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22화
“팬입니다! 준!”
“저도요! 응원봉도 있어요!”
“오버 더 레인보우가 제 인생 영화예요!”
조용하던 연습실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가장 격정적이었고, 영화를 좋아하는 연주자들은 눈을 반짝였다. 서준 리의 팬은 아니지만, 그 작품을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연주자들과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연주자들도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제이슨 무어가 불러온 바이올리니스트가 할리우드 배우라니.
상상도 못 했다.
“조금 전 이야기한 대로, 준이 우리와 함께 마지막 공연에 참가할 겁니다. 그전까지 모두 비밀유지 부탁합니다.”
“네!”
제이슨 무어의 말에 단원들의 흔쾌한 대답이 들려왔다.
“나 배우 만나는 거 처음이야.”
“나도. 우리나라 배우도 안 만나봤는데 할리우드 배우라니…….”
“근데 진짜 많이 컸네. 오버 더 레인보우에 나온 모습만 생각하다가 이렇게 보니까 느낌이 달라.”
“그 영화 나온 지도 벌써 8년이 지났잖아요.”
“전 한눈에 알아봤어요! 생존자들 좋아하거든요.”
“……설마 감독판?”
동지를 찾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연주자를 슬그머니 피하는 연주자들의 모습에 서준이 작게 웃었다.
제이슨 무어가 연주자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었다.
서준은 바이올린 파트부터 비올라, 첼로, 오보에,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의 연주자들과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만, 만나서 반가워요. 이서준 배우.”
“한국분이시구나! 저도 반가워요.”
한국에서도 못 봤던 슈퍼스타를 머나먼 프랑스 파리에서 만날 줄이야!
한국인 첼리스트가 서준과 악수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중에 사진도 찍어야지!
“잘 부탁합니다. 이서준 바이올리니스트.”
“저도 잘 부탁…… 어!”
한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있던 또 다른 한국인이 웃으며 손을 내밀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서준의 반응에 상대방도 놀라며 내밀었던 손을 주춤 떨었다. 단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배우라고 말해야 했나 하고 걱정할 때, 서준이 무척이나 반갑다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우리 오버 더 레인보우 버스킹 때 만났었죠? 저한테 바이올린 가르쳐 주신 분! 그러고 보니 옆에 계신 분은 그때 바이올린 빌려주셨던 분이셨네요!”
최유성과 그 옆에 있던 나탈리가 입을 쩌억 벌렸다.
자신들만의 추억인 줄 알았는데…… 이서준 배우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 기억하고 계셨네요?”
“당연하죠! 그때 정말 감동했거든요!”
오히려 최유성과 나탈리가 지금 감동하고 있었다. 마치 그때 그 꼬마가 훌쩍 자라서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준이 정말로 기쁜 듯 최유성과 나탈리의 손을 꼬옥 잡고 흔들었다.
“나중에 더 이야기해요, 우리!”
인사를 나누고 제이슨이 서준을 데려가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단원들이 최유성과 나탈리를 붙잡고 무슨 이야기냐며 물어댔다. 최유성과 나탈리가 아하하하 웃었다.
“이쪽은 준 너랑 같은 파트를 연주할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바실리예프.”
앞으로 남은 4회 공연 중 앞의 3회 공연을 맡게 된 제이슨 무어의 친구였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해서 프랑스인일 줄 알았는데 러시아인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서준이 손을 내밀었다. 설원의 곰도 잡을 것 같은 두꺼운 손이 서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갑습니다. 바실리예프 씨.”
“드미트리로 괜찮습니다.”
“저도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때, 벤자민 교수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준이 반가운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벤자민 교수의 옆에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왔구나. 준. 인사는 했니?”
“네. 교수님.”
“그럼 데릭를 소개해 주마. 우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란다.”
……지휘자라는 말에 서준이 움찔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지휘자를 만나는 건 처음이네.’
오케스트라 공연을 몇 번 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기분 좋게 만나도 조금 찜찜할 텐데, 데릭 로츠라고 소개한 이 남자의 얼굴이 못마땅한 듯 굳어 있어서 PTSD가 생길 것만 같았다.
‘이거 능력을 써도 되는 건가?’
사용하자마자 유대감이 깎여서 마이너스가 되는 건 아니겠지?
정령의 나무가 인간이었다면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고 쓰러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서준은 잠시 입을 꾸욱 다물었다.
으음. 아주 잠깐 혹했다.
서준이 정신을 차리고 데릭 루츠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을 사용했다.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이 10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연습하면서 단원들을 살펴볼 예정이었지만, 오케스트라의 중심이 되는 지휘자는 꼭 포함돼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건이 변해서 다행이야.’
능력이 중하급으로 상승하면서 뺨을 쳐야 했던 조건에서 악수를 하는 조건으로 바뀐 덕분에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을 사용합니다. (1/10)]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중하급-]
지휘자와 연결된 존재들의 유대감에 따라 음악 실력이 최대 3배까지 증감합니다.
지휘자와의 유대감과 연결자들의 유대감이 숫자로 표현됩니다.
최대 연결 : 10 (1/10)
데릭 루츠 머리 위에 숫자가 생겨났다.
[8]
현재 연결되어 있는 것은 능력의 지휘자인 서준과 연결자인 데릭 루츠뿐이라서 숫자가 하나밖에 뜨지 않았다.
‘낮네.’
처음 만나도 10은 되는데 말이다.
아마도 배우인 자신이 갑자기 오케스트라에 들어와서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뭐 유대감을 쌓아나가면 되니까, 하고 생각하며 서준이 고개를 끄덕일 때.
[7]
……진짜 못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낮아진 유대감에 어디선가 ‘빨리! 능력을! 해제해애!!’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정령의 나무의 집념이 아닐까.
조금 통쾌하면서도 머리가 아파지는 서준이었다.
* * *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을 해제합니다.]
서준은 일단 능력을 해제했다.
물론 지휘봉의 정령만큼의 어마어마한 악의가 아니라면 유대감이 땅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가지는 않을 터였다.
‘그저…….’
또 숫자가 내려가면 충격을 받아 헛손질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서준이 제이슨 무어에게서 바이올린을 들고 제1 바이올린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는 드미트리 바실리예프가 자리를 잡았다.
제이슨 무어와 벤자민 모튼 교수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지휘자, 데릭 로츠가 평소보다 굳은 얼굴로 준비하고 있는 단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오케스트라만 연주해 보겠습니다. 새로 두 분이 오셨으니 간단한 곡부터 연습해 보죠. 지금까지처럼 연주는 실수가 나올 때까지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집중하십시오.”
‘실수’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데릭 로츠의 시선이 서준에게 유난히 오래 남은 것은 기분 탓이 아닐 터였다. 제이슨 무어도 그걸 눈치챘다.
“……저……!”
“괜찮단다.”
쌍욕을 하려던 제이슨을 말린 벤자민 교수가 친구의 제자, 데릭 로츠(제이슨의 친구는 아니다)와 자신의 제자(?) 준의 시선이 마주치는 걸 보며 빙그레 웃었다. 여러 말보다 한 번의 연주가 더 와닿을 때가 있는 법이다.
서준도 데릭 로츠의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그러려니 하고 악보 제일 앞장을 펼쳤다. 미덥지 못하다면, 실력을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연습곡은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
익숙한 곡이지만 그래서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연습실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드미트리 바실리예프와 서준 리가 참여하는 첫 연습이었다.
아주 잠깐의 침묵 후.
데릭 로츠가 기다란 지휘봉을 가볍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악기들이 제각기 소리를 냈다.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불러도 될 것 같은 단순한 음을 이어 화려한 변주가 이어졌다.
연습실을 가득 채우는 선율이 아름다웠다.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가 미소를 지었다. 까다로운 귀를 가진 데릭 로츠가 듣기에도 지적할 곳이 없었다. 바로 무대 위에 올려도 될 만한 퀄리티였다.
그게 이상했다.
이 자리에는 오늘 새로 들어온 연주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존에 있던 단원들이야 몇 달이나 소리를 맞추고 박자를 맞춰서 연습했기 때문에 잘하는 것을 이해했다. 드미트리 바실리예프도 예전에 오케스트라 단원이었고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배우는 아니잖아…….’
단원들과 지휘자의 시선이 제1 바이올린 자리에 앉아 있는 서준 리에게로 향했다. 연주가 이어질수록 그 시선이 강렬해졌다.
본업이 배우인 서준 리는 바이올린 연주 도중 익숙하게 악보를 넘기고, 작은 별 변주곡이 끝나고 다음 연습곡으로 넘어가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지휘자가 휘두르는 지휘봉에 맞춰 활을 움직이고 튀지 않았다.
그래.
결코 튀지 않았다.
여섯 대의 바이올린이 제1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로 합쳐진 듯, 들려오는 선율은 단 하나였다. 소리만 듣고 있으면 바이올린 하나가 연주하는 듯했다. 그 소리 중 하나가 오늘 처음 함께 연주하는 배우의 연주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경악과 놀람 속에서 숨 막히는 합주가 이어졌다.
이런 연습은 처음일 서준 리가 가장 먼저 실수할 거라고 생각하고 첫 연습은 금방 끝나겠거니, 하고 조금 풀어져 있던 단원들이 바짝 긴장했다. 똑같은 생각을 했던 데릭 로츠도 실수 없이 계속되는 합주에 지휘봉을 꽉 쥐었다.
제이슨 무어가 피식 웃었다.
배우에게 지고 싶지 않은 연주자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지만, 바이올린을 든 준은 배우가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드미트리의 시선이 흘긋 서준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서준 리는 눈을 마주치고 웃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제이슨이 함께 연주를 하고 싶어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휘대에선 데릭 로츠는 제 이른 판단의 잘못을 절절히 깨달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들려오는 수준급의 바이올린 연주는, 분명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귀와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연주자는 서준 리였다.
데릭 로츠는 조금 전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각자의 생각들이 오고 가는 사이에도 서준은 여전히 연주에만 집중하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는 모습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
역시 아깝다.
제이슨 무어와 벤자민 교수가 동시에 생각했다.
-!
그때, 실수가 나왔다.
바이올린이었다.
그러나, 서준 리는 아니었다.
데릭 로츠의 지휘봉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단원들도 차례차례 자신의 악기를 내려놓았다. 정적 속 막혔던 숨을 뱉어내고 들이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겨우 연습만 했는데도 무대에서 공연을 한 것처럼 지쳐 버렸다.
“물 드실 분?”
40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다양한 악기가 함께하는 합주가 재미있었던 서준만이 생기가 넘쳐 흘렀다.
* * *
연습이 끝나고 점심시간.
오늘따라 집중하느라 체력을 많이 쓴 단원들이 흐느적흐느적거리며 밥을 먹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서준은 [오버 더 레인보우]의 팬이라는 드미트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연주회에 대해 의논한다고 잠시 나간 제이슨과 벤자민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먼저 나갔다고 생각한 데릭 로츠가 서준에게 다가왔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네?”
갑자기요?
데릭 로츠의 사과에 서준이 눈을 끔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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