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30화
일요일의 인천 국제공항은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과 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이제 올 시간 되지 않았어?”
“이번에 나오는 것 같아.”
그중에는 한 달여의 유럽 여행을 끝내고 귀국하는 서준과 아이들의 부모님들도 있었다.
잠시 입국장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전광판에 도착한 비행기의 이름이 떴다. 서준과 아이들이 타고 있는 비행기였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니 게이트의 문이 열리고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쭉 빼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준과 아이들을 찾는 부모님들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지윤아!”
“미나야! 여기!”
“박지후! 지후야!”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를 나오는 서준과 아이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서은혜와 이민준은 유명한 아들을 둔 만큼 소리 없이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엄마! 아빠!”
영상통화도 가끔 했고 전화도 했지만 한 달이나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으니, 오랜만에 부모님 얼굴을 본 아이들의 얼굴에도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서준과 부부는 서준의 해외 촬영 때문에 제법 익숙했지만,
“잘 다녀왔어?”
“응.”
반가운 건 반가운 거였다.
꽈악 껴안는 엄마 아빠에 서준도 웃으며 엄마 아빠를 마주 안았다.
* * *
한 달 만에 돌아온 집에 서준이 한껏 풀어졌다.
“흐. 역시 집이 제일 편한 것 같아.”
소파에 누워 흐느적거리는 아들의 말에 서은혜와 이민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빨래할 거 있어, 서준아?”
“응. 잠시만!”
이민준의 말에 잠시 소파에 누워 흐느적대던 서준이 짐 정리를 하기 위해 일어났다.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던 서은혜가 물었다.
“서준아. 점심 먹을래? 아, 기내식 먹어서 배 안 고프려나?”
“괜찮아. 먹을래.”
서준은 옷이나 수건 같은 빨랫감을 꺼내 빨래바구니에 넣고, 노트북이나 충전기 같은 물건들도 원래 두었던 자리에 정리했다. 그리고 가족과 지인들에게 줄 선물도 포장이 구겨지지 않게 놓아두었다.
짐 정리를 끝내고 방을 나오니 점심 준비가 끝나 있었다.
메뉴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비빔국수.
서준과 부부는 삶은 달걀이 고명으로 올라간 매콤한 비빔국수를 먹으며 전화로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던 한 달여 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개학, 아니, 대학은 개강이지?”
서은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개강까지 한 달 정도 남았는데 뭐할 거야?”
“다음에 촬영할 작품 고르고, 코코아엔터 신사옥 구경도 하고, 새로 들어오는 배우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보려고.”
손가락 하나하나 꼽아가며 이야기하는 서준의 표정이 밝았다.
작품 고르는 것도 즐거웠고 신사옥에 생길 새 연습실도 기대됐고 동료가 될 배우들도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신사옥, 아직 공사 중이던가?”
“은찬이 말로는 중순쯤에 끝날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23일부터 이사한대.”
“짐 옮기려면 바쁘겠네. 아, 그러고 보니 서준이 대본도 많지 않아?”
서은혜의 말에 이민준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겨울잠 자기 전 먹이를 모아두는 다람쥐처럼, 서준이 읽고 난 대본들과 시놉시스들을 코코아엔터 자료실에 모아두고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응. 그것도 한번 싹 정리한다고 했어. 다호 형이.”
“그거 엄청 많지 않았어? 정리하려면 장난 아니겠네.”
8살 때부터 거의 12년간 모아온 대본들이니, 중간중간 정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양이 장난이 아닐 터였다.
“근데 서준이도 아쉽겠다. 대본 정리하면.”
대본 사랑, 서준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서은혜가 웃으며 말하자 서준이 아쉬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정리할 수 있을 때 정리해야지. 이제 영상화한 작품들도 있고 나이가 안 맞는 배역들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자료실 정리 도와주려고.”
“재미있는 대본 찾으려는 게 아니라?”
“……겸사겸사?”
눈을 데굴 굴리다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서준의 모습에, 한 달 동안 텅 비어 있었던 자리가 꽉 찬 것 같은 기분이 든 부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저 왔어요!”
월요일 오전.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한 배우 이서준 전담 2팀 직원들이 활짝 웃으며 등장한 서준을 반겼다. 다들 서준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서 그런지 편하게 대했다.
“와! 서준아! 잘 다녀왔어?”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너 그냥 여행이라며!”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서준이 웃으며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간식 테이블에 사 온 과자들을 올려놓고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사 온 선물들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지만, 개개인의 취향에 맞는 선물들이었다.
“근데 누나. 다호 형은요?”
안다호에게 줄 선물을 든 서준이 물었다.
“안 팀장님은 회의실 계셔.”
“오늘 회의 있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배우들 뽑으려고 하는데…….”
따르르릉!
과자를 먹고 있던 직원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기가 좀 시끄럽잖아. 그래서 회의실을 안 팀장님 사무실로 쓰고 있어.”
“그렇구나. 그럼 전 다호 형한테 가볼게요.”
“그래. 선물 고마워, 서준아!”
“과자 맛있게 먹을게!”
서준은 직원들과 인사를 하고 안다호가 있을 회의실로 향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 건너에서 들려오는 안다호의 차분한 목소리에 서준이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일찍 왔네? 오후에 올 줄 알았더니.”
테이블 가득 쌓인 서류들을 보고 있던 안다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준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서준도 배시시 마주 웃었다.
“네. 온 김에 자료실도 둘러보려고요.”
“하긴.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기엔 불안하지? 좋은 작품을 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하하.
정곡을 찔린 서준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렸을 때 읽었던 거랑 지금 읽는 거랑 느낌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아역 캐릭터는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캐릭터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을 수도 있고.”
역시 다호 형.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역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도 작품 그 자체가 기준 이하인 작품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작품은 마음에 들어도 연기할 아역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 어렸던 서준은 매력적인 어른 캐릭터들을 만나도 아쉬워하며 대본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때 아쉬워하며 덮었던 대본을 다시 펼쳐, 좋아하는 배역을 고를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그래도 보는 눈은 다 비슷해서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미 만들어졌지만.”
“괜찮아요. 아직 남아 있는 작품들도 있으니까요.”
“그래. 잘 찾아보면 서준이 네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나오겠지.”
당장에라도 자료실로 달려갈 것 같은 서준을 보며 안다호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 혼자 자료실을 정리하는 건 힘드니까, 사람을 쓰려고.”
“2팀이요?”
“2팀도 돕긴 할 건데…… 새로운 배우팀 직원들한테 맡겨볼까 해.”
오호.
서준이 눈을 빛냈다.
“직원 다 뽑았어요, 다호 형?”
“아니, 이제 면접 봐야지. 지금은 서류 심사 중이고. 여기 있는 게 직원 이력서야.”
안다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탑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런 서류 탑이 3개나 있었다.
“이건 매니저 지원자 서류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배우들 서류. 이쪽은 탈락, 이쪽은 보류, 이쪽은 통과야. 나중에 면접도 볼 생각이거든.”
안다호가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를 제일 왼쪽, 탈락 자리에 놓아두었다.
“매니저…….”
그 단어에 서준과 안다호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일이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안다호가 말을 이었다.
“배우팀이니까 작품 보는 눈은 있어야지. 수습기간 동안 자료실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보면 어떤 성격인지도 알 수 있을 테고. 네가 고른 작품들과 비슷하게 고르는 사람을 네 매니저 후보로 하면 어떨까 싶어.”
그렇게 고른 후보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친 후,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서준의 매니저로 보내주고 싶은 안다호였다.
“그건 다호 형한테 맡길게요. 아, 이거 선물요. 런던에서 샀어요.”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안다호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안다호가 빙그레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잘 포장된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어보니, 작은 상자 속 둥그런 회중시계가 들어있었다. 초승달 모양처럼 줄기와 꽃이 새겨져 있었다.
“회중시계야?”
“아뇨. 나침반이에요.”
“나침반?”
웃으며 말하는 서준에 안다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뚜껑을 열어보았다. 서준의 말대로 북쪽과 남쪽을 가리키는 바늘 하나가 빙글 돌고 있었다.
“다호 형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서 길을 잃지 않고 갔으면 해서 샀어요. 수제작이래요.”
나한테는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부디 다호 형에게는 힘껏 능력을 발휘해 줬으면 좋겠다.
“그 꽃은 겹작약이라는 꽃인데 영국에서는 옛날부터 수호 부적으로 쓰였대요.”
“고마워. 책상 위에 장식해 두면 좋을 것 같네.”
안다호는 나침반이 마음에 든 듯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의미도 좋아서,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길을 잃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에 서준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침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자료실 갈 거야?”
“아뇨. 가수팀 선물도 사 왔거든요. 블루문 멤버들 것도요. 회사에 있다니까 갖다 주려고요.”
기껏 쉬는 날, 숙소가 아니라 왜 회사에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 자료실 비밀번호는 알지? 대본 본다고 점심 거르지 말고.”
“네!”
회의실을 나온 서준은 가수팀으로 향했다.
신사옥 이전으로 가수팀 사무실은 무척 바빠 보였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사온 과자를 간식 테이블에 올려둔 서준은 곧바로 블루문이 있을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 문을 열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늘어져 있던 다섯이, 자습 시간에 만화책을 보다 걸린 학생처럼 파드득 몸을 떨며 일어났다.
“……뭐야. 이서준이었어…….”
박이든이 다시 바닥에 찰싹 달라붙었다.
“안녕. 서준아.”
“안녕하세요. 형들.”
블루문 멤버들이 서준을 반겼다.
“유럽 과자!”
……과자를 반긴 모양이다.
연습실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은 블루문 멤버들과 서준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닷가에서 열렸던 축제 무대가 엄청 신났다는 이야기에 서준이 물었다. 그때가 딱 [(선)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을 해제했을 때였다.
“뭐 달라진 건 없었어?”
“달라진 거? 전혀?”
“형들은요?”
“글쎄?”
우리 뭐가 달라졌던가?
하고 물음표만 잔뜩 띄우고 있는 블루문 멤버들을 보며 서준은 불과 10분 만에 차이를 알아차린 제이슨의 천재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블루문 멤버들이 능력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를 느끼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좋게 생각하면 능력을 썼을 때와 안 썼을 때의 실력이 비슷비슷하다는 거겠지.’
본인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실력이 늘었다는 거다.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있던 서준은 아쉬움을 삼키며 블루문 멤버들과 악수를 했다. 갑작스러운 악수에 의아해하는 블루문 멤버들 머리 위로 숫자가 나타났다.
‘언제 크려나…….’
브라운블랙 형들처럼 5년 정도?
아니, 1년 지났으니까 4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중급이 된 [(선)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이니 많은 도움이 될 테니, 멋진 아이돌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서준의 악수에 당황한 것도 잠시.
블루문 멤버들이 신나게 떠들어댔다.
“2팀장님 선물은 뭐 드렸어?”
“나침반. 이렇게 생긴 거야.”
서준이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은색 뚜껑에 새겨진 겹작약을 보던 정은성이 갑자기 오호,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수호 부적이라…… 영화 속에선 꼭 이런 거 있으면 총 맞던데 말이야.”
“아! 나도 알아! 꼭 총알이 여기 박혀서 ‘오! 부모님이 준 선물 덕분에 살았어!’라고 하던데!”
“그런 클리셰가 있긴 하지.”
“에이. 그건 영화잖아요. 재원이 형. 한국이라 총을 맞을 일도 없고요.”
블루문 멤버들의 말에 웃으며 말하던 서준이 잠시 멈칫했다.
‘잠깐만. 나 미국에서도 종종 촬영하는데……?’
매니저인 다호 형도 미국에 함께 따라오고.
설마…… 아니지?
서준이 사진 속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나침반 속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선) 황금 인어 파르비타의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괜스레 찜찜해졌다.
* * *
팔랑-
종이가 넘어갔다.
안다호는 진지한 얼굴로 배우의 서류를 살펴보았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1차 서류 심사를 통화한 배우에 대한 자료로, 사진과 이름, 나이 등 개인정보와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들에, 2팀이 조사한 작품 속에 연기 대한 평가와 스태프들 사이에서의 평가들이 추가된 것이었다.
“경력도 괜찮고 평가도 괜찮은데…….”
그러니 2차까지 올라왔을 거다.
그래도 코코아엔터의 배우를 대표하는 것이 서준인 만큼 배우 한 명이라도 함부로 계약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쩐다…….”
안다호가 어려운 일이라며 한숨을 내쉴 때, 테이블 한쪽에 놓아두었던 나침반의 바늘이 빙글빙글 돌다 멈추었다.
[(선)황금 인어 파르비타의 나침반이 방향을 가리킵니다.]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안다호는 들고 있던 배우의 자료를 탈락한 서류들 위에 올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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