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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39화 (53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39화

파일이 날아가서 복구 중이라더니, 안다호가 가방에서 꺼낸 대본의 양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보통의 대본보다 얇은 대본을 받은 서준이 앞장을 보았다.

[화]

[감독: 황지윤]

‘황도윤 선배님 동생분이셨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학생식당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지호가 했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문학 분석]이라는 강의에서 4학년과 싸웠다던.

아마도 그 4학년이 오성태나 그의 무리일 것 같았다.

‘이름이라도 알아뒀으면 좋았을걸.’

그럼 오성태라는 이름에 조금 경계심을 가졌을 텐데 말이다.

뭐, 이미 해결된 일.

서준은 대본에 집중하기로 했다.

“서준아.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아직 정리할 게 남아서.”

대본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서준을 보고 있던 안다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옮긴 1차 이삿짐 정리를 하고 내일 옮길 2차 이삿짐을 살펴보고, 팀별로 사무실도 정리하고 자신이 쓸 사무실도 정리해야 했다.

‘배우들 연습실도 한 번 더 점검해야 하고.’

배우팀이 커져서 그런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네. 조심해서 가세요. 다호 형.”

안다호를 배웅한 서준이 소파에 앉아 대본을 펼쳤다. 조용한 분위기에 팔랑팔랑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화]는 [무명 화가]나 [사랑방 화가]보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대중들의 취향에 맞는 상업영화보다는 감독의 특색이 들어가 있는 독립영화 같았다.

[사랑방 화가]야 중2 황지윤이 키득키득거리며 적은 거라 가벼운 분위기였고.

[무명 화가]는 [화]의 무거운 분위기가 대중들에게 먹히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오성태가 가벼운 분위기로 바꾼 것 같았다. 겸사겸사 [화]에 담긴 ‘황지윤의 특색’도 지워 버린 모양이었다.

‘이러니 이야기가 섞이질 않지.’

뼈대는 심각한 이야기인데, 억지로 가벼운 분위기로 이끌어나가려고 하니 전체적인 이야기가 들쑥날쑥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역시.

다시 생각해도 고민했던 시간들이 억울해졌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서준이 아직 결말까지 나오지 않은 [화]를 내려다보았다.

“결말까지 읽어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내용으로는 당장에라도 다호 형에게 연락해서 출연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무명 화가]를 보고 사흘 밤낮을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빠른 결정이었다.

* * *

“어떻게 됐어?”

“다 끝났어! 오성태 이제 얼굴도 못 들고 다닐걸! 아, 아쉽다! 학기 중이었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아직 방학이라 휴학하는 거 아니야?”

으하하하, 웃으며 들어오는 황지윤에 황도윤이 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근데 코코아엔터에 있던 대본이 오성태 거랑 비슷했냐? 어지간히 비슷하지 않으면 표절 증명하기 어려울 텐데?”

“엄청! 난 오성태가 이거 보고 표절한 줄 알았다니까. 진짜 누가 봐도 표절이었음.”

황지윤이 코코아엔터에서 받아온 두 개의 대본을 황도윤에게 건네주었다. 형광펜으로 그어진 곳들을 살펴보던 황도윤이 입을 쩌억 벌렸다.

“뭐, 뭐가 이렇게 비슷해?”

“오성태가 내 중2 때랑 비슷하다는 거지. 아니면 내가 좀 천재라거나!”

“……오성태가 못난 거로 하자.”

킬킬 웃은 황지윤이 완전히 풀어진 얼굴로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통을 꺼냈다.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식욕이 생겼다.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숟가락도 챙겼다.

“대기업에서 상표권 특허를 내면, 다른 곳에서 쓰지 못하게 비슷한 이름들도 낸다고 하잖아. 상표 이름이 멍멍이라면 댕댕이 같이 슬쩍 보면 비슷한 거로.”

댕댕이? 그거 우리가 특허 냄. 너희 못 씀.

“이제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무명 화가? 그거 내가 중2 때 씀. 너 표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되니, 앞으로도 한 대본을 다른 버전으로도 몇 개 써놓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겠냐마는.’

황지윤이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커다랗게 한 숟갈 퍼서 입에 넣었다.

“다 내 덕분이지!”

고1 황도윤을 찬양하라.

황도윤의 말에 황지윤은 이번만큼은 웬수를 은인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딱 1초만.

“코코아엔터에서는 뭐래?”

“뭐가?”

눈을 반짝이는 황도윤에 황지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황도윤이 놀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니, 오성태가 쓴 무명 화가가 서준이 마음에 들었다잖아. 근데 그게 표절작이고 네가 원작자면, 너한테 뭐라고 했을 거 아니야? 사랑방 화가를 각색해서 촬영하자고 안 해?”

“했지.”

황지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도윤이 오오, 감탄했다.

“했어?! 그래서?”

“못한다고 했어.”

“그래! 잘…… 뭐? 뭐라고 했다고?”

“돌려서 말하긴 했는데, 못한다고 했어. 그거 중2 때 적은 건 데다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화랑 비슷하단 말이야.”

자기 복제를 할 생각이 아닌 이상, [사랑방 화가]를 선택하면 [화]를, [화]를 선택하면 [사랑방 화가]를 못 찍게 된다.

황지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화지. 사랑방 화가를 선택해도 수정하면 결국 화 느낌으로 바뀔걸. 그러니까 못한다고 했어.”

“아니, 미친 거 아니야? 서준이가 출연할 수도 있잖아! 서준이가!”

답답한 건 황도윤뿐. 황지윤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뭐……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다지 안 끌린달까?”

“……너 어디 아파? 병원 갈래?”

어깨를 으쓱이는 황지윤에 황도윤이 다시 물었다.

“그럼 화는? 다른 작품 쓰고 있다는 이야기는 안 했어?”

“했어. 팀장님이 대본 줄 수 있냐기에 드렸지. 나중에 완성본도 보내주기로 했어. 관계자 평가가 궁금해서 말이야. 팀장님 되게 친절하시더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른 욕심은 전혀 없어 보이는 황지윤의 모습에 황도윤이 설마, 하고 물었다.

“설마…… 그것도 서준이가 출연한다고 하면 거절할 거야?”

“일단 그게 이서준 배우 마음에 들까 싶기는 한데…….”

황지윤이 정성껏 쓴 대본이긴 했지만, [무명 화가]와 다르게 분위기가 무거워서 이서준의 마음에 들까 싶었다.

“출연하고 싶다고 해도 거절하려고.”

황지윤의 말에 황도윤이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진짜, 이서준이 한다는데 거절한다고? 너 뭐 잘못 먹었어? 아이스크림이 상했나? 헐, 이거 날짜 지났네!”

“아이스크림은 제조일자 적어. 멍청아.”

뻘쭘한 듯 아이스크림 통을 건네는 황도윤의 모습에 황지윤이 입을 열었다.

“이거 내 영화야.”

아직 데뷔도 못 했지만,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여느 감독 못지 않은 황지윤이 눈을 번뜩였다.

“오빠도 알잖아. 영화에 자본 들어가면 투자자들이나 관계자들의 의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거. 난 그런 거 진짜 싫거든.”

……집안 내력인가.

똥군기를 참지 못해 학과를 뒤집어엎은 것도 그렇고(황도윤은 성공하고 황지윤은 실패했지만).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 하는 자신과 동생의 모습을 보면,

“누가 내 영화에 참견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황소고집이라는 단어가 괜히 생각나는 건 아닐 거다.

* * *

다음 날 오전.

황지윤에게서 [화]의 완성본이 도착했다. 신사옥에 도착한 2차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던 안다호는 그대로 서준에게 메일을 보냈다.

“오! 태우 씨다.”

점심을 먹으러 가려다, 최태우를 발견한 2팀 직원들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최태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함께 이동하던 매니저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예!”

2팀 직원들과 안다호가 이동했다.

이열치열. 기력보충을 위해 메뉴는 삼계탕이었다.

“뭐, 이렇게 된 거 잘됐다고 생각해요. 오성태 감독님이, 아니 감독님도 아니지. 오성태 씨하고 조금 안 맞는 것 같기도 했거든요.”

정유정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상업영화로 가려는 느낌이었죠?”

“네. 어디 투자사를 맡겨둔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배우들도 대단한 분들만 쓰고 싶어 하고 미술팀, 촬영팀도 탑만 부르려고 하니까 괜히 제가 민망해졌다니까요.”

어마어마한 제작비, 화려한 캐스팅, 유명한 미술팀과 촬영팀, 인상 깊은 음악을 만들어줄 작곡가,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홍보팀, 개봉관의 수, 이후 업로드될 스트리밍 사이트 선택까지.

오성태는 마치 오랜만에 복귀하는 거장처럼 온갖 의견을 내놓았다.

정유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다 될 것 같아서 더 큰 일이었지만요.”

그 말에 안다호와 2팀 직원들도 웃고 말았다. 서준이라면 충분히 그러지 않을까 싶었다.

“기자들은 어떻게 하죠?”

오성태가 얼마나 떠들어댔는지, 사실확인을 요청하는 메일들이 왔다. 그 메일마다 그저 여러 대본을 살펴보는 중이라고 답장을 보냈던 직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서 쓸 때까지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에요.”

“함께 일했으면 여러모로 큰일 났겠습니다.”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무근이냐, 표절 문제냐, 계약 무산이냐.

삼계탕을 먹으며 어떤 대답이 가장 좋을까, 이야기하던 중 서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서준: 다호 형!

>서준: 저 이거 할래요!

“서준이에요?”

“아, 네.”

어떻게 알았냐는 안다호의 표정에 2팀 직원들이 작게 웃었다.

“서준이랑 관련되면 안 팀장님 얼굴이 풀어지거든요. 흐물흐물하게요.”

“저도 그래요. 하도 어릴 때부터 봐서.”

“가끔 언제 이렇게 컸나, 싶지 않습니까?”

웃으며 말하는 2팀 직원들에, 민망한 듯 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서준이가 화에 출연하고 싶답니다.”

“잘됐네요! 그것도 좋던데.”

“무명 화가 때문에 시무룩해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2팀 직원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던 안다호가 황지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 *

코코아엔터 신사옥.

10층의 건물에서 배우팀은 8층, 9층을 사용하는데 그중 8층은 배우들의 연습실(1인용부터 다인용까지 있다)과 휴게실이었고 9층은 배우팀 사무실이었다.

점심을 먹고 안다호와 2팀 직원들이 각자의 사무실로 향했다.

9층에서 2팀 직원들이 모두 내리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이동하려니, 안다호는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10층.

코코아엔터의 사장실과 가수팀 1팀장의 사무실, 그리고 안다호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회의실을 만들어도 자리가 남아서 휴게실이나 연습실 등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어떤 직원이 쉬는 시간에 사장실이 있는 층까지 올라오며, 어떤 연습생이나 배우가 대담하게 여기까지 올라와 연습하겠냐는 말에 그냥 접게 되었다.

“서준이는 잘 오겠지만...”

배우들과 같은 층이 좋다고 말하던 서준이 떠올라 안다호가 작게 웃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안다호의 사무실은 넓고 깔끔했다.

커다란 창 앞에는 안다호가 일하게 될 넓은 책상과 책장이 있었고 그 앞에 있는 다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폭신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사무실 구석에는 서준이나 다른 배우들이 오면 줄 음료수를 넣어놓을 수 있는 작은 냉장고와 간식 테이블도 있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인테리어지만, 조금 낯선 기분이 들어 안다호가 뒷목을 매만졌다.

“일단 정리부터 할까.”

빈 책장과 서랍에 전 사무실에서 가져온 자료와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할 때, 황지윤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으음…….”

그 답장에 안다호의 표정이 흐려졌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적혀 있었지만 거절하려는 마음은 잘 느껴졌다.

이서준 배우의 출연 제의는 정말로 감사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온 영화라서, 이서준 배우가 출연했을 때 들어올 투자자들의 간섭과 대중들의 관심이 걱정된다.

아직 경력도 없는 자신이 그걸 전부 무시할 수도 없을 것 같고, 투자자들과 대중들의 마음에 들 정도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이서준 배우의 출연 제의는 고맙지만 거절하겠다. 죄송하다,

라는 내용이었다.

안다호가 이마를 짚었다.

“한예대 영화과는 원래 이렇게 극단적인가…….”

오성태는 너무 상업영화 쪽으로 가서 큰일이었는데, 황지윤은 너무 독립영화 쪽으로 가서 큰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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