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34화
걸림돌이 되던 문제도 해결되고, 가벼운 마음으로 몇 달 만에 다시 출근하게 된 최태우는 마지막으로 편하게 차려입은 옷을 정돈하고 집을 나섰다.
“진짜 내가 코코아엔터에 다니게 되다니…….”
최태우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의 5층짜리 건물을 바라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건물인데 면접날보다 더욱 멋져 보이는 것 같았다. 거기다 이서준 배우가 있는 배우팀 소속. 언젠가 한번 지나가면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들어 벌써부터 애사심이 샘솟는 것 같았다.
“최태우 씨?”
경비원이 그런 최태우를 발견했다. 오늘 첫 출근 하는 매니저들의 얼굴은 사진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배우팀 소속 매니저가 된 최태우라고 합니다!”
“하하.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시네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경비원이 웃으며 최태우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사람들이 보였다. 최태우도 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일찍 온 사람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전부 이번에 입사한 매니저인 것 같았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최태우가 빈자리에 앉았다.
둘러보니 누가 경력이고 신입인지 알 것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닐 일이 많은 엔터인 만큼, 경력인 사람들은 제법 편한 복장이었고 신입인 사람들은 조금 답답한 옷을 입고 있었다.
코코아엔터에서 미리 편한 복장이라고 알려줬지만, 어느 정도로 편한 복장인지는 잘 모르니 신입 나름대로 최대한 생각해서 입고 온 것일 터였다.
신입인 것 같은 세 사람도 그걸 알아차린 모양인지,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목 끝까지 답답하게 채우고 있던 단추를 하나둘 정도 풀고 최대한 편안하게 보이도록 고치고 있었다.
최태우를 포함해, 다섯 명의 경력 매니저들이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어쩐지 첫 출근날이 생각나네.’
떨리는 마음으로 잘 차려입고 출근했다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옷은 다 구겨지고 땀범벅이 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여기 있는 8명은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수습 기간이 지나고 다 같은 배우팀 소속 매니저로 일하게 될 테니 친하게 지내는 편이 좋았다.
최태우와 비슷한 마음인지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매니저는 처음이세요?”
“아, 네.”
“첫날부터 돌아다니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매니저는 이리저리 돌아다닐 일이 많으니까 다음에는 더 편한 복장으로 오면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신발은 제일 편한 거로 신고 와요.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발이 편한 거로 말이에요.”
한 경력 매니저의 진심 어린 충고에 신입 매니저들이 조금 겁을 먹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하루 종일 뛰어다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걸 시작으로 매니저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아직 배우랑 계약했다는 소식이 없어서…… 바로 일을 시작할 것 같지는 않죠?”
“하긴. 데뷔한 배우가 코코아엔터랑 계약했다면 벌써 기사가 나고도 남았을 것 같긴 합니다.”
“의외로 신인 배우만 있어서 기사로 안 난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아예 처음부터 키울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입들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경력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태우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첫 일은 신사옥 이전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사 업체에 맡기기 힘든 자료나 물건들도 많으니까요.”
최태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아엔터의 신사옥 이전은 제법 알려진 일이었다.
경력 매니저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름에 이사라니…… 다음엔 더 편하게 입고 와야겠어요.”
“그러게요.”
“그래도 신사옥이라니, 어떤 곳일지 기대되지 않아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이었다. 새로운 매니저인가, 아니면 코코아엔터 직원인가. 최태우와 매니저들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면접 때 만났던 2팀장, 안다호였다.
안다호를 보고 놀란 매니저들이 몸을 뻣뻣하게 세웠다가 꾸벅 인사했다. 안다호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배우팀 팀장 안다호라고 합니다.”
* * *
안다호 팀장은 출퇴근 시간부터 회사의 복지까지 면접 때 다 하지 못했던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월급 같은 개인적인 부분들은 따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최태우는 귀를 기울이며 틈틈이 수첩에 메모했다.
“신사옥으로 이전하게 되면 배우팀은 1팀부터 4팀까지 운영하게 될 예정입니다. 2팀은 지금 활동 중인 배우들이, 3팀과 4팀에는 준비가 필요한 신인이나 무명 배우들이 소속될 겁니다. 여러분도 그중 한 팀에 배정될 거고요.”
한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물었다.
“저, 그럼 1팀은 어떤 팀이죠?”
“이서준 배우 전담팀입니다.”
오…….
낮게 흐르는 진심 어린 감탄에 안다호가 작게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본격적인 일은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시작될 계획입니다. 여러분이 맡을 배우들도 그때쯤 만나게 될 겁니다. 그전에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짐 정리인가.
최태우와 매니저들이 안다호를 바라보았다.
“저희 회사에 대본과 시놉시스들을 모아놓은 자료실이 있습니다. 이서준 배우가 저희 회사 소속이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들어온 작품들이라 양이 상당하죠.”
오…….
조금 전 탄성이 감탄이었다면 지금의 탄성은 막막함이 가득했다.
“여러분은 거기에서 이미 영상으로 만들어진 대본들을 골라내야 합니다.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이 있을 수도 있고, 제목이 바뀌어서 영화화한 작품이 있을 수도 있으니 내용도 읽어봐야 할 겁니다.”
매니저들의 떨리는 눈동자에 안다호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그 일만 맡으면 시간이 아깝겠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안다호가 들고 있던 리모컨을 누르자, 회의실이 어두워지고 벽 한쪽에 하얀 스크린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천장에 달린 빔프로젝터가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보여드릴 영상은 이제 저희 코코아엔터의 소속이 된 배우들의 연기를 찍은 영상입니다. 드라마도 있고 영화도 있고 연극도 있죠. 학원에서 연기한 모습도 있습니다.”
최태우와 매니저들이 눈을 끔벅였다.
“잘할 수 있는 연기와 잘 못 하는 연기가 다양하게 담겨 있죠. 여러분은 그 연기를 보고 배우들이 차기작이 어떤 장르의 어떤 성격의 캐릭터로 가면 좋을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과제에 최태우와 매니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쩌억 벌리자, 안다호가 말을 이었다.
“경력이 많은 배우라면 혼자서도 자기에게 맞는 다음 작품을 고를 수 있지만, 여러분이 담당하게 될 배우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현역 배우들도 매니저와 회사의 도움을 받는데, 신인이나 무명 배우들이 매니저가 아니라면 누구와 함께 차기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나.
안다호의 말에 매니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 때 그런 질문을 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여러분이 고른 작품과 캐릭터를 보고 배우들은 많은 생각을 하고 선택할 겁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배우와 매니저라면 제법 잘 맞을 테죠.”
안다호 팀장은 작품을 고르면서 배우와 매니저의 궁합까지 볼 예정인 듯했다.
물론 같은 차기작을 선택한다고 해서 배우와 매니저가 잘 지낼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서로 처음 만나는 사이라면 꽤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 친해지기 편하긴 하지.’
최태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안다호가 말을 이었다.
“이 차기작 후보들을 자료실을 정리하면서 골라주시면 됩니다.”
일이 몇 배로 많아진 느낌이지만, 넋 놓고 대본을 구분하는 것보다는 제법 의미 있는 일이라서 좋은 것 같았다. 자신이 선택한 작품을 배우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했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럼 저희와 배우가 고른 게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건가요?”
“아뇨. 아무래도 오래된 대본들이다 보니, 배우들의 진짜 작품은 요즘 기획 중인 작품 중에서 비슷한 장르의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를 고를 계획입니다.”
매니저가 과거의 대본 A, B, C를 고르면 배우가 A를 선택하고, 코코아엔터에서 A와 가장 비슷한 현재의 대본 A-1의 작품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매니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영상화가 쉬운 것도 아닌데 신인배우가 원한다고 해서 만들지는 않을 터였다.
‘이서준 배우라면 몰라도…….’
이서준 배우라면 20년 전 대본을 들고 온다고 해도 투자사들이 돈을 뭉텅이로 들고 올 게 분명했다.
“그러니 신중히 후보를 골라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있으신 분?”
“후보는 몇 개까지 가능한가요?”
“3개까지 가능합니다.”
“동영상을 가져갈 수 있습니까?”
“예. 바로 준비하죠.”
몇 번 더 질문과 응답이 이어지고, 더 이상의 질문이 나오지 않자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만…….”
왠지 꼭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가 꼭 하라는 소리로 들리는 건 착각일까.
상사의 말에 매니저들이 귀를 기울였다.
“이서준 배우의 차기작도 두 작품 정도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이서준 배우요?”
뜻밖의 이름에 매니저들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이서준 배우는 직접 작품을 고른다고 들었습니다만.”
최태우의 말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바뀌지 않을 겁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이서준 배우의 차기작으로 어떤 장르를 원하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매니저들의 모습에 작게 웃은 안다호가 리모컨을 눌러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럼 이제 영상을 보도록 하죠. 첫 번째 배우입니다.”
침을 꿀꺽 삼킨 최태우와 매니저들이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 배우가 내 배우가 될지도 몰랐다.
* * *
“그럼 다호 형도 같이 보고 있는 거예요?”
“배우들에 관해서 설명도 해줘야 하니까 말이야.”
2팀 직원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근데 다호 형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그치? 자료실 정리를 맡기면서 작품 보는 눈까지 살펴보는 데다가, 배우랑 매니저랑 친해질 계기까지 만들어주고.”
다른 2팀 직원들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매니저들은 배우들 연기 보면서 저 배우 내가 꼭 맡고 싶다, 하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배우들은 처음 보는 매니저가 자신의 연기를 보고 분석하고, 마음에 드는 차기작 후보들까지 찾아왔다고 하면 엄청 감동할 거고.”
그게 신인이나 무명 배우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만나는데 케미도 잘 맞겠지.”
“안 팀장님. 무서운 분이야.”
그 말에 2팀 직원들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기사들도 다호 형 계획이라면서요?”
“김 팀장님도 한 손 거들었지.”
“그 매니저분 오셨어요?”
“응. 다 왔다더라.”
인터뷰로는 좋은 사람 같던데.
어쩌면 자신의 매니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괜스레 관심이 갔다. 물론, 다른 매니저들도 관심이 갔지만 말이다.
매니저 말고도 관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배우분들은 언제 오신대요?”
서준의 물음에 상자 안에 대본을 담고 있던 2팀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유럽여행 중 서준에게 들어온 대본이었다.
“신사옥으로 옮기고 나서. 여긴 만날 장소가 애매하니까 말이야.”
“빨리 만났으면 좋겠어요.”
기대감이 담긴 서준의 목소리에 다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2팀 직원 중 하나가 대본이 든 상자를 챙기고 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가자. 서준아.”
“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
서준은 안다호가 없을 때마다 집까지 데려다주는 2팀 직원과 함께 차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서준의 옆에 대본 상자를 놓아둔 2팀 직원이 운전석에 앉았다.
“이번에 대본 재미있는 거 있어요?”
“특이한 건 있었어.”
“어떤 건데요?”
“대학생 작품이라서 아마 단편이나 독립영화로 제작하지 않을까 싶더라.”
오!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그 대학생도 한예대에 다니던데?”
“정말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의 작품이라.
서준이 흥미로운 얼굴로 대본 상자로 손을 뻗었다.
“형. 그거 제목이 뭐에요?”
“아직 가제인지 제목은 단순하더라. 그림.”
“그림…….”
이건가 보다.
서준이 대본 사이에서 [그림]이라고 적힌 대본을 꺼냈다.
“내용도 괜찮고 감독도 말단 스태프지만 나름 이 영화, 저 영화 참여한 것 같던……벌써 읽고 있네.”
백미러로 이미 대본에 푹 빠져 있는 서준을 본 2팀 직원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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