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21화
제이슨 무어를 따라가던 서준이 건물 입구에 서 있는 벤자민 교수를 발견했다. 서준의 표정이 밝아지자, 벤자민 교수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준.”
종이가방을 내려놓은 서준이 웃으며 벤자민 교수를 껴안았다.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서준의 등을 토닥거렸다.
“교수님도요. 건강히 잘 지내셨죠?”
“나야 언제나 건강하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준과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근데 제이슨. 아까 한 말 진짜예요? 저 추천했다는 거요.”
“반쯤?”
추천한 거면 추천한 거지, 반쯤은 무슨 뜻일까?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벤자민 교수가 작게 웃었고 제이슨 무어가 말을 이었다.
“우리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 바이올리니스트 한 명이 빠지게 됐거든. 아내와 아들이 미국에서 지내는데 어제 사고가 나서 말이야.”
아…….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분들은 괜찮으시대요?”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대. 그래도 어느 정도 붙어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다행이네요.”
서준의 말에 제이슨 무어와 벤자민 교수도 동의했다.
“그래서 바이올리니스트 한 명을 보충해야 했는데, 딱 준 네가 파리에 있던 거지. 네 실력이야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적당하다고 생각했고.”
“진짜로 제가 하라고요?”
진짜로? 제가요?
얼떨떨한 서준의 표정에 제이슨 무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고 싶으면.”
“네?”
“준 네가 하고 싶으면 해줬으면 한다고. 파리 연주회가 4번 있다는 건 알지?”
“네.”
그중 마지막 연주회를 친구들과 보러 가기로 했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벤자민 교수가 이어 말했다.
“그중에 3번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가 맡을 거란다. 유럽에는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많거든.”
흔쾌히 좋은 바이올리니스트를 소개해 줄 명망 높은 음악가들도 많이 있었다.
그렇게 알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들과 추천받은 바이올리니스트 중에서 시간이 되고 괜찮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연락하고 확답을 받은 제이슨 무어가 말했다.
“네가 해줬으면 하는 건 마지막 공연이야. 그러면 연습시간도 충분할 테니까.”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30분 정도.
서준이라면 열흘 정도의 시간으로도 충분할 거다.
“으음.”
서준이 생각에 잠긴 듯하자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거절해도 괜찮단다. 새로 계약한 바이올리니스트한테도 충분히 설명해 놨으니까. 함께 연주하고 싶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는데 스케줄 때문에 안 될 수도 있다고, 그렇게 되면 마지막 공연까지 잘 부탁한다고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요?”
너무 이쪽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새로 계약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제이슨의 친구거든. 오히려 제이슨이 함께 연주하고 싶어 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누군지 궁금해하고 있단다.”
오호.
벤자민 교수의 말에 서준이 제이슨 무어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눈빛은.”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달리, 마치 ‘제이슨도 친구가 있었네요.’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서준의 모습에 머리를 쓸어 올린 제이슨 무어가 입을 열었다.
“하여튼, 넌 회사에도 말해야 하고 여행 일정도 있으니까 잘 생각해 보고 내일 아침까지 연락해 줘.”
“네. 그럴게요.”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벤자민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연주회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준은 파리 음악당에 처음 오지?”
“네.”
“그럼 잠깐만 구경할까?”
“아, 저 쿠키 사 왔는데 이것만 정리해 놓고 가요, 교수님. 제이슨. 쿠키 놔둘 곳 있어요?”
“연습실에 놔두면 될 것 같은데…… 우리가 사용할 연습실은 여기야.”
연습실 구석, 정수기와 나란히 놓여 있는 간이테이블에 쿠키 상자를 진열해 놓은 서준은 커다란 연습실을 한번 둘러보고 파리 음악당을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그날 저녁.
연주회에 참가할까 말까 고민하는 서준의 모습에 아이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괜찮을 것 같은데. 너 버스킹도 잠깐 생각했었다며?”
“지오한테 들었어?”
“어. 버스킹은 곤란할 수도 있으니까 공연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물론 네가 하고 싶다면.”
지후의 말에 지윤과 미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야 괜찮다고 했지만, 자신들만 즐겁게 지내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하루 종일 연습하는 건 아니지? 그럼 오전 오후에는 연습하고 저녁에는 연극이나 뮤지컬을 봐도 되잖아.”
“맞아.”
서준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리 준이 바이올린 연주하는 거 듣는 건…… 처음 아니야?”
“직접 연주하는 건 그런 것 같아.”
한국, 미국, 프랑스.
살고 있는 나라가 다 다르니 오랜만에 만날 때면 열심히 노는 터라, 느긋하게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시간은 없었다. 찰리와 그레이스가 한번 들어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긴 우리도 무대에서 연주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지?”
“영화로는 봤지만.”
그러고 보니 그랬다.
서준이 무대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을 때는 중,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던 소꿉친구들은 본 적이 없었다.
“오케스트라 바이올린이라서 그렇게 눈에 안 띌 텐데…….”
“그래도 보고 싶긴 해…… 아,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야.”
미나의 말에 아이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덧붙였다가는 강요가 될 것 같아,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데굴데굴 눈만 굴렸다.
서준이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빙그레 웃었다.
제이슨과 벤자민 교수이 보여줬던 넓은 연주 홀의 모습에 반쯤 넘어갔는데 친구들의 의견을 들으니 마음속 저울의 추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그럼 해볼까.”
오!
서준의 말에 아이들이 반색하며 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 * *
코코아엔터 이서준 배우 전담 2팀 사무실.
담당하던 배우가 훌쩍 유럽 여행을 떠나버려 할 일이 줄 것 같았던 2팀은 새로운 사옥 이전과 조직개편 때문에 여전히 바쁜 상태였다.
2팀장, 안다호는 배우팀이 사용할 사무실과 연습실의 리모델링 이미지들과 연습실에서 쓸 카메라 모델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사무실은 직원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니만큼 2팀 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고려했고, 배우들의 연습실은 서준의 연습실을 기준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카메라는 저가도 몇 개 마련해 둘까…….”
아무래도 서준의 연습실에서 사용하는 카메라들은 감독들의 추천을 받고 구매한 것이니만큼 가격도 비싸고 다루기도 어려웠다. 신인 배우들이 집에서도 편하게 쓸 수 있으려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가격대의 카메라도 준비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던 와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서준이었다.
“어, 서준아.”
-다호 형, 바빠요?
“아니, 괜찮아.”
안다호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책상 위 파리 시각으로 맞춰놓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서준이 떠나자마자 준비해 놓은 시계였다.
“무슨 일이야? 거기 지금 새벽 아니야?”
오후 2시인 한국과 달리 파리는 지금 새벽 7시였다.
-아, 맞아요. 오늘 조금 일찍 일어났어요.
들뜬 듯한 서준의 목소리가 무언가 즐거워 보였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안다호가 마우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파리행 비행기를 검색했다.
‘가장 빠른 비행기가…….’
[지금 우리는/바다에 있다] 다큐멘터리로 얼렁뚱땅 미국에 간 적이 있는 매니저로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무슨 일 있어?”
-그게요. 다호 형. 제이슨이랑 만났는데요.
서준이 제이슨 무어와 만났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우스를 움직이며 파리행 비행기를 검색하고 예약하려던 안다호의 손이 천천히 멈추었다.
“으음. 그럼 어디 방송에 출연하는 건 아니고?”
-네. 그냥 오케스트라 바이올린만 연주할 거예요. 모자는 못 쓰겠지만,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저 말고도 있으니까 섞여 앉으면 알아보기도 힘들 테고요.
“다들 제이슨 씨만 볼 테고 마지막 공연에만 나오니 서준이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도 예상도 못 할 테고 말이야.”
-네. 맞아요.
거기다 아무래도 클래식 연주회는 듣는 관객들은 관심 있는 분야가 다를 확률이 높아서, 아예 서준 리라는 배우에게 관심이 없을 수도 있었다.
“괜찮을 것 같은데?”
-그쵸?
웃음기가 섞인 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해도 되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생각이었어?”
-하하. 아뇨. 할 거예요.
안다호가 웃으며 말하자 서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 *
새벽의 파리는 조용했다.
휴대폰 건너에서 다호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녹화는 안 하지? 아쉽네. 못 봐서.
그러고 보면 다호 형도 서준이 무대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은 [오버 더 레인보우] 이후 보지 못했다.
‘졸업식 때 못 왔으니까.’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다들 생각보다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으음. 제이슨한테 녹화되냐고 물어볼게요.”
-그래. 그럼 몸조심하고 여행 잘하고 와. 들킬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하고. 새벽도 괜찮으니까.
“네. 알았어요.”
파란 하늘을 보던 서준이 아, 하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몸에 새겨진 문양 중 하나에 선기를 흘려보내자 눈앞에 알림창이 하나 떴다.
“다호 형.”
-응?
서준이 먼저 전화를 끊기를 기다리고 있던 안다호가 대답했다.
“블루문 요새 스케줄 어때요?”
-블루문?
갑자기 웬 블루문?
의아함이 담긴 안다호의 되물음과 함께, 그러면서도 자신의 배우가 궁금해하니 찾는 듯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 축제가 한창이라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네.
“앨범 준비는요?”
-회사 이전도 해야 해서 바쁘니까, 아마 9월부터 본격적으로 할 것 같아.
9월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다호 형.”
-무슨 일인데 그래?
“그냥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요.”
-진짜 블루문 멤버라도 된 것 같네. 아이돌로 전향하는 건 아니지?
“에이. 아니에요, 형.”
웃음기 가득한 대화를 끝으로 전화를 끊은 서준이 앞을 바라보았다.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중하급-]
지휘자와 연결된 존재들의 유대감에 따라 음악 실력이 최대 3배까지 증감합니다.
지휘자와의 유대감과 연결자들의 유대감이 숫자로 표현됩니다.
최대 연결 : 10 (5/10)
오늘따라 반짝이는 것 같은 불투명한 알림창에 미소가 가득하던 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떨떠름해졌다. 서준이 팔짱을 끼고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대충 예상이 돼.”
보통의 연주회라면 몰라도 무려 오케스트라의 공연이었다. 또 정령의 나무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등급을 올릴 터였다.
‘안 써도 되겠지만…….’
하지만 언제 또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능력의 등급이 높아서 나쁠 일은 없으니, 서준은 그냥 사용하기로 했다. 또 제이슨의 연주회를 더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블루문은 조금 힘들겠지.’
서준이 능력을 해제하고 나면, 블루문은 서준이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능력을 사용할 때까지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의 도움 없이 무대 위에 서야 할 터였다.
어쩌면 갑자기 하락한 실력에 슬럼프가 올 수도 있었지만, 서준은 블루문을 믿었다.
‘데뷔 때도 능력 없이 성공적으로 1년을 보냈으니까.’
블루문은 능력 없이 1년, 그리고 능력과 함께 1년을 보냈고 이제 또 능력 없이 무대 위에 설 터였다.
‘그 차이를 깨달으면 분명 브라운블랙 형들처럼 오케스트라라는 한계를 벗어나 한 명 한 명 빛나겠지.’
언제나 열심히 연습하던 형들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 * *
아침을 먹은 서준은 곧바로 제이슨 무어에게 연락했다. 오케스트라에 참여하고 싶다는 서준의 답장에 제이슨 무어는 어제 만났던 파리 음악당의 연습실로 오라고 했다.
“서준아. 연습 잘하고 와.”
“너희도 오늘 재미있게 보내.”
오늘부터 열리는 전 세계 출판사 부스에 갈 생각에 들뜬 지윤과 모형이지만 신경외과 수술을 보게 될 지후, 새로 배울 요리에 기대한 미나까지 모두 숙소를 떠나고 서준도 파리 음악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어제처럼 마중 나온 제이슨 무어는 서준을 데리고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의 문은 열려 있었는데, 연습실 안은 악보대와 의자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숫자만큼 악기를 든 연주자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40명의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하더니 커다란 악기들 때문인지 더 많아 보였다.
똑똑-
제이슨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연주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제이슨의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새로운 연주자인가 보다.
생각보다 어린 외모에 놀라는 연주자들 사이로, 그와 다른 의미로 경악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과 몇몇 연주자들이 보였다. 그 이외에도 군데군데에서 ‘어디서 봤는데……’라는 감상이 튀어나왔다.
“이쪽이 마지막 공연에서 함께 연주할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실력은 저와 스승님이 보증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이슨 무어가 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서준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서준 리입니다. 연주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
배우라고 할까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생략해 버린 서준 리의 소개에, 그제서야 알아차린 사람들과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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