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35화
“으으음…….”
소파에 똑바로 앉아 대본을 보고 있던 서준의 자세가 점점 무너져내렸다. 어느새 테이블에 축 늘어져, 옆으로 대본을 보고 있었다.
[무명 화가]
사흘 전, 서준이 차 안에서 읽었던 한예대생의 대본이었다.
마침 서준의 연습실에 들른 안다호가 서준의 그런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손에 대본을 들고 있는 걸 보면 평소와 같은데, 오랫동안 고민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항상 시원스럽게 출연한다, 안 한다를 결정하는 서준이 아니던가. 대본을 가지고 이렇게 길게 고민했던 적은 없었다.
‘쉐도우맨2는 예외로 치고.’
그때는 아직 서준의 매니저가 되기 전이라, 이야기만 들었던 안다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건 대본이 아니라 연기가 문제였다고 들었다.
“서준아. 무슨 문제 있어?”
벌써 사흘째.
대본을 계속 들고 있는 걸 보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한다고 하면 될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안다호의 물음에 오른쪽 볼을 테이블에 붙이고 팔랑팔랑 대본을 넘기던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요. 다호 형. 대본이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기운이 빠진 데다가 오른쪽 볼이 눌려 약간 뭉개지고 힘없는 말투였지만, 알아들은 안다호가 눈을 끔벅였다.
“마음에 드는데…… 안 든다고?”
“네에.”
서준도 참 복잡한 심경이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마음에 든다. 사이사이 장면들도 연기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근데 나머지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계속 고민하다가 마음에 드는 부분을 파란색으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빨간색으로 표시해 봤다.
여전히 테이블에 축 늘어진 서준이 팔랑팔랑 대본을 넘겨보았다. 파란색과 빨간색 펜 자국이 아주 멋진 소용돌이처럼 섞여 있었다.
농담이 아닌 것 같은 서준의 모습에 안다호가 말했다.
“대본 좀 줘봐. 서준아.”
“네에-”
서준이 힘없는 모습으로 안다호에게 대본을 건네주었다. 알록달록한 대본을 보며 안다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붉은 펜으로 체크된 장면에는 ???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걸 왜 넣었지?
-이 캐릭터 꼭 있어야 하나?
-여기 뭐 빠진 것 같은데?
“저도 모든 장면이 제 마음에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힘을 넣는 구간이 있으면 힘을 빼는 구간도 있는 법.
서준이 직접 만드는 작품이 아닌 이상, 모든 장면이 서준의 마음에 들 수는 없었다.
“근데 이건 좀 심한 듯.”
서준의 말에 안다호가 쓰게 웃었다.
“그래도 안 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
“……하아. 그게 문제예요. 딱 5:5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달까. 으아아아…….”
서준이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뭐가 문제일까요? 다호 형.”
“시나리오를 쓴 감독이 현역 대학생이라는 게 문제겠지.”
“하아. 역시 그렇죠?”
아무래도 경험이 적은 대학생의 작품은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안다호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학생 작품에 서준이가 출연하는 건 처음인가?”
“네. 맞아요.”
중, 고등학생 때 했던 졸업작품도 학생 작품이긴 하지만, 그건 서준 본인이 쓴 작품이었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었다.
“으음. 각색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래도 이건 감안하고 생각해야 할 것 같네.”
“각색…… 생각해 보긴 했는데 독립영화잖아요. 너무 간섭하는 것 같아서요.”
상업영화라면 몰라도.
몸을 일으킨 서준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좀 더 묵혀두고 감독님이 경험 쌓은 후에 수정하면 더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금방 찍을 것 같기도 해서 고민돼요.”
“다른 배우에게 이 역할을 주기엔 아쉬운 거네?”
정곡을 찌른 이 물음에, 저울이 기울어, 6:4가 되어버렸다.
“……네. 그러네요.”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랑 이야기하니까 정리되는 것 같아요.”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할래요. 이 작품. 하고 싶어요.”
“각색은 안 하고?”
“네. 뭐, 독립영화니까 그 정도는 고려해야죠. 각색까지는 아니어도 현장에서 연기를 보다가 감독님이 수정할 수도 있구요.”
[생존자들]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겠지만.
하기로 결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고민을 떨쳐 버린 서준이 대본에 집중했다.
어쩌면 자신이 보지 못한 감독의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주인공이 정신병이라든가, 꿈속 배경이라든가,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런 서준을 보고 작게 웃은 안다호에게는 감독에게 연락하기 위해 조용히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 * *
나흘 후.
코코아엔터에 소속될 배우들의 연기 영상을 본 매니저들은 그 이후부터 계속 자료실에서 지냈다.
아침에 출근해서 대본을 읽고 분류하고, 점심을 먹고 연기했던 배우들을 분석해 차기작을 고르는 것이 최태우와 매니저들의 루틴이었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잠시 눈의 피로를 풀고 있는 8명의 매니저들.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는데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다들 배우들한테 어울리는 대본 찾으셨어요?”
어느새 친해진 매니저들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저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대본은 있는데, 다른 걸 읽어보면 그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고민만 하게 되더라.”
그에 몇몇 매니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의외로 비슷한 이야기가 많아서 지루하던데…… 이젠 앞부분만 봐도 뒤에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알 것 같아요.”
“클리셰라는 거지. 그리고 그게 잘 먹히고.”
“전 이서준 배우한테 들어온 대본들은 전부, 엄청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막 쓴 것 같은 대본도 있더라구요.”
“아마 받은 건 전부 자료실에 모아둔 것 같더라.”
그러니 이번 기회에 싹 정리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신사옥 이전이 모레부터지?”
“응. 다른 곳은 다 짐 싸고 있던데.”
자료실 이외의 코코아엔터 사무실들은 하나둘 짐을 싸고 있었다. 내일은 자료실 대본들도 다 모아서 상자에 넣어지게 될 터였다. 물론 여기 있는 매니저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 대본 선택 언제까지 해야 되더라?”
“9월 첫째 주요. 이사하고 나면 열흘 정도 남아요.”
신사옥에 가서도 열흘 동안은 자료실에서 벗어나지 못할 매니저들이었다.
“열흘이라…… 많이 남은 건지 안 남은 건지 모르겠네요.”
최태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서준 배우 차기작은 골랐어요?”
“아, 그것도 되게 어려웠어. 내가 보기엔 좋은 아역 캐릭터도 꽤 있었는데, 왜 이서준 배우가 안 골랐는지도 모르겠더라.”
“게다가 여기 있는 대본들은 다 한 번씩 거절한 걸 텐데, 이서준 배우가 마음에 들 만한 대본이 있을까요?”
그 말에 다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내가 보고 싶은 장르 고르려고.”
“저도요. 그래서 벌써 골랐어요.”
“어떤 거?”
“좀비영화요. 이스케이프 같은 거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최태우와 매니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할리우드 작품 보신 분 있으세요? 이서준 배우한테 할리우드에서 대본 보낸다는 기사는 많이 봤는데, 자료실을 찾아봐도 본 적이 없어서요.”
“저도 찾아봤는데 없더라고요.”
“난 있어도 영어 못해서 못 읽어.”
그 말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거 물어보니까 따로 보관 중이라던데?”
“미국 영화잖아. 유출되면 큰일이겠지.”
“맞아. 쉐도우맨 같은 시리즈물이나 생존자들 같은 작품의 대본이 유출되면…….”
안 봐도 뻔했다.
고소의 나라, 미국. 쏟아지는 고소장들을 떠올린 매니저 몇몇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점심시간이 끝났다. 매니저들이 다시 자료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매니저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몇몇은 오전에 쌓아둔 대본 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읽기 시작했고, 몇몇은 새로운 대본들을 가지러 책장으로 향했다.
최태우는 자리에 앉아 오전에 가져왔던 대본 중 하나를 펼쳤다.
‘……이거.’
편한 자세로 읽고 있던 최태우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휴대폰과 이어폰을 꺼내, 안다호 팀장에게서 받은 동영상을 재생했다. 코코아엔터의 세 번째 배우, 10년째 무명 생활을 하고 있는 배승원 배우의 영상이었다.
최태우의 눈동자가 동영상과 대본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노트를 꺼내 배승원의 연기를 분석하며 나름 적어놓았던 것들도 읽어보았다.
‘괜찮은 것 같은데?’
이 대본이 영화로 만들어질 일은 거의 없겠지만, 비슷한 줄거리나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라면 배승원 배우에게도 충분히 어울릴 것 같았다.
그렇게 배승원 배우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작품이 하나 찾은 최태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음 대본을 손에 들었다.
‘응?’
지금까지 봐왔던 대본들이나 시놉시스와는 조금 달랐다.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조금……아니, 많이 엉성한데?’
먼저 앞부분에 적혀 있는 캐릭터들의 배경 설명이 빈약했다. 게다가 대사는 툭툭 끊어졌고, 배우가 어떤 투로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는 지문은 생략된 곳이 많았다. 어떤 장면에서는 과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일주일 내내 대본을 읽으면서 높아진 최태우의 눈에 부족한 점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줄거리가 흥미로웠다. 몇 페이지 읽고 내려놓으려던 최태우는 금세 끝까지 읽었다.
‘어? 여기서 끝난다고?’
그게 이야기의 끝은 아니었지만.
‘마무리가 왜 이래?’
프린트를 하다가 멈춘 건지, 주인공의 대사가 이어져야 하는 부분에서 대본이 끝나있었다. 최태우가 볼을 긁적였다. 2팀에서 실수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정말로 이게 끝인 것 같았다.
‘엉성하긴 하지만 재미있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이서준 배우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조금 전 배승원 배우 때처럼 두 주인공 중 한 명의 모습에 이서준 배우의 모습이 저절로 대입되었다. 이서준 배우라면 멋지게 연기해 낼 것 같았다.
‘근데 안 되겠지.’
어설프고 미완성인 대본이다.
작가의 수준을 보자면 아직 배우고 있는 학생 같은 느낌.
흥행이 될지도 모르겠고, 탑배우 이서준의 필모그래피에 들어가기에도 많이 부족해 보였다.
‘물론 그냥 장르와 캐릭터만 추천하는 거라지만…….’
그렇다고 미완성인 대본을 추천하면 입사 일주일 만에 잘릴 것 같았다.
최태우는 조금 아쉬운 눈으로 들고 있던 대본을 한쪽에 놓아두었다.
그렇게 매니저들이 대본을 찾고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안다호 팀장이었다.
매니저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다호가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있으세요. 잠시 알려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아, 네!”
매니저들이 테이블에 모여 앉자, 안다호에게는 매니저들이 알고 있던 대로 모레 신사옥으로 이전하기 때문에 내일은 자료실 짐을 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2팀에서도 와서 도울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이거.”
안다호가 들고 있던 대본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무명 화가]
매니저들이 고개를 갸웃하자, 안다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이서준 배우가 차기작으로 고른 대본입니다.”
“……오…….”
나지막한 감탄과 함께, 일주일 동안 자료실에서 이서준 배우에게 어울릴 만한 대본을 찾고 있던 매니저들의 시선이 테이블 위 대본으로 향했다.
평범했던 대본이 갑자기 달라 보였다. 반짝반짝 빛이라도 나는 것 같았다.
어디 명감독이 쓴 대본인가?
매니저들은 표지에 적힌 감독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감독 : 오성태]
나는 잘 모르지만 유망한 감독님인가 보다, 하고 최태우가 생각할 때 안다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대본은 대학생 감독이 쓴 작품입니다.”
……대학생 감독?
“아직 감독과 의논 중이기는 하지만, 독립영화가 될지도 모르는 작품이죠.”
……독립영화요?
……이서준 배우가요?
매니저들이 멍한 표정으로 안다호 팀장을 올려다보았다.
안다호가 작게 웃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린이 연극을 하고 싶다고 하던 서준을 바라보던 자신이 이런 표정이었겠구나, 싶었다.
안다호에게는 그때, 서준이 했던 말을 매니저들에게 해주었다. 아마 매니저들이 서준에게 어울리는 작품을 고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서준이는…… 이서준 배우는 흥행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고릅니다. 연극, 영화, 독립영화, 단편, 단막극…… 흥행과 필모그래피는 생각하지 않고 가장 재미있는 작품을 고르죠.”
흥행을 신경 쓰지 말라는 안다호의 말에, 이전 회사에서 배우를 맡았던 4명의 매니저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릴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아니. 배우인데 필모그래피를 신경 쓰지 말라고?
흥행 한 번으로, 망작 한 번으로 몸값과 이름이 요동치는 세계다.
물론 이서준 배우는 이미 탑급에 올라서 한두 번 실패한 거로는 큰일이 나지 않겠지만, 그게 이어지다 보면 ‘한물갔다’는 이야기가 나올 게 뻔했다.
놀람과 걱정이 가득한 매니저들과 달리, 누구보다도 걱정해야 하는 이서준의 매니저는 별일 아닌 듯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서준 배우의 차기작은 흥행 같은 한계를 두지 말고 골라주십시오. 아, 차차기작이네요. 여튼, 이서준 배우 실력이면 어떤 영화도 잘 소화해 낼 테니까 말입니다.”
배우를 향한 안다호의 자부심에 매니저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최태우의 시선이 테이블 한쪽에 놓여있는 대본으로 향했다.
‘저거…… 추천해도 괜찮으려나?’
한계를 두지 말고 고르라고 했으니, 미완성인 대본도 괜찮지 않을까?
최태우가 고민하는 사이, 할 말을 마친 안다호가 자료실을 나갔다. 매니저들은 대본을 읽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겹치는 손에 가위바위보를 외쳤다.
“가위바위보!”
* * *
같은 시각.
한국예술대학교.
영화과 4학년, 오성태가 선배, 동기, 후배 거기에 다른 과 학생들까지 우르르 이끌고 지나가고 있었다.
“성태야! 스태프 필요하지 않아? 어디든 괜찮아!”
“선배님! 저도 맡겨만 주시면!”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니 시끄러울 만도 한데, 학생들의 중심에 있는 오성태는 오히려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살벌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개새끼야!”
연기과 학생회장 황도윤의 동생,
“내 대본을 훔쳐가!?”
영화과 3학년 황지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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