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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36화 (536/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36화

시간을 되돌려, 나흘 전.

이제 졸업을 앞둔 영화과 4학년 오성태는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배우 소속사의 전화였다.

-무명 화가, 오성태 감독님 맞으시죠?

“……아, 예. 예.”

대낮부터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오성태가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저희 배우가 감독님 작품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요. 무명 화가의 화가역 배우 정해졌나요?

오성태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며 입을 열었다.

“아뇨. 아직 생각 중입니다.”

배우 이름도, 소속사 이름도 안 꺼내는 걸 보니, 별 볼 일 없나 보다.

‘근데 내가 어디에 대본을 보냈더라? 작은 회사에는 안 보냈던 것 같은데…….’

오성태가 다시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잘됐네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코코아엔터 2팀, 정유정이라고 합니다.

“……코코아엔터요?”

오성태가 손을 멈췄다. 친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자식 취했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성태도 자신이 취한 줄 알았다.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네. 코코아엔터입니다. 저희 이서준 배우가…….

휴대폰 건너에서 꿈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코코아엔터, 무명 화가, 이서준 배우, 출연…….

……이서준 출연?

술이 확 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냐며 달라붙는 친구들을 발로 밟으며 오성태가 말했다.

“이, 이서준 배우가 제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고요?”

오오.

“이 새끼. 연기도 잘하네.”

“감독이 아니라 배우가 돼야 했었을 듯.”

“왜, 남의 작품 고치는 건 잘하잖아.”

오성태는 자신이 쇼를 한다고 생각하며 킬킬거리는 무리에서 조금 멀어져 통화를 이어나갔다. 직원이 뭐라고 말하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씨X. 코코아엔터란다. 이서준이란다!

오성태는 정신을 반쯤 놓고 통화를 했다.

“……하!”

전화가 끊기고 나서야 참고 있던 숨을 내뱉은 오성태가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독립영화 찍고, 감독들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데뷔하냐고 생각했더니,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서준…… 이서준만 있으면……!”

독립영화가 뭐냐.

곧바로 상업영화로 데뷔할 수도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있던 친구들이 중얼중얼거리는 오성태를 미쳤냐는 듯 바라보았다. 그런 눈빛에도 오성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트북을 꺼내 그 앞에 앉았다.

“근데…….”

오성태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노트북을 뒤적거렸다.

“무명 화가가 뭐더라.”

* * *

오성태와 황지윤이 만나기 20분 전.

한예대 교내 카페.

한 손에는 종이 몇 장을, 한 손에는 음료수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황도윤이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오성태, 서준이랑 영화 한다며?”

황도윤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황지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래. 나흘 전에 코코아엔터에서 대본 보고 연락 왔대. 아직 계약서는 안 썼지만 이서준 배우가 출연하고 싶어 한다니까 거의 확정이래. 독립영화로 찍을지 상업영화로 찍을지 안 정했지만, 오성태는 상업영화로 찍을 거라고 하고 있어. 그리고 상업영화로 찍는다면 배우들은 이서준 사단으로 빵빵하게 채울 예정이고, 투자사에서 제작비도 엄청 받아서 제작할 계획이래. 일단 영화관 올린 다음에는 플러스에 업로드도 할 예정이고.”

황지윤은 쉬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같은 학교니까 엑스트라나 단역 배우들은 한예대생들 중에서 뽑을 생각이래. 잡일 하는 스태프들도. 9월 10일까지 오성태 메일로 지원서 보내주면 된대. 뭐, 오성태 메일 주소까지 알려줘?”

다음 질문으로 ‘독립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라던데 진짜야?’ 하고 물으려던 황도윤은 우다다다 말을 내뱉는 동생의 모습에 눈을 끔벅였다.

“……아니요?”

후우, 한숨을 내쉰 황지윤이 다시 노트북에 집중했다. 생각이나 하고 적는 건지 새하얀 모니터가 금세 새까만 글자로 가득 찼다.

황도윤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동생의 모습이 눈을 데굴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애들이 엄청 물어봤구나?”

“하아, 그래. 물어보는 애들도 많고 들려오는 것도 많아. 연기과도 있더라.”

“어쩐지. 여름방학인데 많이 보인다고 했어.”

다들 서준이 출연한다고 하니, 작은 역이라도 얻기 위해 학교에 나오는 모양이었다.

“코코아엔터에서 전화 오자마자 여기저기 자랑했다고 하니까 관련 학과에는 다 퍼졌을걸. 좀 있으면 기사도 날 것 같더라.”

황지윤의 말에 황도윤이 음료수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출연하는 거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조용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대본은? 잘 적고 있냐?”

“어. 계속 읽었던 거니까 다 기억하고 있어. 그냥 적기만 하면 돼.”

열심히 타자를 치는 황지윤을, 황도윤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평소 남매 사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운도 없지…… 누구는 서준이랑 작품 하는데, 누구는 랜섬웨어에 걸리고 외장하드 고장 나고 클라우드 해킹당해서 대본이랑 자료 다 날아갔네.”

……어? 어어? 어!? 아아아악!!!

황도윤은 황지윤이 비명을 지르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게 한 번에 일어났으니…….’

자료와 백업의 중요성을 잘 아는 IT 관련 직종의 부모님이 질린 기색으로, 굿이라도 하자고 하셨다. 황지윤은 무슨 굿이냐고 한 귀로 흘렸지만.

“……약 올리냐?”

황지윤이 고개를 들어 인생 최고의 웬수를 바라보았다. 눈으로 욕하는 동생의 모습에 황도윤이 얼른 두 손을 들었다. 씩씩 열을 내던 황지윤의 눈에 황도윤의 손에 들린 종이 몇 장이 들어왔다.

“그건 뭔데?”

“아, 이거? 오성태 작품 줄거리.”

“하려고?”

“그건 아니고. 서준이가 고른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다고 하니까 친구가 주더라. 자랑도 할 겸 여기저기 뿌리고 있다던데, 읽어보니까 걔치고는 잘 적었더라고.”

황지윤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황도윤이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 오성태가 괜찮은 작품을 적었다고? 맨날 애들 작품 훔치고 표절하던 사람이?”

“그러고 보니 너 또 오성태랑 싸웠다며?”

“아니, 오성태가 1학년 걸 표절했다니까? 아직 삐약삐약하는 그 어린애 거를!”

“싸울 만하네.”

황도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황지윤이 종이를 바라보았다.

[무명 화가]

[감독: 오성태]

[무명 화가 역: 이서준]

“하, 벌써 다 적어놨네.”

계약서도 아직 안 적었다면서.

황지윤은 자꾸만 옹졸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근데 도저히 진정이 안 된다. 당장에라도 코코아엔터에 가서 오성태와 그 무리가 저지른 만행을 알리고 싶었다. 근데 오성태 무리가 교묘하게 저지른 탓에 증거가 없었다.

황지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성태가 성공하면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그렇긴 하지.”

오성태에게 작품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나올 게 뻔했다.

“……이것도 다른 사람 작품 훔친 거 아니야?”

의심의 눈초리로 황지윤이 첫 장을 넘겼다. 첫 문장이 보였다.

황도윤은 음료를 마시며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역시 오성태 작품에 대한 기사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지? 오성태가 그런 작품 썼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 거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는 황지윤에, 황도윤은 저도 모르게 입안에 있던 음료수를 주르륵 뱉어냈다.

* * *

“진짜? 진짜 네 대본이라고?”

“그래! 설정이 바뀌긴 했어도 내 작품이야! 내 거라고!”

투우사의 붉은 망토를 본 황소처럼 황지윤이 씨익씨익거리며 교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황도윤이 그 뒤를 따라다녔다.

“이 미친놈이 하다 하다 내 것까지 훔쳐가!?”

“황지윤. 조금 침착하게…….”

“저기 있네!!”

나흘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오성태는 오늘도 학교에 나와 학생들의 감탄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학생들이 알아서 떠들어주니 이제는 따로 자랑할 필요도 없었다.

“미친! 데뷔부터 상업영화 찍은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그것도 주연배우가 이서준이잖아요! 천만은 보장된 거 아니에요?”

“그럼 돈은 얼마나 버는 거래!”

“이서준 사단 배우들이 출연할지도 모른다면서요?”

오성태가 어깨를 으쓱이며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 그건 내 생각이긴 한데, 아무래도 캐스팅에 감독 의견도 많이 들어가잖아. 나는 김종호 배우나 이지석 배우가 맡아줬으면 하거든. 뭐, 안 되면 다른 배우도 괜찮지. 박중현 같은?”

오성태가 이야기하는 다른 배우도 급이 높았다.

우와아아아, 하고 탄성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세트장도 짓고 난 후에 이스케이프처럼 테마파크로 만들까 생각 중이야.”

“오오! 제작비가 돼?”

“야. 이서준 사단에 플러스 지사장 있는 거 몰라? 플러스가 돈이 얼마나 많은데!”

“진짜 미쳤다!”

데뷔한 영화감독들에게도 엄청난 일인데, 아직 데뷔도 못 한 대학생들에게는 얼마나 대단하게 다가올까.

“이제 성태 앞은 완전 꽃길이네!”

“이번 작품 찍으면 성태 너도 이서준 사단 되는 거 아니야?”

“맞아! 그러면 나중에 할리우드에 갈지도 모르고!”

“나중이 뭐야. 이번 것 찍고 나도 전 세계에 알려질 텐데!”

할리우드.

그 단어에 국내 영화계만 생각하고 있던 오성태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래. 자신이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오성태를 둘러싼 학생들은 마치 자신이 오성태라도 된 것처럼 들떠 떠들어댔다.

“그래요! 이서준 눈에 들 정도로 성태 선배 작품이 좋다는 거잖아요! 해외에서도 통할 게 분명해요.”

“황지윤이 표절이다 뭐다 떠들어대서 그렇지, 성태 선배가 원래 잘하잖아!”

“맞아요. 그 선배는 매번 그래. 증거도 없으면서!”

황지윤의 이름에 오성태의 몸이 잠시 움찔 떨렸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태야! 스태프 필요하지 않아? 어디든 괜찮아!”

“선배님! 저도 맡겨만 주시면!”

나이와 상관없이 매달리는 학생들과 우월감에 푹 빠져 있는 오성태를 본 황지윤.

힘겹게 붙잡고 있던 정신줄이 결국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황도윤이 그 모습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황지……!”

“야, 이 개새끼야!”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내 대본을 훔쳐가!?”

* * *

황지윤의 외침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아, 또 왔네.”

“이럴 줄 알았다.”

“성태 선배. 신경 쓰지 마세요. 쟤 맨날 저러잖아요.”

“맞아. 지금까지는 1, 2학년들 작품이라고 하더니, 이번엔 이서준이 선택한 작품이라고 하니까 자기 작품이라고 하네.”

황도윤이 확실하게 뒤집어 엎은 연기과와는 달리, 영화과는 황지윤의 편과 오성태의 편으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균형이 이번 이서준의 오성태 영화 출연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간간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황지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오성태 무리의 만행에 자신이 도와주었던 학생들이었다.

황지윤은 배신감을 씹어 삼키고 오성태를 바라보았다.

일단 작품이 먼저였다.

살벌하게 노려보는 황지윤에 오성태가 웃으며 말했다.

“황지윤. 선배한테 개새끼가 뭐야. 개새끼가. 이러니 영화과가 개판이라는 소리를 듣지.”

“개새끼니까 개새끼라고 하지. 뭐라고 해? 저번에 내 노트북으로 뭐하나 했더니, 내 작품 훔치고 있었던 거네?”

“반말도…… 음. 됐다. 그리고 그건 그때도 말했듯이 잠깐 뭐 좀 검색한다고 그랬던 것뿐이라니까?”

“휴대폰은 뭐 폼으로 들고 다니냐?”

“……황도윤.”

오성태가 같은 중학교를 나온 황도윤을 바라보았다.

황도윤도 황지윤처럼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싸우라고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남매 사이지만, 내 동생은 나만 놀릴 수 있었다.

“그때 배터리가 없었어.”

“아이고. 그러셔. 폰 빌려줄 친구도 없나 보네. 하긴, 중학생 때도 그랬지.”

그때도 애들 거 훔치고 다니다가 들키는 바람에 친구 없었잖아.

황도윤의 눈빛에 오성태가 이를 악물었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그때의 멍청한 자신이 아니었다.

“그래. 어떤 점이 황지윤 네 작품이랑 비슷하다는 거야?”

“먼저 이름 없는 화가가 주인공이라는 거요.”

“글쎄. 이름 없는 주인공은 드물지만 있잖아? 그리고 주인공이 화가인 작품들도 많고.”

오성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윤이 들끓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말을 이었다.

“또 있어요. 다른 주인공의 시점에서 화가의 행동을 살핀다는 점이요.”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작품이 아예 없는 것 아니고.”

근처 학생들이 수업에서 배웠던 작품들의 이름을 내뱉었다.

“주인공인 화가가 그림을 못 그린다는 점도 있죠.”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시련이 있게 마련이지. 화가가 주인공이면 그림을 못 그린다는 게 가장 큰 시련이잖아?”

“화가와 관찰자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첫 만남에서 사이가 나빴다가 점점 좋아지는 것도 영화 속에서 자주 나오는 관계지.”

……그게 한 작품에 들어 있다는 게 문제잖아. 이 개새끼야.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오성태에 황지윤이 이를 갈았다. 그 이후에도 오성태는 조목조목 받아쳤다.

“사람이 상상하는 게 거기서 거기지, 뭐.”

“맞아. 자신만 좋은 작품 떠올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쑥덕대는 학생들에 황지윤의 표정이 흐려졌다. 오성태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내 작품 관찰자는 아역인데, 너도 그래?”

“……아뇨.”

“그럼, 네가 나보다 먼저 썼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자료만 날아가지 않았다면…….’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도 아닌가.’

화가와 관찰자 모두 성인인 황지윤과 달리, 오성태의 화가와 관찰자는 성인과 아역이었다.

‘일어나는 사건이 비슷해도 성인과 성인 사이의 대화와 성인과 아역 사이의 대화는 다를 수밖에 없어.’

입을 다문 황지윤을 바라보며 오성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증거도 없는 거네. 근데 대본도 아니고 줄거리만으로 표절이니 뭐니 하는 건 너무 성급하지 않냐? 줄거리는 생략된 부분도 많고 캐릭터 성격이나 중요한 장면이 다를 수도 있잖아.”

좋은 작품.

“물론 내가 표절했다는 건 아니고.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하는 말이야.”

고맙다. 황지윤.

“애꿎은 사람 잡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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