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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523화 (52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23화

의아해하는 서준에 데릭 로츠가 쓰게 웃으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제 태도가 좋지 않았죠.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갑자기 배우가 바이올린 연주를 하겠다면 조금 믿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테스트도 없었구요.”

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데릭 로츠가 고개를 저었다.

“리의 실력은 알고 있었습니다. 영상만 봐도 짐작할 수 있죠. 직접 들으니 영상보다 더 잘하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서준과 드미트리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생겨났다.

“혼자서도 잘하니까요.”

데릭 로츠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오케스트라와 솔로는 다릅니다. 솔로로, 혼자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할 때는 마음껏 연주해도 되지만 오케스트라는 자신을 죽이고 다른 악기들에 맞춰야 하거든요.”

자기만의 해석이 가능해 온갖 감정과 기술을 넣을 수 있는 솔로와는 달리,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악기 중 하나가 된 것처럼 그 지휘를 보며 거기에 맞춰서 연주를 해야 했다. 악보에서, 지휘에서 단 1초도 어긋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게 생각보다 어려워서 자기주장이 강한 솔로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리죠.”

드미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슨이 옛날에 그랬지.”

“정말요?”

“나랑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같이 오케스트라 활동을 했거든. 제이슨은 딱딱 맞춰서 연주하는 걸 답답해하고 싫어하는 편이었어. 벤자민 교수님이 가르치는 방법도 최대한 제이슨의 개성을 살리는 쪽이라서 더 그랬지.”

그때를 떠올린 드미트리가 말을 이었다. 벤자민 교수의 의견을 따라 제이슨 무어는 계속 오케스트라 활동을 했지만, 그것도 겨우 6개월 정도였다.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야. 개성이 죽어버리면 솔로로 서기 힘들거든.”

드미트리의 말에 데릭 로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솔로와 오케스트라는 차이가 있었다.

“제가 봤던 영상들 속의 리는 벌써 자신만의 연주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자기주장이 넘치는 연주였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배우라서 그런 걸까. 서준 리는 연주마저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데릭 로츠는 그걸 고치기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리는 오케스트라와 연습했던 적도 없어서 그 스타일을 잠시 잊고 오케스트라에 맞는 연주법을 배우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 초조했습니다. 연습시간이 열흘도 채 안 된다고 해서 더욱더 말입니다.”

연주회 시간을 뺀다면 열흘보다 더 적었다.

서준의 실력을 알고 있어 느긋한 제이슨과 벤자민 교수과 달리 오케스트라를 책임진, 지휘자 데릭 로츠가 초조해하던 이유기도 했다.

지금 와서야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두 사람의 말도 변명처럼 들렸었다.

“하아, 이유가 뭐가 됐든 제 잘못입니다. 저희 교수님께서도 매번 먼저 판단 내리지 말라고 하시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데릭 로츠는 진심으로 서준에게 사과했다.

“이해해요. 저도 갑자기 다른 분야의 사람이 작품에 들어온다고 하면 신경이 쓰일 테니까요.”

아이돌이나 모델 같은.

게다가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열흘밖에 없다고 하면 서준도 조금 아찔해질 터였다. 그래도 서준이라면 먼저 연기를 보고 판단을 내리겠지만 말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준의 말에 데릭 로츠가 안도와 부끄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준 리는 이제 막 성인이 됐다고 들었는데, 자신의 나이가 부끄러워지는 어른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진심 어린 사과에 서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점심 드실래요?”

서준이 화해의 뜻으로 손을 내밀자, 데릭 로츠가 기쁘게 서준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을 사용합니다. (1/10)]

데릭 로츠의 머리 위에 새롭게 숫자가 나타났다.

와아.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47]

그사이 유대감이 엄청 올라 있었다.

* * *

데릭 로츠가 서준에게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에 제이슨 무어는 탐탁지 않았던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들어보면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고, 당사자인 서준이 괜찮다고 하니 더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점심 식사 이후,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었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협연인 만큼 제이슨도 연습에 참여했다.

제1 바이올린 자리에 앉은 서준은 연습을 이어나가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살폈다.

지휘자, 데릭 로츠와 제이슨 무어를 능력에 등록하면 남은 자리는 여덟.

39명의 연주자 중 누구를 넣으면 적당할까, 하고 생각하던 서준은 문득 홀로 서서 연주 중인 제이슨 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슨한테 이 능력이 어울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이슨 무어가 이 연주회의 중심인만큼 능력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협연인 데다가 몇 배로 음악 실력이 상승하는 만큼 더 멋진 연주를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능력에 등록해도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제이슨 실력도 늘 것 같고.’

한번 몇 배로 나아진 연주를 겪어보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차라리 연습하는 동안 번갈아 해볼까?’

능력을 쓰고 연습해 보고, 안 쓰고 연습해 보고.

그렇게 연습하다가 더 좋은 느낌을 찾으면 될 것 같았다.

* * *

다음 날도 오케스트라 연습이 이어졌다.

>지오 : 그거 이제 여행 아닌 듯.

<ㅋㅋㅋㅋㅋ

잠시 쉬는 시간, 박지오에게서 도착한 메시지에 서준이 작게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돌아다니는 단원들 중 여덟 명의 머리 위에 숫자가 반짝였다. 일단 이렇게 정해두고 차차 바꿔나갈 예정이었다.

연주회를 총괄하고 있는 팀장이 제이슨 무어에게로 향하는 모습이 서준의 눈에 들어왔다. 제이슨 무어의 머리 위에는 숫자가 없었는데, 오후 연습 때 능력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바실리예프 씨의 팸플릿은 제작 중입니다만…… 준 씨의 팸플릿은 어떻게 할까요?”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 팸플릿은 제이슨 무어의 이력과 연주회 프로그램 곡들에 대해 적혀 있었고,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의 이름도 올라가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교체된 상황이니만큼 그 이름도 바꿔야 했다.

드미트리 바실리예프의 이름이 들어간 팸플릿은 확정되자마자 제작하고 있었지만 서준 리가 참가할 마지막 공연의 팸플릿은 아직 제작 전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제이슨이 고민하고 있던 서준을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팸플릿에 네 이름을 넣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래? 서준 리, 그대로 넣어?”

서준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에 참여하는 서준 리라니.

동명이인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고 해도 제이슨 무어와 서준 리의 인연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설마 배우 서준 리……?’ 하고 한 번쯤은 생각할 터였다.

‘게다가 스페인에 있었다는 것도 알려졌으니까.’

스페인 바로 옆에 붙어있는 프랑스에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데, 팸플릿에 이름까지 뜨면 거의 대놓고 ‘저 여기 있어요’,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미 전석 매진이라 새싹들이 알아차려도 표를 구매할 수도 없고, 아마 관람할 관객들의 분위기도 어수선할 터였다.

“아뇨. 제이슨의 연주회인데 제가 화제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다호 형이랑 눈에 띄지 않기로 약속도 했구요.”

“그럼 이름 하나 생각해 봐. 팸플릿에 올려야 하니까.”

제이슨 무어의 말에 서준이 고민에 잠겼다.

당장 생각나는 이름은 나 진.

[한 걸음] 이후 활동 없이 시간이 꽤 지나서 일반인들은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서준의 팬이라면 똑똑히 기억하는 서준의 예명. 지금도 가끔 ‘나 진ㅠ 이제 활동 안 해?ㅠ’ 하는 농담 섞인 글들이 [새싹부터]에 올라오기도 했다.

‘알아보진 못하겠지만.’

제이슨 무어와 서준의 친분을 알고 있겠지만, 오케스트라에 참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터였다. 게다가 관객들 중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사람도 드물 터였다.

‘근데 나 진은 배우 예명인데…….’

갑자기 바이올린이라니…… 조금 찜찜했다.

부캐 키우기에 진심인 서준의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서준이 눈을 빛냈다.

“G.B.는 어때요?”

“G.B.?”

드미트리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과 달리, 제이슨은 금세 알아차렸다.

“그레이 바이니군.”

……오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스태프들, 드미트리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해졌다. 최유성과 나탈리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레이 바이니는 영화 캐릭터라서 영화사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준?”

함께 놀라운 표정을 짓던 데릭 로츠가 금세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제오늘 지내보니 데릭 로츠는 걱정이 많은 성격으로, 어딘가 아프면 바로 검색해서 시한부 병까지 다다라 끙끙 앓는 타입이었다.

“상업적인 사용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으음.”

이게 상업적인 사용인가?

물론 연습과 연주회에 참여하는 만큼 돈을 받을 예정이긴 했지만 G.B.라는 약자를 쓰고 겨우 이름 한 줄 써넣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일단 문의는 해볼게요.”

“그래. 확실한 게 좋지.”

제이슨 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까지 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총괄팀장이 서준에게 팸플릿 제작 마감 날짜를 알려주었고, 서준은 곧바로 안다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은 오후라서 금세 물어보겠다는 안다호의 답장이 왔다.

“그럼 다시 연습 시작해 봅시다.”

데릭 로츠의 말에 쉬고 있던 단원들과 서준, 제이슨 무어가 자신의 자리에 섰다.

[(선)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이 발동됩니다.]

지휘봉을 잡은 데릭 로츠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힘껏 움직였다.

* * *

점심 시간이 지나고 오후 연습 시간이 되었다.

연습에 들어가기 전 제이슨과 악수를 해야 했는데, 뺨치는 것보다야 덜하지만 악수하는 것도 되게 뻘쭘했다. 서준은 그냥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제이슨. 손 좀 보여주세요.”

떠들썩한 주변, 서준이 제이슨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손?”

제이슨 무어가 의아한 얼굴로 두 손을 내밀었다. 서준이 제이슨의 오른손을 악수하듯 잡고 흔들었다. 제이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인사를 안 한 것 같아서요. 오후 연습 잘 부탁해요.”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을 사용합니다(10/10)]

자신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제이슨 무어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서준이 자리에 앉았다. 민망하다.

‘……내일부턴 오전 연습 때 써야겠다.’

아침 인사를 하듯 악수를 하면, 덜 민망하겠지.

제이슨과의 대화가 들린 듯 옆자리에 앉은 드미트리의 얼떨떨한 시선에 서준은 애꿎은 바이올린만 매만졌다.

잠시 후, 연습을 준비하는 듯 제이슨의 시선과 드미트리의 시선이 사라졌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서준이 고개를 돌려 제이슨 무어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83 / 48]

오.

지휘자와의, 그러니까 자신과의 유대감이 엄청 높았고, 연결자들과의, 그러니까 단원들과 데릭 로츠와의 유대감도 괜찮았다.

‘몇 배 정도 오르려나?’

오전 연습과 비교해 보면 확실하게 차이점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오후 첫 연습이 시작되었다.

연습은 연주회의 순서 그대로 진행되었다.

처음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잦아질 때, 제이슨 무어가 홀로 화려한 연주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때때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그렇게 10분.

아직 연주할 부분이 남아 있을 때, 제이슨 무어의 활이 멈추었다. 솔로로 연주하는 부분이라, 연습실을 홀로 울리던 바이올린 소리가 멈추자 모두 의아한 얼굴로 제이슨 무어를 바라보았다. 지휘자 데릭 로츠가 제이슨 무어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제이슨?”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한 제이슨 무어가 음을 맞추듯 바이올린을 다시 켜보기 시작했다.

……이야.

서준은 무언가 이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제이슨 무어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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