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520화 (520/1,055)

0살부터 슈퍼스타 520화

같은 날.

영국, 런던.

“점심 식사 끝나시면 모두 짐 챙겨서 출발 시각까지 모여주세요!”

스케줄 담당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메뉴를 고르자 금세 따뜻한 음식이 나왔다.

“이제 마지막 연주회네.”

“그러게요. 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끝날 때 되니까 짧았던 것 같아요.”

“아, 독일 연주회에 온 마에스트로 기억나?”

“모튼 교수님과 친하시다던 마에스트로요? 기억나죠!”

이들은 바이올리니스트 제이슨 무어의 팀으로, 영국에서의 연주회를 마치고 마지막 연주회 장소인 프랑스 파리로 향할 예정이었다.

바이올린 독주회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만이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는 1부 독주회와 2부 오케스트라 협연을 함께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연주자들은 이번 연주회를 위해 모은 임시 오케스트라 단원들.

하지만 임시라고 해서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실력 있는 연주자들을 모집했고 사전 연습도 충분히 했다.

연주자들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에 찾아올, 오케스트라 관계자나 마에스트로 등의 중요 관객들에게 눈도장 한 번 찍히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면 그 인연으로 새로운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픈 곳 있으시면 바로 스태프에게 말씀해 주세요!”

사람이 많으니 연주회를 돕는 스태프들도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출발 전에 악기도 꼭 확인해 주시고요!”

바이올린처럼 기내에 들고 갈 수 있는 악기는 괜찮았지만, 첼로나 콘트라베이스처럼 크기가 큰 악기는 취급을 주의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영국 항공사 중 하나가 음악인들이 피해야 하는 제1위 항공사로 뽑힌 것 같더라. 위탁 수화물로 보낸 첼로 가방을 열어보니 조각조각 부서진 첼로가 나왔다던데…….”

괴담 뺨치는 이야기에 연주자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팔에 소름이 돋은 것 같았다.

“다행이네. 우린 아예 좌석을 빌려서…….”

위탁 수화물로 보내는 것 말고도 또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악기를 보관할 좌석을 하나 더 구매하는 것이었다.

사람 대신 악기가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악기의 가격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터였다. 이 정도급의 연주자들쯤 되면 악기는 거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가격이니까 말이다.

“항공사마다 규정이 달라서 복잡해.”

“그러게 말이야. 예전에 일본 항공사를 이용할 뻔했는데, 첼로 하나에 티켓 3장을 사라고 하더라.”

“3장이나요?”

놀라는 연주자들의 모습에 첼리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첼로를 눕혀서 측정한 거래. 그래서 그냥 다른 항공사로 이동했지, 뭐.”

“지금도 그렇대요?”

“항의가 많았던 모양인지 바뀌긴 했다더라.”

콩쿠르나 공연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녔던 연주자들이 많으니 각자 이용했던 항공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먼저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갔던 바이올리니스트 하나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뛰쳐나왔다. 그를 발견한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의아한 얼굴로 불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바이올린이라도 없어졌어?”

근처에 있던 호텔 직원들이 바짝 긴장했다.

“제, 제이슨 씨 어디 있는지 알아?”

“제이슨 씨라면 벤자민 교수님과 점심을 드시고 계실 텐데…….”

한 연주자가 알려주는 위치에 바이올리니스트가 얼른 발을 옮겼다. 사색이 된 얼굴이며 불안한 눈동자와 거친 호흡, 덜덜 떨리는 두 손까지.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친한 연주자들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조금 떨어진 창가 쪽 테이블에 제이슨 무어와 벤자민 교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벤자민 교수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했고 언제나 딱딱할 것만 같았던 제이슨 무어의 표정도 풀어져 있었다.

“벌써 마지막이구나.”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뭐, 이젠 조금 힘들긴 하지.”

“저 혼자서도 괜찮다고 했는데…….”

제이슨 무어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유럽 투어 내내 함께 이동하며 지내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늙지는 않았단다. 제이슨. 연주회도 보고 친구들도 만나고 재미있었어.”

벤자민 교수의 말에 제이슨 무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편하게 관람했으면 걱정도 안했다. 연습시간마다 찾아와 조언을 했던 건 어디의 누구였는지.

제이슨 무어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려 할 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실, 실례합니다.”

벤자민 교수와 제이슨 무어가 고개를 돌렸다. 제1 바이올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에 두 사람 모두 이상을 감지했다.

“무슨 일입니까?”

“죄, 죄송합니다. 아, 아내와 아들이 사고가 났다고…… 방금 연락이 와서…….”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제가 지금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공연이 남아 있는데…….”

마주 잡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연주회가 중요하다는 건 안다.

연주자들 중에서, 예술가들 중에서 기다리는 관객들을 위해, 가족의 일을 뒤로하고 눈물을 머금고, 각오를 하며 무대에 오르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힘든 일이었다.

제이슨 무어가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약간의 불안감은 남아 있어 바이올리니스트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위약금은 내겠습니다. 저를 대신할 바이올리니스트도 빨리 찾아보겠습니다…… 공연에 끝까지 참가하지 못해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울음을 삼키는 동안 테이블 근처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무대에 오를 때면 다들 한 번씩 해본 걱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이슨 무어가 입을 열었다.

“위약금은 괜찮습니다. 사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가……감사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도 괜찮습니다. 마침 제가 잘 아는 바이올리니스트가 파리에 있습니다.”

제이슨 무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뒷일은 걱정 마시고 얼른 가 보십시오.”

바이올리니스트는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전하고, 몇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친해진 동료들이 챙겨준 짐을 들고 허겁지겁 호텔을 떠났다. 나머지 짐은 스태프들이 보내주기로 했다.

떠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슨 무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벤자민 모튼 교수가 입을 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면 예비 단원이 있어서 이럴 때 뒤를 맡길 사람이 있겠지만…… 아니라면 힘든 일이지.”

무대냐, 가족이냐.

제이슨 무어처럼 대체할 사람도 없는, 솔로로 활동하는 연주자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이야기였다.

“넌 어떻게 할 것 같니?”

가족은 없으나, 가족 같은 스승이 있었다.

그 내리사랑을 절절히 받으며 자라온 제이슨 무어는 부드럽게 웃는 벤자민 모튼 교수의 얼굴을 보고는 순간 목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리다 겨우 말을 뱉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이 사고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어리게만 보이는 제자에 벤자민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제이슨. 지금 파리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라면…….”

“걔밖에 없죠.”

어느새 마음을 가다듬은 제이슨 무어가 심술궂게 웃었다.

* * *

짝짝짝짝!

관객석 가득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준도 열연을 보여준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하. 재밌었다.”

극장을 나오며 기지개를 켠 서준은 다시 연극 팸플릿을 보았다. 표지를 넘기면 보이는 페이지에 책 소개가 적혀 있었는데, 조금 전 봤던 연극의 원작 소설이었다.

“이게 저번 달부터 공연을 시작한 연극이라는 거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작품인데도 오늘 서준이 봤던 공연 중 가장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서준도 재미있게 봤고 관객들 반응도 좋았으니, 얼마 안 가 소문이 퍼지고 곧 한국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면 어떨까, 상상하며 서준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원작 소설을 사기 위해 서점에 들렀다. 하지만 서점을 나오는 서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다 프랑스어더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하는 서준에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고 있던 아이들이 빵 터졌다.

“준 너 불어 동화책은 좀 읽잖아?”

그 동화책들을 추천해 줬던 찰리의 말에 서준이 말했다. 오늘 요리도 역시 미나와 찰리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배워온 요리였다. 서로 다른 수업을 듣는 탓에 저녁 시간에 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모양이었다.

“이 책이 추리물이라서. 단어 하나하나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지문에 추리의 단서가 있을 수도 있고. 그걸 놓치면 아까우니까.”

“그건 그러네.”

“물론 영어 번역도 원작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긴 하겠지만 잘 번역했겠지.”

그레이스와 지윤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서준과 아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 재미있는 거라도 생각났어?”

“아니, 그게. 아까 도서전에서 그레이스랑 이야기했거든. 어린이 연극의 원작인 동화책 부스 앞이었는데 말이야. 서준이라면 당장 읽어볼 것 같다고. 하나 사갈까, 하고.”

지윤의 말을 이어, 그레이스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준은 영상화한 책, 영상화하고 있는 책, 영상화하면 좋은 책을 정말 좋아하니까 말이야.”

그레이스의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게 서준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이긴 하지.”

지후의 말에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조금 전까지 연극의 원작 소설책을 사러 갔던 이야기를 했던 터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미나가 서준에게 물었다.

“그럼 내일은 도서전에 가려고?”

“응. 오후에는 제이슨이랑 벤자민 교수님하고 만나기로 했으니까. 오전에만.”

“오. 내일 오시는구나.”

“파리에 도착한 건 오늘인데, 짐도 옮기고 할 일이 많다고 해서 내일 만나기로 했어.”

서준의 내일 일정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각자의 일정을 이야기했다. 전혀 여행답지 않은 여행 일정이었지만 다들 밝은 얼굴이었다.

* * *

다음 날.

국제도서전에서 책을 사고 점심까지 먹은 서준은 파리 음악당으로 향했다. 제이슨 무어의 일정이 있으니 거기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파리에 있는 극장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파리 음악당은 공연을 진행하는 곳 말고도 연습할 수 있는 연습실이 있었는데, 미리 연락한 서준은 관객들이 드나드는 입구 말고 다른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제이슨!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찰리가 추천한 쿠키 가게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몫까지 두 손 가득 챙겨온 서준을 제이슨 무어가 마중 나왔다. 연락은 자주 했으나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서준이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나와도 돼요? 바쁜 거 아니에요?”

“일이 생겨서 본격적인 연습은 내일부터야. 그건 다 어떻게 들고 온 거냐. 이리 줘봐.”

제이슨은 서준이 양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서준이 웃으며 피했다.

“놉. 바이올리니스트가 무거운 거 들면 안 되죠. 손가락이라도 다쳤다간 큰일 나요. 제이슨의 연주회인데 망하면 안 되잖아요.”

제이슨 무어가 피식 웃으며 종이가방 하나를 뺏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나눠 들어야지.”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한 얼굴로 눈을 끔벅이는 서준의 모습에 제이슨 무어가 말을 이었다. 드물게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가 한 명 부족해졌거든.”

“! 정말요?”

“그래서 내가 널 추천했다.”

“……네?”

“내 연주회 망치지 않게 손 관리 잘해. 준.”

“……예??”

할 말이 끝난 듯, 앞서서 걸어가는 제이슨 무어를 서준이 얼른 쫓아갔다.

“제이슨! 저 배우라는 거 기억하죠!?”

당황하며 외치는 서준에 제이슨 무어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벤자민 모튼 교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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