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26화
서준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연주자들의 머리 위에는 숫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준은 알림의 내용을 떠올렸다.
[연결자 중 하나가 자신의 의지로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에서 벗어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정령의 나무가 또 무슨 짓을 한 걸까, 아님 이것도 최상급 도서관의 문이 열리며 생긴 효과인 걸까.
‘그렇다기엔 저 ‘자신의 의지’가 마음에 걸리는데…….’
그러나 서준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제이슨 무어의 연주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능력의 효과로 음악 실력이 몇 배로 뛴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저도 모르게 생각을 멈추고 그 선율에 집중하게 될 정도로.
제이슨의 바이올린 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숨소리 하나도 섞이지 않게 연주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그 연주를 들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때가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주가 끝났다.
제이슨 무어가 무언가 깔끔히 해결된 듯 시원한 표정으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내려놓고 가볍게 숨을 내쉬자, 넋 놓고 듣고 있던 서준과 데릭 로츠, 연주자들이 반사적으로 짝짝짝 박수를 쳤다.
“제이슨. 어떻게 된 거예요. 조금 전 그건…… 도대체…….”
서준의 물음에 제이슨 무어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 슬럼프였거든.”
“……슬럼프요?”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연주자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자신들이 듣기에도, 관객들이 듣기에도 지금까지 제이슨 무어의 연주는 훌륭했었다. 도저히 슬럼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조금 이상한 슬럼프긴 했지. 실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지만 연주할 때마다 조금 답답하고 부족한 느낌이 들었거든.”
제이슨 무어가 두 손을 내려다보며 쥐었다 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몸에 새겨질 듯 느껴지면서 거기에 어울리는 바이올린 연주가 떠올랐다. 거기에 어울리도록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완벽한 곡이 흘러나왔다. 당사자인 자신마저 놀랄 정도로.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
답답함에 짜증이 났다.
손발이 꽁꽁 묶인 느낌이랄까. 내 연주지만 내 연주가 아닌 느낌. 그렇다고 실력이 나빠진 건 아니고 더 좋아진 상태라 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연습을 좀 했지.”
가볍게 말하는 제이슨 무어였지만, 사실은 아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습했다.
숙소에서는 자신의 예전 연주를 계속 듣고 지금의 연주와 다른 점을 생각했고, 연습실에서는 최대한 그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이슨 무어는 이 답답한 상황을 이겨낼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독주.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피하는 거지.’
더 이상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아니게 될 거다.
드미트리와 함께 오케스트라 활동을 했던 학생 시절에 그랬었다.
어렸을 때는 그 답답함을 못 이겨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무시하고 자신의 연주만을 우선시했지만, 이제는 꽤 자라지 않았나.
게다가 이 기묘한 슬럼프는 슬럼프치고 배울 점이 많았다.
뒤를 받쳐주는 반주로만 생각해왔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한 몸이 된 것처럼 느낄 수 있었고, 합주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이슨 무어는 연습했다.
“지금 느낌도 좋으니까, 최대한 이 합주의 느낌을 살리는 방향으로 말이야.”
완벽해 보이는 이 합주의 빈부분과 추가할 부분을 찾아서 자신의 느낌을 넣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제이슨 무어는 노력했고, 그 노력이 조금 전 결실을 보았다.
“슬럼프는 몇 번 겪어봐서 아는데, 빨리 해결하는 편이 낫거든. 뭐, 이번 건 보통의 슬럼프랑 다른 것 같지만.”
고민한 보람이 있었다.
묶여 있던 사슬에서 벗어난 듯, 쭉쭉 뻗어 나가는 소리들에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상쾌해 보이는 제이슨 무어의 표정에 드미트리 바실리예프가 작게 웃었다.
“하긴. 너치고는 얌전한 연주라고 생각하긴 했어.”
나이가 들어서 얌전해진 건가 했는데, 조금 전 연주 들어보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제1 바이올린이었으면서 지휘도 무시하고 자기 느낌 듬뿍 넣어서 연주하는 바람에 6개월밖에 못 다니고, 벤자민 교수님께도 엄청 혼났었는데. 지금은 오케스트라도 생각하고…… 많이 컸네. 제이슨.”
“도대체 언제적 이야길 하는 거야?”
투닥거리는 제이슨과 드미트리의 모습을 보며 연주자들이 탄성을 흘렸다.
“천재는 슬럼프일 때도 뭔가 다른가 봐.”
“그러게.”
서준이 멍하니 제이슨 무어를 바라보았다.
설마, [(선)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이 슬럼프 취급당할 줄이야. 정령의 나무가 알았다면 엉엉 울지 않았…….
‘아니, 엄청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떨 것 같은데…….’
여튼, 중하급이긴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능력에서 벗어나는 존재라니.
그게 가능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서준이었다.
‘제이슨도 정말 대단해.’
다른 사람이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이질적인 느낌을 잡아낸 민감함과 향상된 실력에 안주하지 않고 해결하려고 했던 끈질김, 그리고 그 슬럼프(?) 속에서 배울 점을 찾아내 끝내 모든 걸 손에 쥐어버린 제이슨 무어의 천재성에 감탄만 나왔다.
어쩐지 손이 간질간질해졌다.
능력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한 번만 더 연주해 보면 어떨까요? 제대로 듣고 싶어요!”
서준의 말에 다른 연주자들도 눈을 빛냈다.
그랬다. 조금 전 그 연주는 제이슨 무어의 독주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와의 합주였다. 중간에 손을 멈춰 버리는 바람에 완전한 곡을 연주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다.
“하긴 오늘 마지막 연습인데 너무 얼렁뚱땅 끝나버리긴 했죠. 다들 괜찮으시죠?”
들뜬 얼굴로 말하는 데릭 로츠의 말에 다들 동의하던 그때, 최유성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 녹음해도 될까요?”
그 질문에 다른 연주자들도 데릭 로츠와 제이슨 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슨 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음장비가 없어 연주자들은 아쉬운 대로 휴대폰을 사용했다.
그렇게 중단된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이슨 무어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턱을 괬다. 서준도, 드미트리도 각자의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활을 쥐었다. 첼로, 더블베이스, 플루트, 바순, 피아노 등 연주자들도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중앙에 서 있는 지휘자, 데릭 로츠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은 지휘자는 작게 숨을 내쉰 후,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힘차게 허공을 그었다.
[(선)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이 발동됩니다.]
더이상 제이슨 무어의 머리 위에는 아무런 숫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서준과 아이들이 숙소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자신들의 숙소는 내버려두고 이곳에 머물고 있는 찰리와 그레이스도 함께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내일 있을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
“알베르 교수님도 오실 수 있대.”
“오. 그래? 여기 초대권. 바로 옆자리라 다행이네.”
지후의 말에 서준이 들고 있던 초대권을 지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찰리와 찰리 아버지의 초대권과 그레이스와 그레이스의 언니 사라의 초대권도 나누어주었다.
“원래 초대권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거야?”
“찰리랑 아저씨는 숙소 구해준 답례로 미리 준비한 거야. 그레이스 네 자리는 원래 내 자리였고. 나머지 두 개는 단원분들이 주셨어.”
의아해하는 그레이스에 서준이 설명했다.
“기사 보니까 연주회 되게 좋았다던데! 엄청 기대된다!”
“나도 봤어. 다들 칭찬밖에 안 하더라.”
“다들 너무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하는 거 아닌가 걱정되기도 하던데…… 괜찮겠어?”
걱정스레 바라보는 친구들의 모습에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기대하고 와도 돼. 그래도 저절로 감탄이 나올걸.”
오오!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하나인 서준의 장담에 친구들이 눈을 반짝였다.
* * *
토요일 오전.
연주회 리허설 전 연습 시간.
어제 있었던 제이슨 무어의 연주 덕분인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집중도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머리 위 숫자로 보이고 있었다.
점점 상승하는 음악적 유대감.
기어코 하나둘 100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침착한 마음으로 보는 건 처음인데…….’
매번 무대 위에서 극적으로 상승했던 터라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자세히 본 적이 없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휘둘렀다.
제이슨 무어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오케스트라가 각자의 악기를 연주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선율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귀속으로 파고드는 강렬하고 잔잔하고 감미로운 음들이 연주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주에 지장을 줄 정도로 흥분하지는 않았다. 이미 어제 한 번 겪어봤던 연주였고, 녹음본을 들으며 밤새 되새겼던 선율이기도 했다.
‘천재인 제이슨 무어도 그렇게 노력하는데…….’
보통의 재능을 가진 자신들이 쉬엄쉬엄할 수는 없었다.
오늘이 바로 연주회라 무언가를 바꾸는 시도는 할 수 없었지만, 변화한 곡에 익숙해지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제이슨 무어의 연주가 들려왔다.
다시 들어도 멋진 솔로다.
최유성은 소름이 돋은 두 팔을 애써 무시하며 바이올린 연주에 집중했다.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며, 앞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지낼 때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100/100]
[모든 유대감이 최대치에 다다랐습니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의 등급이 중하급에서 중급으로 상승합니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중급-]
지휘자와 연결된 존재들의 유대감에 따라 음악 실력이 최대 4배까지 증감합니다.
지휘자와의 유대감과 연결자들의 유대감이 숫자로 표현됩니다.
최대 연결 : 15 (10/15)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급으로 상승한 덕분에 향상된 단원들의 실력은 놀라웠다.
제이슨 무어도, 데릭 로츠도, 연주자들 본인까지도 묘하게 달라진 선율을 알아차렸다.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지나, 하고 놀라기도 잠시 연주를 이어나가는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맴돌았다.
‘애들아. 엄청 기대하고 와도 될 것 같아.’
서준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바이올린 연주를 이어나갔다.
* * *
>지윤 : 우리 도착했어!
>미나 : 리허설 중이야?
<ㄴㄴ 리허설은 끝나고 옷 갈아입는 중이야.
>지후 : 공연 전엔 못 만나지?
<응. 사람이 많아서 힘들걸.
>지후 : 그럼 공연 끝나고 보자.
<ㅇㅇㅇㅇ
휴대폰을 내려놓은 서준이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여행에 정장을 가지고 올 이유가 없으니, 당연하게도 안다호가 한국에서 보내준 옷이었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는 서준에게 제이슨 무어가 다가왔다. 제이슨은 이미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촬영 준비 끝났대. 실황 녹화도 자주 하는 곳이라 크게 안 바꿔도 된다더라고.”
“잘됐네요! 이번 공연은 진짜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나도 이번 공연은 왠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긴 해.”
제이슨 무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드미트리도, 다른 연주자들도 꼭 녹화본을 얻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다들 이번 연주회에 대한 기대가 컸다.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실력에서 오는 당연한 기대였다.
“아마 내 인생에 손에 꼽히는 공연이 되지 않을까?”
“에이.”
검은색 자켓을 입고 옷매무새를 다잡는 서준이 웃었다.
“앞으로 더 멋진 연주를 들려줘야죠. 계속 바이올린을 연주할 거잖아요.”
서준의 말에 제이슨 무어가 피식 웃으며 서준의 머리를 헤집었다.
“……아직 세팅 전이라 가만히 있는 거예요. 제이슨.”
“알아. 그러니까 하는 거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제이슨 무어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 서준의 머리는 완전히 까치집이 되어버렸다.
* * *
파리음악당에서 제일 큰 제1연주홀의 관객석이 가득 찼다. 빈자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악장과 함께 온 독일 바이에른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가 편하게 자세를 잡아 앉았다.
“기사대로 대단할까요?”
“과장된 기사 한두 번 보나? 잘하기는 하겠지만, 화제가 될 것 같으니 띄워주는 거겠지.”
마에스트로의 말에 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어느 정도 과장되었다는 건 악장도 동의했다.
“쯧, 이미지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적만 늘었어.”
게다가 그런 기사들 때문에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고, 아예 평가를 내릴 심산으로 오늘 연주회에 온 관계자들도 많았다.
성격 나쁜 마에스트로들과 오케스트라 관계자들, 바이올리니스트들, 음악계 관계자들, 기자들. 하나같이 감상을 하러 온 게 아니라 평가를 하려고 온 표정들이라, 제이슨 무어가 실수라도 했다가는 아주 큰 일이 날 듯싶었다.
삐---
알림과 함께 관객들의 소리가 잦아들고 관객석이 어두워졌다.
무대의 커튼이 올랐다. 무대 위에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무대 옆에서 바이올린을 든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제이슨 무어였다.
꾸벅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에 기대감이 가득한 박수가 쏟아져 내렸다.
제이슨 무어의 뒤로 피아노를 연주할 피아니스트가 자리를 잡았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제이슨 무어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턱을 괬다. 왼손가락으로 네 개의 현을 짚고 오른손으로 기다란 활을 잡았다.
제이슨 무어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평가하기 위해 찾아온 마에스트로들과 음악 관계자들, 기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팔짱을 낀 모습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따단-.
피아노의 연주가 시작되고,
제이슨 무어가 기다렸다는 듯 활을 움직여 첫 음을 내리그었다.
!!
단 첫 음이었다.
그 내리그음 하나로 날카로웠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팔짱을 꼈던 두 팔이 사르르 풀어지고, 의자에 기댔던 상체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당겨졌다.
소리 없는 경악과 놀람으로 가득한 파리음악당 제1연주홀에는, 오직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리만이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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