황지윤이 귀를 기울였다.

* * *

점심을 먹은 황지윤과 김세연은 학교 내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제법 넓은 테이블 위로 종이들이 펼쳐졌다.

“촬영 장소는 찾았어?”

“예전부터 생각해 놓은 장소가 있어. 언젠가 꼭 여기서 찍어야지 하고.”

황지윤이 내민 촬영 장소를 찍은 사진들을 김세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살펴보았다. 대본을 읽은 상태라 저절로 어떤 장면을 어디서 찍을지 알 것 같았다. 소품이나 가구 같은 걸 조금 바꿔야 하겠지만, 괜찮은 장소였다.

“여기 빌릴 수는 있대?”

“촬영으로 꽤 쓰이는 곳이라서 가능해. 비용은 하루에 이 정도.”

“……싸긴 한데 그래도 최대한 빨리 찍어야겠네. 음악은?”

“일단 음악과 애들 살펴보려고. 안되면 외주 쓰고.”

“우리 학교 애들 실력도 나쁘진 않지.”

황지윤과 김세연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이어나갔다. 화가의 이야기인 만큼 그림도 중요했다.

“미술팀은 미술과나 무대미술과에서 섭외하면 되겠지?”

“이 장면에서는 프로를 쓰고 싶은데…….”

“그건 힘들지 않을까? 지원금을 받는다고 해도 프로를 쓰기엔 부족할 텐데…….”

“그래도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으음.

황지윤과 김세연이 침음성을 흘리며 일단 다른 것부터 정하기로 했다.

회의가 이어지던 중 시계를 본 황지윤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나 약속 있어서.”

“그래.”

황지윤의 말에 김세연이 기지개를 쭈욱 폈다. 첫 회의라서 그런지, 예전부터 도와주겠다고 했던 영화과 학생들을 빼면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없었지만, 앞으로 차근차근 진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근데 무슨 약속?”

“아, 아는 사람이랑 만나기로 했거든.”

……아는 사람 맞지?

황도윤과 아는 사이이니, 건너건너 아는 사람이기는 했다.

김세연과 헤어진 황지윤은 약속 장소인 연기과 연습실로 향했다.

‘왜 만나자고 했을까?’

분명 [화] 때문이겠지만, 이서준 배우 정도면 할 수 있는 작품들도 많을 텐데 왜 겨우 대학생의 작품을 이렇게나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보통은 자존심 상해서라도 안 할 텐데 말이야.’

탑배우가 이 정도로 자신의 대본을 원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긴 했지만, 역시 부담되고 걱정이 된다.

“역시 거절하자.”

어떤 조건을 내놓든 거절하자, 고 생각하며 황지윤은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선배님!”

“……!”

서준이 활짝 웃으며 황지윤을 반겼다. 눈이 부셨다.

“나도 있다? 황지윤?”

갑자기 눈앞에 들이닥친 반짝이는 외모에,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은 황지윤이 황도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기과 1학년 이서준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황지윤입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선배님!”

왠지 들떠 보이는 서준이 황지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어느새 연습실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음료수 캔을 하나 들고 있게 된 황지윤의 귀로 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편할 것 같아서 도윤 선배님도 불렀어요.”

“아…….”

“나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해. 편하게.”

황도윤이 과장되게 연습실 구석에 처박혔다. 가족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긴장이 풀린 황지윤이 이마를 짚었고 서준이 작게 웃었다.

“오늘 왜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황지윤의 물음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선배님께 제 연기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꼭 봐주셨으면 합니다.”

* * *

“역시 이서준! 엄청 잘하지 않았냐?”

동생 덕분에(?) 서준의 연기를 직관하게 된 황도윤이 연신 감탄을 흘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신발을 벗는 동안에도 서준의 연기를 칭찬하는 황도윤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뒤따라 들어온 황지윤은 왠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야. 황도윤.”

“그러니까 서준이랑 촬영……엉?”

황도윤이 황지윤을 쳐다보았다.

“너 내 대본 읽어봤지?”

“? 내용이 궁금해서 복구하자마자 읽어보긴 했지.”

“그럼…… 화가 캐릭터도 좀 알겠네?”

……!

황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황도윤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 황지윤 네 생각이랑 달랐으면 좋겠…….”

“화가 연기 좀 해봐. 오빠.”

“달랐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럴 때만 오빠지!!”

황지윤의 말에 황도윤이 비명을 지르는 듯이 외쳤다.

“저기요? 동생아? 우리가 방금 서준이 연기를 보고 왔거든? 내가, 이 두 눈으로 직접 그런 연기를 봤는데…… 그걸 하라고!? 미쳤냐!?”

금손 그림 옆에 똥손 그림을 놓아두는 것과 다름없었다.

똥손이 외쳤다.

“안 할 거야! 안 한다고!”

“저번 학기 성적 엄마한테 말한다?”

“하겠습니다.”

황도윤은 빠르게 백기를 들었다.

“대사는 못 외웠으니 대본 좀 주시죠. 준비할 시간도요.”

잠시 후.

준비를 끝낸 황도윤은 반쯤 해탈한 표정으로 거실 중앙에 섰다. 황지윤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작한다?”

“응.”

숨을 깊게 들이셨다가 내쉰 황도윤이 화가의 대사를 쳤다. 걸음걸이며 행동, 눈빛, 손의 움직임. 짧은 시간 연습한 것치고는 엄청 잘하고 있었다.

황지윤은 안다.

황도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이론 쪽은 부족하지만, 연기는 잘해서 종종 캐스팅 제안도 들어왔는데, 올해는 학생회 때문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부족한 점만 보였다.

그런 눈빛이 아닌데.

그런 걸음이 아닌데.

그런 말투가 아닌데.

그런 느낌이 아닌데.

‘그러니까 좀 더 이렇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연습실에서 봤던 이서준의 연기.

그 연기가 마치 유일무이하고 완벽한 정답처럼 황도윤의 연기 위에 덧씌워졌다.

아주 단 초콜릿을 먹고 나면 그보다 약한 단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황도윤의 연기는 밍밍했다.

시간이 지나, 황도윤의 연기가 끝났다.

“……눈 버렸다. 괜히 봤어.”

“……크윽…….”

황도윤은 반발하지 못했다. 연습 중에도, 조금 전 연기를 보여줄 때도 황도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서준이 연기를 흉내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한 거라고! 연습 시간만 더 있었어도……!”

“시간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얼른 대답한 황도윤이 고민에 빠진 동생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서준이랑 찍으면 좋잖아. 서준이처럼 연기 잘하는 배우는 없다니까?”

“……하아.”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작품만 생각해봐. 서준이가 아니면 화가 역에 누구를 쓸 거야? 내가 할 말은 아닌데, 나도 연기 좀 하거든? 내 연기가 이 정도면 다른 배우들은 어떻겠어?”

황도윤이 킬킬 웃었다.

“누가 연기하던 넌 이제 서준이 연기밖에 생각 안 날걸?”

제 마음을 그대로 읽은 듯한 황도윤의 말에 황지윤이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함정에 홀랑 빠져 버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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