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16화
앞으로 2주 동안 머물 숙소의 주방이 북적북적했다. 찰리와 찰리 아버지가 팔을 걷어붙인 덕분이었다. 미나는 프랑스 가정식을 요리하고 있는 두 사람을 돕고 있었는데 매우 들뜬 얼굴이었다.
“미나 엄청 신났네.”
“초대를 받는 게 아니라면 가정식 요리를 하는 건 보기 힘드니까.”
“그건 그래.”
지윤과 서준이 웃으며 짐을 정리했다.
방 두 개에 거실과 주방이 있는 파리의 숙소는 가정집답게 아늑했다. 한국과 다른 장식과 인테리어가 여행을 온 것 같기도 하고 가정집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져 평범한 집인 것 같기도 했다. 창밖의 풍경도 한국과 다른 느낌이었다.
“책도 있네! 아, 프랑스어야…….”
반색하던 지윤이 아쉬운 얼굴로 책을 내려놓았다. 서준과 미나 덕분에 영어는 곧잘 하지만 프랑스어는 배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서준이는 불어도 할 수 있다고 했지.’
서준은 한국어, 영어 말고도 여러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고 그 나라 작품들을 보며 일상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익혔다고 했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난 영어도 힘든데 말이야.’
작게 웃은 지윤이 영어로 된 책은 없나, 거실 한쪽에 놓여 있는 책들을 살펴보았다.
“지후야, 뭐 하고 있어?”
서준의 물음에 아, 하고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지후는 캐리어를 열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알베르 교수님께 파리에 도착했다고 메일을 보내는 중이야. 근데 지금 보내면 실례이려나? 벌써 저녁인데…….”
“메일은 괜찮지 않아? 문자나 전화가 아니니까.”
서준의 말에 지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메일을 보내는 데 집중했다. 감사를 담아 몇 번이고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고치는 것 같았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다는 걸 안 지윤은 이내 포기하고 리옹역에서 가져온 국제도서전 팸플릿을 꺼냈다. 열흘 동안 진행되는 국제도서전은 여러 가지 관련 프로그램이 많아 기대 중이었다.
“그레이스도 책 좋아한다고 했지?”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게 더 좋대. 그레이스의 언니가 [이클립스]를 쓸 때 도움도 줬다고 하더라.”
“그렇구나!”
국제도서전을 혼자 돌아다녀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돌아다녀도 좋을 것 같았다.
“서준아. 그레이스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알아?”
“으음. 재미있다고 추천한 책 목록은 있어. 아, 둘이 이야기해 볼래?”
“……그럴까?”
서준이 웃으며 단톡방에 지윤과 그레이스를 초대했다.
서준의 친구들에 대해 자주 들었던 그레이스가 기쁘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화하는 언어가 영어라 지윤의 메시지가 조금 짧고 느리긴 했지만 쌓여가는 메시지를 보니 잘 대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서준은 2주간의 일정을 체크했다.
미나가 참가할 르 꼬르동 블루 2주 프로그램과 지후가 청강할 2주간의 수업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일에만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요일이 오늘과 일요일인 내일은 서준과 아이들 모두 일정이 없었고 그다음 날인 월요일부터 모든 일정이 시작된다. 국제도서전도 월요일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무 일정이 없는 주말에는 휴식을 취하거나 관광을 하기로 했다.
‘어디를 가 볼까?’
자신이야 가족여행으로 몇 번 왔었지만, 친구들은 처음이니까 파리에 오면 봐야 하는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 같은 곳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관광객보다는 여행가이드의 마음으로 최적의 루트를 찾는 서준이었다.
“/자! 다들 밥 먹자!/”
얼마 후, 찰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가득 차려진 프랑스 요리에 서준과 아이들이 환하게 웃었다.
* * *
다음 날.
서준과 아이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관광에 나섰다. 찰리도 여행 가이드로 동행했다.
어젯밤 서준에게서 오늘 하루 일정을 보고받아 미리 숙소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디가드들이 그 뒤를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생각보다 엄청 편하네./”
“/그러게./”
커플로 분장하고 있는 보디가드 두 명이 앞서가는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 의뢰인이 할리우드 스타 서준 리라는 소리에 사람이 몰려서 힘들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편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냥 동양인 관광객으로 보이는걸. 관광객이 많으면 우리도 찾기 힘들겠어./”
“/게다가 유명 연예인들 중에 성격 나쁜 사람도 있다던데, 그런 것도 없고./”
남자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멋진 경기도 봤고./”
“/크으. 대단했지./”
경호를 하러 왔는데 딱히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 일보다는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뭐, 옆에 있는 게 직장 동료라서 금세 사그라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은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틈틈이 아이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A팀. 오른쪽. 검은 후드. 주의 바람./
이어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보디가드의 시선이 그 목소리에 따라 움직였다. 오른쪽, 검은 후드. 검은색 집업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약간 엉거주춤한 포즈로 걷고 있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오,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서준과 아이들, 관광객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가 볼까요?/”
A팀이 움직였다.
보통 걷는 것보다 빠른 속도였지만, 빠르게 다음 관광지로 이동하는 여행객들이 많은 만큼 눈에 띄지는 않았다.
서준 리를 노린다기보다 그냥 무작위로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범 같았다. 가방을 자를 나이프나 흉기가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며 커플은 곧장 걸어 나갔다.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검은 후드 쓴 소매치기범 쪽으로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탁!
하고 부딪히는 건 당연한 일.
건장한 남자와 부딪힌 소매치기범이 비틀거렸다.
“/오! 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곳 없으세요?/”
주머니 크기로 보니 나이프보다 커터칼 정도. 커플로 위장한 보디가드들은 호들갑스럽게 야단을 떨며 날카로운 눈으로 소매치기범을 살폈다. 소매치기범이 달려들 수도 있으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 요란한 소음에 사람들이 커플과 소매치기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매치기범이 당황하며 얼른 자리를 떴다.
오늘도 또 하나의 사고를 미리 방지한 A팀과 근처에 있던 보디가드들이 빙그레 웃었다.
“……보디가드분들이지?”
그 모습을 사진을 찍고 있던 서준과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놀란 마음에 영어 대신 한국어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러게. 무슨 일이지?”
“/소매치기인 것 같은데?/”
“그렇구…… 찰리? /한국어 알아들어?/”
미나와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자 찰리가 웃으며 말했다.
“쵸큼?”
“조금.”
“/……준. 에반이나 리첼은 한국 작품에 관심이 많아서 발음도 정확하게 하겠지만, 난 평범한 시청자라고. 이 정도도 충분해./”
발음을 고쳐주는 서준에 찰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어 선생님 너무 빡세요.”
“/……빡세다는 단어는 어디서 들은 거야? 그리고 방금 말한 건 왜 발음이 정확한 거고?/”
황당하다는 듯 찰리를 보는 서준에, 찰리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 예능 재미있더라. 거기서 배웠지. 아직 모르는 단어도 많고 문법도 잘 모르지만, 한국어 조금 할 수 있어. 아, 지윤. 그레이스도 한국어 조금 할 줄 알아./”
“/그렇구나. 잘됐다!/”
“/그럼 찰리 넌 서준이한테 불어를 가르쳐 줬겠네?/”
미나의 말에 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근데 준이 배우는 속도가 더 빠르더라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맞지? 금방금방 늘더라./”
“/나야 뭐, 프랑스 작품도 꽤 보니까./”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본다고 외국어가 그렇게 늘지는 않아. 서준아./”
미나의 말에 아이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소매치기라…… 조심해서 다녀야겠다./”
지후의 말대로였다. 보디가드가 있다고 해서 너무 안심하고 다니면 언제 사고가 날지 몰랐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고 다니는 것도 안 좋지만./”
“/맞아. 여행이잖아. 즐겨야지!/”
아이들은 밝은 얼굴로 다음 관광지로 향했다. 보디가드들이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 * *
월요일 아침.
숙소가 들썩이고 있었다. 미나와 지윤, 지후가 들뜬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너무 기대돼서 잠 잘 못 잤어.”
“나도.”
수업 때 사용할 노트와 펜을 챙기며 말하는 미나에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윤도 국제도서전에서 들고 다닐 가방에 이것저것 챙겼다가,
“아, 이러면 무거워서 책을 못 사려나?”
다시 뺐다.
“/다들 엄청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네./”
“/그러게 말이야./”
미나와 같이 르 꼬르동 블루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에 와 아침 식사까지 함께 한 찰리의 말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찰리가 출발하자는 시간이 되자마자 가방을 챙긴 미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우리 먼저 가 볼게!/”
“/다녀올게./”
찰리가 웃으며 뒤따라 일어났다.
“/둘 다 수업 잘 듣고 와./”
“/미나야! 화이팅!/”
“/조심해서 다녀와./”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미나는 찰리와 함께 르 꼬르동 블루로 출발했다.
“그럼 우리도 출발하자.”
“그래!”
숙소의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나온 서준과 지윤, 지후도 파리 5대학으로 향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긴장했어?”
조금 긴장한 듯한 지후의 얼굴에 서준이 물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지후가 대답했다.
“수업 못 알아들을까 봐.”
“다 알아듣는 게 이상한 거지. 너 이제 1학년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교수님이 허락해 주셨는데 수업을 못 알아들으면 죄송하잖아.”
서준과 지윤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일에 1학년인 거 적었다며. 그럼 교수님도 고려하고 계시겠지.”
“맞아. 괜찮을 거야.”
“……그럴까? 일단 한국에서 예습도 해오고, 복습하려고 녹음할 준비는 했는데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하지?”
역시 박지후.
서준과 지윤이 감탄했다. 알아서 대비책까지 마련한 듯했다.
“수업 영어로 진행된다며? 나도 도와줄게. 미국 메디컬 작품도 많이 봤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웃으며 말하는 서준의 모습에 지후가 말했다.
“……서준이 네가 작품 이야기하니까 묘하게 믿음이 가네.”
“그러게. 왠지 작품에 나오는 의료 용어는 전부 외웠을 것 같아.”
지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에서 봤다’는 간접 경험이 이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곧 파리 5대학으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오른 서준과 지후, 지윤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데 그 교수님은 어떤 분야를 가르치셔?”
지윤의 물음에 지후는 마치 자신의 일을 자랑하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알베르 교수님은 신경외과 전문의야. 프랑스 피티에 병원이 신경외과 쪽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알베르 교수님은 거기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래.”
와아.
서준과 지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생각보다 엄청난 교수님인 것 같았다.
“신경외과는 뇌 파트랑 척추 파트로 나뉘는데 알베르 교수님은 뇌 파트 전문의셔. 뇌 신경과 관련된 논문도 엄청 내셨대. 이번 특강도 새로운 논문에 관한 내용이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지후의 모습에 서준과 지윤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거…… 너무 어려운 거 아닌가?
하지만 지후의 밝은 표정을 보니 잘할 것 같아, 서준과 지윤은 이내 웃고 말았다.
잠시 후.
버스가 파리 5대학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멈추었다. 어느새 걱정은 잊은 듯 기대로 들뜬 지후와 지윤, 서준이 버스에서 내렸다.
친구들과 파리 5대학 쪽으로 향하던 서준은 파리 5대학 교문 앞에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왠지 자신들을 바라보며 반가워하는 듯했다.
“지후야. 누가 마중 나오기로 했어?”
상기된 얼굴로 파리 5대학의 풍경을 둘러보던 지후가 서준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 아마 조교님이나 직원분이…… 알베르 교수님?”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하는 지후의 모습에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오던 중년인이 활짝 웃었다.
“/오! 맞군요! 반가워요! 박!/”
현재 전 세계 신경외과 뇌 파트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을 갖춘 알베르 모흐 교수.
그가 메일로 특강 청강을 문의한 이 용감하고도 대담한 어린 학생을 위해 직접 마중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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