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29화
…….
숨죽이고 있던 서준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방은 조용했다.
숙면 중인 지후의 숨소리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깥소리만 들렸다.
무언가 선택해야 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몸도 마음도 평소와 같았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눈만 굴리고 있던 서준이 푸하- 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숨까지 멈추고 있던 모양이었다.
서준이 나침반을 내려다보았다. 능력은 여전히 발동 중이었다. 서준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택지가 없어서 그런가?”
작품을 선택하는 중이었다면 뭔가 달랐을까?
서준은 휴대폰을 꺼내 안다호가 여행 중 읽으라며 보내준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음. 으음.
시놉시스들을 살펴보고 있던 서준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 변화는 없었다.
“아니면 조금 시간이 걸리는 건가?”
하긴.
한밤중이니 뭔가 일어나기도 힘들 터였다.
서준이 볼을 긁적이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그맣게 켜져 있던 조명을 끄고 침대로 향했다.
최상급이라서 어떤 대단한 능력을 보여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 * *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호텔에 짐을 맡기고 마지막으로 런던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서준과 아이들은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지자 짐을 챙겨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런던에 도착한 관광객들과 런던을 떠나는 관광객들로 히드로 국제공항은 북적북적했다.
그 관광객들 중 하나인 서준과 아이들도 수화물을 맡기고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비행기를 탄다고 한국에 있을 부모님들께 연락하는데, 서준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이슨 무어였다.
>제이슨 : 오늘 한국 가지?
<네. 지금 비행기 기다리고 있어요.
>제이슨 : 실황 녹화 작업 끝났다.
>제이슨 : 일주일 뒤에 플러스에 업로드될 거야.
오.
플러스라면 접근성이 좋았다.
물론 새싹들이라면 잘 모르는 외국 사이트에 업로드되어도 찾아 찾아 가서 회원가입을 하고 결제를 한 후 보겠지만 말이다.
서준은 곧바로 안다호에게 연락했다. 한국 시간이 오후 10시이기는 했지만, 아직 자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호 형.
>안다호 : 응?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답장이 바로 왔다.
<제이슨이 일주일 뒤에
<플러스에 연주회 실황 업로드한대요.
>안다호 : 알았어.
>안다호 : 사진은 지금 올릴래?
<네. 아직 비행기 시간 남아서 시간 많아요.
>안다호 : 그래ㅎ
>안다호 : 조심해서 와.
<네!
안다호에게 답장을 보낸 서준은 [새싹부터]에 들어가, 많은 게시판 중 서준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게시판 [to.새싹 / from.서준]에 들어갔다. 이곳은 서준이 새싹들에게 전하고 싶은 글이나 알려주고 싶은 것들을 쓰는 곳이었다.
서준의 생일 때마다 팬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올리는 곳이기도 했고, 저번 스페인 축구 관람 후 사진을 올린 곳이기도 했다.
다다다다-
열심히 휴대폰을 두드리며 글을 쓰던 서준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젤라토를 먹으며 기다리고 있던 지윤이 물었다.
“끝났어, 서준아?”
“응. 다 적었어.”
“그럼 이제 출국장으로 들어가자.”
지후의 말에 서준과 지윤, 미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 도착이더라?”
“오전 11시던데. 12시간 걸린대.”
“또 먹고 자고 먹고 자겠네.”
미나의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대학 졸업반인 송유정과 임예나는 며칠 후에 있을 한국사능력시험을 공부하기 위해 임예나의 집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삼별초.”
“고려 무신정권 때 만들어진 군대. 야별초에서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고 신의군까지 포함해서 삼별초로 바뀜. 몽골이랑 끝까지 싸움.”
“잘 알면서 왜 틀리는 거야?”
“지문으로 나오면 어려워…….”
으어어어-
송유정이 책상에 엎드렸다.
“시험지를 보면 알던 것도 까먹게 된다니까. 생각이 안 나. 생각이!”
“그러니까 몇 페이지 몇째 줄에 있었다, 하고 생각이 날 때까지 공부해야지. 자. 다음은 문화사. 이건 어느 시대 불상이야?”
한국사는 늘 만점이었던 임예나가 비슷비슷한 불상들의 사진을 송유정에게 들이밀었다.
“문화사가 제일 싫어…… 백제. 서산 마애 삼존불.”
“자. 다음은 이 그림.”
산을 그린 수묵화의 등장에 송유정이 눈을 데굴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예나야. 나 간식 사왔는데…… 그거 엄청 맛있어!”
“……그래. 좀 쉬었다 하자.”
시간도 벌써 10시가 넘었다. 아직 2시간은 더 공부할 생각이었으니 이쯤 간식을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송유정이 신이 나서 냉장고로 향하려고 할 때, 두 사람의 휴대폰이 울렸다.
익숙한 알림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빠르게 손을 뻗었다.
코코아엔터에서 올린 공지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서준이다!”
[to.새싹 / from.서준] 옆에 쓰여진 N(NEW)라는 글자에 임예나와 송유정이 반색하며 게시판에 들어갔다. 방금 올라온 따끈따끈한 새 글이 보였다.
[제목 : 안녕하세요. 그레이 바이니입니다.]
……응?
익숙하지만 왠지 여기서 보기에는 낯선 이름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눈을 끔벅였다.
<안녕하세요. 후원자 여러분. 바이올리니스트, 그레이 바이니입니다.
이번에 제가 우연히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와 협연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연주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장을 입고 바이올린을 든 G.B. 사진)
제가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제이슨 무어 씨의 연주회입니다. 사진도 찍었습니다!
(무대 위에 오르기 전 제이슨 무어와 G.B.가 함께 찍은 사진)
안타깝게도 너무 갑작스러운 참가라 여러분께 알리기도 전에 연주회가 끝났지만, 다행히도 실황 녹화분이 있어 일주일 뒤 플러스+에 업로드된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습하고 있는 사진)
저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제이슨 무어 씨도 함께 열심히 연습했기 때문에 굉장히 멋진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된다면 꼭 한 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무더운 여름, 후원자 여러분이 모두 건강히 보내시길 바라며,
여러분의 후원 덕분에 앞으로도 즐겁게 바이올린을 연주할 Gray Baini 올림>
* * *
“2주 전에 김종호 배우와 이지석 배우가 귀국했죠.”
평소처럼 영화 리뷰가 끝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영화객이 2주 전 귀국한 김종호와 이지석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 두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의 제목은 ONE으로 올해 11월에 개봉할 예정입니다. 두 배우 모두 차기작은 할리우드에서 오디션을 봤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합격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배우들을 보니 어쩌면 아카데미 상을 받는 두 번째 한국인 배우도 곧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그럼 엄청 좋겠다!
-올해 11월 개봉이면 원도 후보에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님?
-그렇긴 한데 이지석은 진짜 단역이고 김종호도 조연들 중 하나라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을 듯.
-다음 작품에서는 중요한 역할 맡기를!
-영화객 님! 이거! (링크)
영화객이 이어지는 설명도 없이 링크만 던지고 사라진 댓글을 발견했다.
-뭐야? 보이스피싱이야?ㅋㅋㅋ
-ㅋㅋㅋ들어가 봐요. 영화객 님ㅋㅋ
“이거 막 통장 털리고 그런 거 아니에요? 여러분. 이런 거 함부로 막 클릭하면 안 됩니다. 택배 문자도 안 되고 은행 문자도 안 되고 검찰청 문자도 안 돼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영화객에 시청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이미 텅장이라 들어가 보고 오겠음.
-오오. 용자다!
-저도 궁금해서 가 봅니다!
-근데 주소로 보면 카페 게시글인 듯.
-앞에 주소는 새싹부터인데?
링크 주소를 보던 영화객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네요? 게시글 새로 올라온 건가?”
영화 리뷰 중에는 급한 연락을 빼면 알림을 꺼놓는 영화객이 휴대폰을 들었다.
-오. 맞는 듯. 글 올라옴.
-서준이가 썼나 봐요!
-기사도 올라오기 시작했음ㅋㅋㅋ
-진짜 빠르다ㅋㅋ
휴대폰을 보던 영화객이 환한 얼굴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시청자들이 볼 수 있도록 모니터에 [새싹부터]를 띄웠다.
“새싹분들은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에게 설명드리자면 여기 이 게시판은 이서준 배우만 글을 올릴 수 있습니다. 물론 댓글은 새싹분들이면 모두 쓸 수 있습니다. 여기에 새 글이 올라왔는데 이게 참 재미있어요.”
영화객이 [to.새싹 / from.서준] 게시판으로 들어가 올라온 게시글을 보여주었다.
[제목 : 안녕하세요. 그레이 바이니입니다.]
-……갑자기 그레이 바이니요??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근데 이서준 유럽 여행 중 아님? 왜 갑자기??
-ㅋㅋ내용도 웃김ㅋㅋ
“네. 내용도 참 재미있어요.”
보고 온 시청자들처럼 영화객도 웃으며 게시글을 클릭했다. 모니터에 비치는 게시글을 읽던 시청자들이 빵 터졌다.
-ㅋㅋㅋ이게 뭐야ㅋㅋ
-이서준ㅋㅋ캐릭터에 너무 진심인 듯ㅋㅋㅋ
-영화 홍보 아니에요?
-22 영화 홍보인 것 같은데?
“영화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제이슨 무어는 실제로 살아계신 분이거든요. 아, 특별 출연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실제로 살아계신 분ㅋㅋㅋ
-ㅋㅋ알고 있었는데 순간 나도 착각함ㅋㅋ
-22 오버 더 레인보우 2 나오나 했다ㅋㅋ
“근데 플러스에 업로드된다고 하니, 영화보다는 기념 영상에 대한 홍보일 것 같습니다. 버스킹 때도 그랬지만 꼭 어디에 실제로 있을 것 같은 홍보 방법이네요. 크으. 여전히 후원자를 생각하는 그레이 바이니! 내일 오버 더 레인보우를 봐야겠습니다.”
-앞으로도 즐겁게 연주한대ㅠㅠㅠ
-나도 내일 영화 봐야겠다ㅠㅜ
“그럼 어떤 작품인지 알아볼까요? 먼저 오버 더 레인보우의 제작사, 웨일 스튜디오 홈페이지로 가 보겠습니다.”
-영어;;;
-영어다;;;
영화객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알아보았지만 나오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정도면 홍보 1도 안 할 생각인가?
-기사도 없음;; 완전 철통보안;;;
-나오는 건 제이슨 무어의 유럽 투어뿐ㅋㅋㅠㅠ
“그러게요. 제이슨 무어는 이주 전까지 유럽 투어를 했었네요. 연주회 평은 다 좋습니다. 그중에서도 파리에서 열렸던 공연들에 대한 칭찬이 대단하네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 정보에 지친 영화객이 잠시 쉬면서 파리 공연에 대한 기사들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번역해 주었다.
“특히 마지막 공연이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클래식 공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환호성도 터져 나왔다고 하고요. 아, 팸플릿이 있네요. 원래 연주하던 제 1바이올린의 한 연주자가 사고로 빠지게 되고, 파리에서 1회부터 3회까지는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바실리예프가, 4회에는 G.B.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참가……? ……G.B.?”
<……/ G.B. /……>
……어라?
누군가 올려놓은 팸플릿에 선명하게 나와 있는 그 이름에 영화객과 시청자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눈만 끔벅였다.
“……G.B.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또 있나요?”
-……있기야 있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여기 G.B.는 한 명뿐인 것 같은데요?
-22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33 제이슨 무어+연주회+G.B.면……;;;
“……이 연주회가 진짜 연주회였다고?! 촬영이 아니라?!”
-……세상에나……!
-아니ㅋㅋㅋ이게ㅋㅋㅋ무슨 소리야ㅋㅋㅋ
-영화나 기념 영상일 줄 알았는데 찐 연주회였어ㅋㅋㅋ
-22 그것도 실황 녹화ㅋㅋㅋ
-그럼 저 사진도ㅋㅋㅋ찐 연주회 전에 찍은 사진이라는 거네ㅋㅋ
-후기에 온갖 음악계 관계자들이 왔다던데ㅋㅋ 그 앞에서 연주를 했어ㅋㅋ 배우가ㅋㅋ
-그것도 제일 평이 좋은 공연임ㅋㅋㅋ
어이가 없어서 계속 웃음이 나오는 영화객과 시청자들이 천천히 진정해갔다.
그사이 영화객의 방송을 염탐하던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코코아엔터에 연락했고 대기하고 있던 코코아엔터 2팀이 그에 대응했다.
[배우 이서준, 바이올리니스트로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 참가!]
[세계 유명 음악가들에게 극찬받은 연주회의 오케스트라 제1 바이올린을 연주한 배우 이서준?]
[여전한 바이올린 실력! 이서준, 그레이 바이니로 무대에 오르다!]
[배우 이서준은 지금 유럽 여행 중? 프랑스 파리에서 연주회 참여!]
[그레이 바이니,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에 참여!]
-……찐으로?
=ㅇㅇ찐으로. 코코아엔터에 확인했대.
=팸플릿에도 G.B.라고 이름 뜸! 그레이 바이니!
-여기서 그레이 바이니가 나올 줄이야;;;
=22 이서준이 올린 글도 그레이 바이니 몰입 100%던데ㅋㅋㅋ
=마지막 기사도 완전 몰입ㅋㅋ
-미리 계획하고 간 건가?
=그건 아닐 듯. 사고로 연주자 한 명이 빠져서 대체자로 드미트리하고 G.B.가 들어갔다는 기사가 있더라.
=22 마침 유럽에 있어서 부를 수 있었던 듯.
-이서준이 그렇게 바이올린을 잘함?
=일반인치고는 잘하는 것 같던데…… 오케스트라 연주는 너무 간 것 같음.
=22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린 연주자 많음. 그냥 거기에 묻혀서 간 듯. 연기는 잘하잖아.
=‘세계 유명 음악가들’이 그것도 못 알아보겠냐.
=그러니까. 자기 이름 내건 연주회인데 제이슨 무어도 그렇게 허술하게 안 불렀겠지.
-……와씨. 나 저기 갔었는데.
=헐. 진짜?
=+)바이올린 전공자인데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음. 제이슨 무어 좋아해서 어렵게 티켓 구해서 갔음.
=+)연주 넋놓고 들음. 독주도 협연도 진짜 장난 아니어서, 엄청 대단한 프로들만 모았구나,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거기에 이서준이 있었다니;;; 본업이 배우인 연주자가 있었다니 기사를 봐도 믿기지가 않네ㅎㄷㄷ
=얼마나 잘했길래???
=+)벌써 2주가 지났는데 아직도 연주회 이야기뿐임. 클래식 관련 잡지나 기사도 그 이야기뿐이고 본 사람들은 감탄만 하고 못 본 사람들은 아쉬워하고 있음.
=+)내 친구는 내 멱살 잡더라. 왜 같이 안 갔냐고. 자기가 제이슨 무어 싫다고 했으면서…… 이제 실황녹화 영상이 나온다니 어느 정도 만족할 듯. 그래도 직접 보는 거 하고는 차이가 있겠지만.
=+)게다가 그때 연주회에 있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전부 유명 오케스트라들한테 제안받았다는 소문도 돌고 있음. G.B.만 못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그레이 바이니일 줄이야…… 이서준일 줄이야……!
=+)오! 여기도 기사 떴음. G.B. 찾던 사람들 충격 받겠네ㅋㅋㅋ
한국은 물론이고 파리에서 마지막 공연을 봤던 사람들이 G.B.의 정체에 놀라고 경악할 무렵,
“기내식은 비빔밥이랑 파스타가 있는데 뭐로 드릴까요?”
“비빔밥 주세요.”
폭풍의 핵인 서준은 느긋하게 기내식을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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