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537화 (537/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37화

비웃는 것 같은 오성태와 성격도 좋다며 치켜세우는 학생들의 모습에 황지윤이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진짜 내 작품 맞는데…….’

주말까지 대본 복구를 끝내고 스태프를 모으고 배우를 모집하고 늦가을쯤 촬영을 시작하려던 자신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무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진짜 굿이라도 해야 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지윤아. 성태 선배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맞잖아. 증거도 없이 작품 훔쳐갔다고 하고 욕하고.”

“그래. 성태가 성격이 좋아서 아무 말 안 하는 거지…….”

“황지윤!”

그때, 잊혀 있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혀를 깨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황지윤은 물론이고, 만족스럽게 웃고 있던 오성태, 사과하라고 재촉하고 있던 영화과 학생들까지 존재감이 1도 없었던 황도윤을 바라보았다.

다들 ‘아, 저 사람도 있었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황지윤은 제 오빠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황도윤은 태평하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니, 뭐, 그래. 급한 전화일 수도 있지.

근데 왜 밝게 웃으며 자신에게 손짓하고 있는 걸까?

“전화 좀 받아봐!”

영 오지 않는 동생에 황도윤이 다가와 휴대폰을 내밀었다.

“……미쳤어? 지금 이 상황에서, 나보고 전화를 받으라고?”

진심이냐는 표정을 짓는 황지윤의 모습에도 황도윤은 실실 웃으며 자신의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일단 받아봐.”

게다가 자신의 전화면 또 몰라, 왜 황도윤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를 악물고 집에 가서 두고 보자, 생각하며 황지윤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황지윤입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학생들이 불만을 내뱉었다.

“아니, 왜 사과도 안 한대?”

“그러게요. 성태 선배만 억울해질 뻔했잖아요.”

“성태야. 액땜이라고 생각해. 액땜.”

“괜찮아. 지윤이가 원래 성격이 좀 급하잖아.”

오성태가 학생들을 말리고는 만족과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황도윤을 바라보았다.

“이제 볼일 끝났으면 가도 되지? 훔쳐갔다고 생각하면 증거를 가지고 오던가.”

“기다려 봐. 통화하고 있잖아.”

오성태가 황도윤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심각했던 표정이 짐을 내려놓은 듯 여유롭게 변해 있었다.

“……네? 어디요?”

황지윤이 잘못 들은 듯 되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 코코아엔터요?”

휙!

오성태가 고개를 돌려 전화를 받고 있는 황지윤을 바라보았다.

* * *

코코아엔터, 자료실.

가위바위보에 이겨 [무명 화가]를 읽게 된 최태우가 첫 장을 펼쳤다.

‘이게 이서준 배우가 고른…….’

첫 페이지.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다가온다. 심부름을 하던 어린 소년이 그 마차를 바라본다. 마차 창문으로 새하얀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빠르게 달려오던 마차는 점점 느려져 이내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기와집 앞에 멈춰 섰다.

어린 소년이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에게 이번에 온 손님이 누구냐고 묻는다. 노인은 한성에서 온 화가라고 말한다.

……? 뭐지?

최태우가 눈을 끔벅였다.

처음 보는 작품인데 왠지 뒤의 이야기가 저절로 떠올랐다.

‘화가는 손을 다쳤고…….’

노인이 말한다. 화가가 두 손을 다쳐서 요양 삼아 왔다고.

‘이 아이가 시중을 들겠지.’

이제 곧 겨울이라 할 일이 없는 아이는 기와집 화가 선생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의아함은 뒷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강해졌다.

여기선 이렇게, 저기선 저렇게.

마치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도 생긴 것마냥, [무명 화가]의 줄거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데자뷔라기엔 너무 기억이 생생했다. 꼭, 바로 직전에 읽은 것만 같았다.

!

홱!

최태우의 고개가 빠르게 옆으로 돌아갔다.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작품들을 읽고 있던 매니저들이 그 움직임에 놀랄 정도였다.

“뭐, 뭐야? 왜 그래?”

“아뇨, 그게…… 잠깐만요.”

최태우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대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서준에게 추천할까, 말까 고민하던 미완성의 대본이었다.

최태우는 두 개의 대본을 잡고 촤르르 소리가 날 것처럼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제대로 읽는지조차 모를 정도의 속도로 바쁘게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가며 살펴보았다.

‘이것도…… 이것도…… 전부 비슷해……!’

최태우의 눈동자가 떨렸다.

비슷하게 흘러가는 영화들은 많지만 이 정도로 비슷하면 문제가 된다.

‘아니, 아직 판단하긴 일러.’

7년 전, 오성태가 코코아엔터에 미완성의 대본을 투고한 후, 수정하고 또 수정한 끝에 나온 것이 [무명 화가]일 수도 있었다.

오성태 감독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름일까?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최태우가 미완성의 대본을 앞으로 넘겨 표지를 보았다.

[작가 : 황지윤]

!!

놀랄 시간도 없었다.

최태우는 벌떡 일어나 자료실을 뛰쳐나갔다.

“사무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매니저들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최태우의 빈자리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 *

최태우가 내민 두 개의 대본에 안다호와 2팀 직원들이 이마를 짚었다.

[무명 화가]는 몇 번이나 읽었기 때문에 미완성의 대본만 읽어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이건 그냥 비슷한 정도가 아니네요.”

“네. 하나의 시놉시스를 두고 두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긴 감독. 여긴 작가. 작가가 감독에게 대본을 넘긴 걸까요? 7년 전 대본이잖아요.”

작가나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사서 각색하는 감독도 꽤 있었다.

제대로 값을 치르고 시나리오를 사는 감독도 있지만, 강제로 빼앗는 감독들도 꽤 있어, 사소한 논란에도 휩쓸리지 않기 위해 2팀에서도 주의하는 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직접 썼다고 들었어요.”

오성태 감독의 담당, 정유정의 말에 다들 으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럼 어떻게 된 걸까요?”

“두 가지 경우가 있겠죠. 정말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비슷한 작품을 썼거나 오성태 감독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안다호의 말에 2팀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일 확률은 거의 없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황지윤 작가의 대본이 7년이나 먼저 나왔으니 이쪽이 우선이겠죠.”

“그럴 경우에는 시나리오를 사거나 작가 황지윤, 감독 오성태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한예대에서 으르렁대며 싸우고 있는 황지윤과 오성태가 들었다면 질색을 했을 말이었다.

“그럼 시나리오를 샀거나 표절이라면…….”

“시나리오를 산 거라면 확인만 하고 끝나겠지만, 만약 표절이라면 이번 작품은 조금 생각해 봐야겠죠.”

최태우의 물음에 안다호가 대답했다.

아, 이번 작품은 포기하는 건가.

흥미로운 작품인데 아깝다고 생각하던 최태우의 귀에 안다호와 2팀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지윤 작가만 데리고 새 감독을 찾죠. 아니면 저희 쪽에서 아예 시나리오를 사도 되고요.”

“서준이가 대학생 감독에 흥미가 있던데 대학생 감독으로 찾을까요, 팀장님?”

“예. 그게 좋겠네요.”

태평한 안다호와 2팀 직원들의 대화에 최태우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작품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감독을 갈아치울 모양이었다.

“일단 황지윤 작가에게 연락해 봅시다. 연락처 있죠?”

“7년 전 번호이긴 하지만요. 게다가 받는 사람은 다른 이름이네요. 가족인 것 같아요.”

미완성 대본의 맨 뒷장에 황도윤이라는 이름과 함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2팀 직원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황도윤 씨 전화 맞으신가요?”

-네. 누구시죠?

“배우 소속사인데요. 황지윤 작가님 작품에 대해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황지윤…… 작가요?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혹시 모르시는 분이신가요?”

-아뇨. 알고는 있는데…… 걔가 대본 투고 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서요. 게다가 작가라니…….

“아, 최근이 아니라 7년 전 작품입니다.”

-7년 전이요? 7년 전이라면 황지윤이 중학생 때인데…… 걔가 그때 뭘 쓰긴 썼던…… 헉! 혹시 코코아엔터에요?

중학생 때 썼다는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2팀 직원들과 안다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식 소속 배우가 이서준밖에 없는 지금 ‘코코아엔터’라는 이름은 컸다.

오성태 감독과 통화할 때도 섭외한 배우가 있는데 유명세 때문에 서준으로 바뀔까 봐 코코아엔터라는 걸 잠시 숨겼고, 조금 전도 문제가 생길까 봐 일부러 피해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네. 코코아엔터 2팀입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황지윤 대본 보낸 곳이 거기밖에 없거든요. 진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아, 근데 뭐 때문에 전화 주셨죠?

“저희 쪽에 들어온 작품이 하나 있는데 황지윤 작가님 대본이랑 비슷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시나리오를 판매하셨나 싶어서요.”

-아뇨. 걘 자기 작품에 애착이 많아서 팔았을 리는 없습니다. 비슷하다라…… 혹시 그 작품 제목이 무명 화가인가요?

오늘 몇 번이나 놀라는지 모르겠다.

공개되지도 않은 작품을 언급하는 황도윤과 무슨 일인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상황에 안다호와 2팀 직원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황지윤 작가님과 통화 가능할까요? 연락처만 알려주셔도 됩니다.”

-아! 여기 있습니다. 바꿔드릴게요.

잠시 시간이 흐르고,

-……여보세요. 황지윤입니다.

조금 피곤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제 작품이요? 제 작품이 코코아엔터에 있다고요? 아니, 잠깐만요. 그 작품 제목이 뭐죠? ……사, 사랑방 화가요?”

코코아엔터라는 말에 당황하던 황지윤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사랑방 화가]

그건 황지윤이 현재 복구 중인 대본(오성태가 표절한 대본이기도 하다)의 초기 버전의 제목으로,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수업 중 단편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읽고 구상했던 작품이었다.

단편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나오는 관찰자 ‘옥희’처럼,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이서준이 관찰자로 등장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적었었다.

‘근데 그것도 USB 고장으로 날아갔을 텐데?’

황지윤이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그게 왜…… 거기에 있어요? 전 코코아엔터에 보낸 적이 없는데…….”

그때, 웬수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내가 보냈지!”

당시 고1이었던 황도윤이 하하, 웃었다.

“그때 네가 맨날 뭐 적길래 봤더니, 표지에 서준이 이름이 적혀 있잖아. 그래서 코코아엔터에 보냈지.”

황지윤이 이마를 짚었다.

“아니, 중2가 재미 삼아 끄적인 대본을 진짜 소속사에 보내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동생아. 네 대본이 무명 화가랑 얼마나 비슷하면 코코아엔터에서 연락을 했겠냐. 증거가 생긴 거라고. 증거가!”

……그러네?

조용히 말하는 황도윤에 황지윤의 눈이 번뜩였다. 다 날아간 줄 알았던 증거가 나타난 것이었다.

때마침 휴대폰 건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 대본, 어디 판매하신 적이 없으시다는 거죠?

“네네! 안 팔았어요! 제 거예요! 제 작품이에요!”

* * *

코코아엔터가, 왜 황지윤에게?

놀란 오성태와 학생들이 통화를 하고 있는 황지윤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상기된 황지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잠시 통화했는데, 2팀이라더라. 알지? 코코아엔터 2팀에 누가 있는지?”

오성태가 살벌한 눈빛으로 황도윤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오성태에게 전화를 한 것도 2팀 직원이었다.

황도윤이 여유롭게 웃으며 하는 말에 학생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지, 진짜 코코아엔턴가?”

“거짓말 아니야? 코코아엔터에서 왜 황지윤한테 전화를 해?”

“그거야 성태 선배님이 표절했다고 주장하니까, 논란이 생기기 전에 입막음하기 위해서 아닐까요?”

“코코아엔터가 여기 일을 어떻게 알고?”

이제 막, 여기에서 불거지려던 문제였다. 아무리 정보력이 대단해도 이 몇 분 사이의 일을 코코아엔터가 알긴 힘들었다.

“게다가 연락해도 성태 선배한테 먼저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쩐지 시선이 몰리는 것 같았다. 오성태는 축축해진 두 손을 쥐었다 폈다.

괜찮다.

두 주인공 중의 한 명은 아예 어른에서 어린아이로 설정을 바꾸었고 배경도 서양식 저택에서 한옥으로 바꾸었다.

거기에 법적으로 걸릴 문장은 하나도 없었고 인상적인 장면들도 모티브가 될 만한 작품들과 자료들을 찾아놓았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면 된다.

‘사람의 상상력이 거기서 거기지.’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표절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터였다.

오성태가 애써 진정하려고 할 때, 벨소리가 들렸다. 오성태의 휴대폰이었다.

사방에서 밀려 들어오는 전화들을 즐기기 위해 커다랗게 설정해 둔 벨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안 받냐? 급한 전화일 수도 있잖아.”

황도윤의 말에 오성태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금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코코아엔터]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