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18화
“/준! 지윤!/”
그레이스가 서준과 영상 통화로 인사를 나눴던 지윤을 반가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를 발견한 서준과 지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도착했다고 연락도 못 했는데……./”
“/조금 전에 사라랑 만났거든./”
“/언니랑?/”
서준의 말에 그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레이스의 언니인 사라 웰튼은 항상 있는 일이라 태평했지만 서준과 지윤은 그레이스가 조금 걱정되어 그레이스를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디가드분들도 도와주셨어./”
지윤의 말에 그레이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정장을 입은 보디가드들을 떠올렸는데, 그대신 평범한 모습의 관광객들과 커플이 보였다.
그레이스와 눈이 마주친 그 일반인들이 작게 웃으며 인사했다.
“/……! 설마 저분들이야?/”
“/연기 잘하시지?/”
놀라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서준과 지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제 점심 먹으러 가자. 우리 아직 못 먹었거든./”
“/그레이스 넌 점심 먹었어?/”
“/아니. 쿠키 파는 곳밖에 없더라./”
하긴.
안내 지도도, 휴대폰도 없는 길치에겐 푸드존을 찾는 것도 엄청 어려운 일일 터였다.
서준은 지윤, 그레이스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푸드존으로 향하며, 사라 웰튼에게 그레이스를 찾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사라: 잘도 찾았네!
>사라: 그럼 구경 다 하고 나중에 만나자!
역시 태평해 보이는 답장이었다.
* * *
국제 도서전의 푸드존은 쇼핑몰의 푸드코트 같았다.
가운데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양옆으로 음식 부스들이 늘어져 있었다. 음식 부스에서 원하는 음식을 각자 산 다음 중앙의 테이블에서 함께 먹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뭐 먹을까?/”
“/둘러봐야 할 것 같은데? 너무 많아./”
‘국제’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듯, 세계 각국의 음식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인 것 같았다. 도서전이라는 건 핑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푸드존도 축제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하늘색 모자를 쓴 서준과 아이들은 일단 음식 부스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프랑스 음식 부스는 당연히 있었고 스페인에서 먹었던 스페인 요리들도,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는 부스도 있었다. 간장, 양념, 마늘, 치즈 등의 한국식 소스를 선택할 수 있는 치킨 부스였다.
“/가격이 싸네?/”
“/그러게./”
그레이스의 말에 서준과 지윤이 동의하자, 요리를 하고 있던 한국인이 웃으며 말했다.
“/양이 적어서 그래요. 1인분을 드시려면 두 개를 사야 할 거예요./”
“/아, 그래요?/”
“/여기 다른 음식들도 많잖아요. 이왕이면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어보라는 주최 측의 배려죠./”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하며 그레이스가 양념치킨을 샀다. 확실히 세 사람이 먹기에는 양이 적긴 했지만.
“/오늘만 하시는 건 아니죠?/”
“/그럼요. 도서전 끝날 때까지 해요./”
지윤의 물음에 요리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와서 다른 맛 사 먹으면 되겠다!/”
“/그러게!/”
그 대답에 열흘 내내 국제 도서전에 출석할 생각이 가득한 지윤과 그레이스가 활짝 웃었다. 서준도 웃고 말았다.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서준과 아이들의 손에 점심으로 먹을 음식과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펼쳐놓으니, 맛있는 요리들에 저절로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
“/와! 맛있어!/”
“/그러게! 부스 신청할 때 맛도 보는 건가? 왜 다 맛있지?/”
“/우리가 잘 고른 걸지도 모르지. 나중에 애들하고 같이 오자./”
미나와 찰리가 엄청 좋아할 것 같다는 서준의 말에 지윤과 그레이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점심을 먹으며 지윤과 그레이스는 전화와 메시지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전부 하는 듯 수다를 떨었다.
“나도 그거 읽었어. /처음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거로 읽었는데 알아보니까 /오역이 많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다음에는/ 영어 /원본으로 읽었는데/ 확실히 느낌이 다르더라.”
“맞아. /원어가 주는/ 느낌이 있지. 나도 거울은 한국어 /사전 찾으면서 읽었어./”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대화하는 그레이스와 지윤이었다. 둘 다 한국어도 영어도 배운 터라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보고 있는 서준의 입장에서는 웃음이 자꾸만 나왔다.
이건 2개국어인가, 0개국어인가.
녹음해서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서준에게도 흥미로운 주제로 바뀌었다.
“/진짜! 각색도 정도껏 해야 할 것 아니야? 복선으로 나오는 대사는 다 잘라버리지, 캐릭터 설정은 다 무시하지. 세트장도 소설이랑은 전혀 다르고! 배우들이 열심히 하면 뭐해, 각색이 망했는걸. 으으./”
영화화된 [이클립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년 11월 말에 개봉해서 한 달도 안되 상영이 끝났던 [이클립스]. 이제 겨우 반년이 지난 상태라 그레이스의 울분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열심히 적은 소설이 영상화된다는 게 너무 좋아서…… 계약이나 조건 같은 걸 너무 대충해 버렸나 봐……./”
이 자책감은 몇 년이 흘러도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다. 씁쓸해 보이는 그레이스를 서준과 지윤이 안쓰러운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친구들의 얼굴에 아차 한 그레이스가 얼른 밝은 얼굴로 기쁜 소식을 전했다.
“/아! 괜찮아. 이번에 언니 소설이 또 영화화하거든! 이게 기쁜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는 개봉할 때까지 모르는 일이겠지만 말이야……. 이클립스처럼 폭망 해버리면 나쁜 소식이겠지……./”
기껏 힘을 냈으나 다시 침울해진 그레이스 웰튼이었다.
“/그래서 언니도 원작자로서, 나도 제 1 독자이자 수정에 도움을 준 편집자랄까…… 동생이랄까…… 하여튼, 그런 자격으로 각색에 열심히 참견할 생각이야. 언니도 도와달라고 했거든. 그리고 이번엔 계약서에도 꼭 넣으려고. 이제 캐릭터 붕괴 따윈 없다!/”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을 보니 다음 영화화는 꽤 성공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떤 소설인데?/”
사라 웰튼은 [이클립스]를 출간한 후 그 이후로도 계속 새로운 소설들을 써오고 있었다. 서준도 빠짐없이 읽고 있었다.
‘그 소설들 중 어떤 소설이 이번에 영화화를 하는 걸까?’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왜? 관심 있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서준의 말에 그레이스가 활짝 웃었다가 시무룩해졌다.
“/준만 출연해 주면 완전 좋은! ……일이지만 작품 보는 눈이 까다로워서 될까 모르겠네……./”
작품에 한해서는 엄청 냉정해지는 서준에 대해서 그레이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지윤이 웃음을 터뜨렸고, 서준은 볼을 긁적였다.
* * *
그날 저녁.
하루 일과를 끝낸 서준과 아이들이 숙소에 모였다. 다들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낸 모양인지 표정이 정말 좋아 보였다.
“/만나서 반가워. 그레이스 웰튼이야. 그레이스라고 불러줘./”
그레이스 웰튼과 처음 만나는 미나와 지후가 인사를 나누었다.
“/그레이스, 저녁 먹고 갈 거지?/”
“/응!/”
저녁 메뉴는 미나와 찰리가 오늘 수업에서 배워 온 프랑스 요리들이었다.
물론 첫날이라 그렇게 힘이 들어간 요리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뛰어난 실력 덕분에 레스토랑 못지않은 한 상이 차려졌다.
여섯 아이가 모인 식사 시간은 오늘 하루 이야기로 시끌벅적해졌다.
“/다들 요리 잘하시더라. 단기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지금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어. 체계적인 요리 수업은 어떤 건가 궁금해서 참가하셨대./”
같이 수업을 듣는 어른들과 제법 친해진 미나가 꼭 한번 들르라고 가르쳐 준 그들의 식당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알베르 교수님 수업 말고도 몇 개 듣게 됐어. 괜찮을까, 했는데 다들 반겨주시더라. 한국 의대 수업은 어떤지도 물어보셨고. 아직 1학년이라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선배한테 물어보느라 조금 힘들었지만./”
그새 청강하는 강의가 늘어버린 지후에 서준이 물었다.
“/다른 수업을 들을 시간이 있어?/”
“/알베르 교수님 특강 시간은 3시간 정도밖에 안 돼. 오늘은 인사드리려고 일찍 간 거라서./”
“/그렇구나. 강의 내용의 안 어려웠어?/”
걱정하던 지후를 기억하는 지윤의 물음에 지후가 빙그레 웃었다.
“/어렵긴 했는데 알베르 교수님이 내일 오전에 오면 오늘 특강 내용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신대./”
“/오. 엄청 좋으신 분이시네./”
찰리의 말에 지후가 자신의 칭찬을 들은 양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치 최시혁을 만난 박지오 같아 서준과 아이들이 작게 웃었다.
“/도서전은 어땠어?/”
“/재미있었어! 동화책이랑 소설책 재미있어 보이는 게 많아서 고르느라 힘들었어. 다 들고 가기는 힘들잖아./”
“/거기 푸드존이 있는데 여러 나라 음식이 많더라. 도서전은 주말에도 하니까 그때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서준의 말에 아이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아이들의 대화가 좀처럼 끊기질 않는 바람에 저녁 시간이 조금 길어져 버렸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자, 해가 완전히 지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조심해서 가./”
“/내일 보자./”
찰리가 그레이스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서준과 친구들에게 인사한 두 사람이 숙소를 나섰다.
“음. 우리 오늘은 일찍 잘까?”
서준의 말에 작게 하품을 하던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떠서 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가 오늘 하루종일 너무 텐션을 올렸던 나머지 피로가 많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잘 자, 서준아, 지후야.”
“너희도 잘 자.”
얼른 씻고 나온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체력이 쌩쌩한 서준이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고 방으로 향했다.
방금 들어간 것 같은데, 누가 들어와도 모를 정도로 잠에 푹 빠진 지후의 모습에 서준이 웃고 말았다.
엄청 긴장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모르는 교수님에게 메일을 보내고, 답장이 오고, 교수님을 만나고, 어려운 수업을 듣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미나도, 지윤도 그랬을 거다.
“그래도 재미있었겠지.”
즐거워하는 친구들을 보니 서준도 즐거워졌다.
“내일부터는 나도 여기저기 둘러봐야지.”
영화제 같은 큰 축제는 없겠지만,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은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작게 웃은 서준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곧 친구들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 * *
서준이 눈을 떴다. 언제나 그렇듯 생의 도서관이었다.
으차, 하고 기지개를 켠 서준이 선의 도서관 앞으로 향했다.
“여기도 많이 변했네.”
개집보다 작은 문부터 고개를 들고 봐야 할 정도로 커다란 문까지.
수준에 맞추어 나뉘어 있던 도서관의 문들은 전부 사라지고 하나의 문으로 통합돼 있었다. 악의 도서관도 이곳과 같은 모습이었다.
“얜 그대로지만.”
첫 생의 책이 있었던 새까맣고 작은 문을 바라보던 서준이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첫 번째 삶의 책이니만큼 특별 취급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젠 최상급 문까지 다 열었으니 더 나타날 것도 없겠지.”
언제나처럼 의자에 앉은 서준은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들었다. 어제까지 읽은 책이었다.
“여기까지 읽었지.”
서준은 익숙하게 책갈피로 표시해 둔 곳을 펼쳐 독서를 시작했다.
읽고 있는 책은 여전히 [황금 인어]. 많이 읽었지만, 아직도 많은 책이 남아 있었다.
한 권을 다 읽은 서준은 다음 권을 꺼내기 위해 [황금 인어]의 책으로 가득한 책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한국에 돌아갈 때쯤이면 다 읽을 수 있겠지?”
조금 속도를 내면 마지막 여행지인 영국에서 끝날지도 몰랐다.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안다호에게 적절한 능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권을 꺼내려던 서준의 눈앞에, 순간 알림창이 나타났다.
[(선)미식가 오크의 초대를 받은 존재가 최대치에 다다랐습니다.]
서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
[(선)미식가 오크의 초대가 등급이 상승합니다.]
들고 있던 책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거 왠지 익숙한데?
[(선)미식가 오크의 초대의 등급이 중하급에서 중급으로 상승합니다.]
서준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확인 사살을 하듯 새롭게 갱신된 능력의 알림창이 나타났다.
[(선)미식가 오크의 초대-중급]
정신력이 약한 이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합니다.
음식들이 맛있게 보이게 만듭니다.
대상의 취향에 따라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변합니다.
일정 확률로 꿈속에서 미식가 오크와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등급이 상승할 수 있는 거였어?”
아무래도 조금 전 자신이 말했던 ‘더 나타날 것도 없겠지’라는 말은 플래그였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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