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10화
“서프라이즈!”
하고 외치는 박지오의 모습에 서준과 아이들이 정신을 차렸다.
깁스나 반깁스도 아니고 그저 붕대를 하고 있는 것뿐. 게다가 진짜 다쳤으면 옷이나 신발로 붕대를 가렸을 박지오가 ‘나 아프다’ 하고 붕대를 대놓고 보여주고 있으니, 천천히 상황이 파악되었다.
놀란 친구들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보며 박지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박지오의 에이전트 김태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놀랐잖아!”
“그런 거로 장난치지 마!”
박지후가 멍청한 형의 어깨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미나도 지후를 거들어 박지오의 등짝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느껴지는 따가움에 지오가 몸을 베베 꼬았다.
“하아.”
지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떨어진 과자들을 줍는 사이, 서준이 어색한 얼굴로 웃고 있는 김태주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검은 모자에 그 정체를 알고 있던 김태주가 몸을 움찔 떨었다. 온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왔다. 진짜 배우 이서준이 자신의 바로 앞에 있었다.
“지오, 어떻게 된 거예요? 진짜 다친 거 같은데.”
서준의 말에 ‘진짜 아파.’ 하며 꿈틀거리고 있던 지오도, 분이 안 풀리는지 계속 찰싹찰싹 때리고 있던 지후와 미나도, 과자를 몇 개 안 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지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때리던 손을 멈춘 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 아니었어?”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은데 다친 건 맞는 것 같아. 아마 치료가 끝나가는 중?”
박지오가 떨리는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김태주도 놀란 눈치였다.
“……무섭다. 이서준. 어떻게 알았대?”
“진짜야?”
“그게…….”
박지오가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태주 형은 알고 있었죠?”
왜 한국에 연락하지 않았냐는 지후의 눈빛에 김태주가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대답했다.
“지오가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발을 삐끗했어. 잠이 덜 깼었대.”
“……네?”
훈련도 아니고 시합도 아니고.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으헤헤헤.”
“웃을 때냐! 이 멍청이가!”
맞아도 싸다.
엄마 아빠 몫까지 지후가 지오의 등짝을 내려쳤다. 미나와 지윤이 자업자득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서준은 작게 웃었다.
[(선)마을 의원의 백사의 눈]으로 하얗게 빛나던 눈동자가 다시 새까맣게 물들었다.
한바탕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다들 김태주의 차에 올랐다. 큰 차를 빌린 덕분에 짐을 몽땅 싣고도 자리가 넉넉했다.
안전벨트를 멘 지오가 아직도 따끔한 기운이 남아 있는 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심각한 건 아니고 의료팀도 오늘까지만 붕대를 감고 있으면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장난 한번 쳐본 거야. 서준이가 알아챌 줄은 몰랐지만. 이 무서운 놈.”
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 능력 덕분이었다.
지오가 지후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 괜히 걱정하실라.”
“말 안 해. 알면 걱정보다 먼저 어이가 없으실걸.”
아직도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지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태주가 전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갔다.
제법 진정된 아이들이 한국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잘 도착했다고 연락을 하고 난 후, 운전을 하고 있던 김태주가 입을 열었다.
“일단 숙소는 집 하나를 빌려놨어. 방이 두 개라서 나눠 자면 될 거야. 숙박업을 하는 곳이라 침대도 다섯 개 준비되어 있고.”
“다섯 개나요? 저흰 넷인데요?”
지윤의 물음에 지오가 활짝 웃었다.
“너희가 있는 동안에는 나도 거기서 지낼 거야.”
“그래? 재밌겠다. 다 같이 여행 온 것 같고.”
“그치?”
서준의 말에 박지오가 히히 웃었다. 지윤과 미나도 반기는 얼굴이었다. 떨떠름하던 지후도 들뜬 형의 모습에 이내 웃고 말았다.
김태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일 보디가드분들을 만날 거야. 보통 때는 일반인 모습으로 숨어 있을 거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테지만 일단 서로 얼굴은 알고 있어야 하니까.”
한국에서도 제법 있었던 일이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럽은 소매치기가 많으니까 조심하고 짐 들어준다고 해도 다 믿지는 말고, 한국처럼 자리에 뭐 놓고 화장실 가면 누가 훔쳐가니까 조심하고…….”
그리고 김태주의 잔소리 같은 조언들이 이어졌다.
* * *
숙소에 도착한 서준과 아이들은 조금 이르지만,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 메뉴는 한식. 한식 자격증이 있는 서준과 미나가 두 팔을 걷어붙였다. 재료는 한인마트와 근처 가게에서 지오와 김태주가 미리 사놓은 덕분에 사러 가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다.
“뭐 할까?”
“나 찜닭! 찜닭 먹고 싶어! 당면 듬뿍 넣어서!”
박지오의 주문을 받은 서준과 미나가 요리를 하는 사이, 지후와 지윤은 바리바리 싸 온 짐을 정리했다. 쌍둥이 부모님이 싸주신 반찬 통은 터지지 않게 꽉꽉 포장되어 있어 푸는 것도 일이었다.
“일단 여기서 지내는 동안에는 여기서 밥 먹고 우리 떠나면 지오 집으로 옮기면 되겠다.”
냉장고에 차곡차곡 반찬 통을 넣던 지윤의 말에 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캐리어 가득 든 반찬 통을 싼 비닐을 뜯던 지후도 말했다.
“여기 날짜 적혀 있으니까 잘 확인하고 먹어. 날짜 지난 거 먹었다가 탈 나지 말고.”
“응.”
엄마 아빠가 정성껏 준비한 반찬들에 지오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좋아하는 반찬들이 가득해서 더욱 그랬다.
“근데 한국 날짜야, 스페인 날짜야?”
“상관없지 않나. 하루 정도 차이 난다고 죽진 않음.”
내 동생은 여전히 차갑다. 차가워.
그래도 집이 북적북적해지니 마음이 포근해진 박지오였다. 아이들은 능숙하게 몇 가지 반찬들을 꺼내 식탁 위에 놓고 수저도 자리마다 놓았다.
언제쯤 나갈까, 눈치를 보고 있던 김태주를 발견한 지오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태주 형도 같이 먹어요.”
“어, 음. 그럴까?”
지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보며 김태주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저기서 요리를 하고 있는 게 배우 이서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은 김태주가 속닥거렸다.
“지오야. 나 나중에 사인 좀 받아주면 안 될까?”
“서준아! 태주 형이 네 사인 받고 싶대!”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지오의 외침에 김태주가 이마를 짚었다. 서준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찜닭을 메인으로 반찬들과 밥을 올려놓자 식탁이 가득 찼다. 기내식을 먹긴 했지만 방금 한 따끈따끈한 음식들은 아주 맛있어서 계속 들어갔다.
“이번에 나가는 경기가 엄청 중요하다는 거지?”
지윤의 물음에 찜닭을 흡입하고 있던 지오와 생각보다 더 맛있는 찜닭에 놀라고 있던 김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 팀이 있는 리그가 3부 리그거든. 1부가 잘 알려진 라리가고 2부가 라리가2, 3부가 세군다 디비시온B라고 불리긴 하는데 그냥 3부 리그라고만 알아도 돼.”
서준과 아이들이 지오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김태주는 그에 덧붙여, 1부 라리가 La Liga가 메이저리그쯤 된다면 2부 라리가2 La Liga2부터는 마이너리그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지오가 소속된 곳이 바르셀로나 FC라고 하지 않았어?”
“팀은 또 따로 있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선수들이 모인 1군팀, 내가 있는 2군팀, 그리고 유소년팀.”
“2군팀 정식 명칭은 바르셀로나 FC B야.”
김태주가 바르셀로나 FC 1군에 소속된 선수들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서준과 아이들도 들어봤던 선수들이라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렇게 대단한 선수들이 있는데, 지오가 바로 1군팀으로 가기에는 아직 힘들지.”
“언젠간 갈 거지만!”
의욕이 넘치는 지오의 모습에 서준과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땐 삐끗하지 마라.”
“으윽.”
지후의 말에 몸을 움찔 떤 지오가 말없이 간이 잘 밴 당면을 흡입했다.
“근데 바르셀로나는 유소년 시스템이 잘 갖춰졌다고 들었는데, 쟤 되게 빠르게 출전했네요?”
축구 선수인 형을 둔 덕분에 서준과 미나, 지윤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지후의 물음에 김태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것도 맞는 말인데…… 몇 년 동안 2부 리그 승격을 못 해서 이번 시즌부터 외부 용병들을 적극적으로 불러모으고 있었거든. 바로 실전에 투입 가능한 선수들로.”
박지오와 에이전시도 그러한 이유로 바르셀로나 FC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실력만 좋으면 곧바로 실전에 투입될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예상대로 테스트받고 조금 간을 본 다음에 감독이 바로 투입했지. 물론 시즌 막바지에 들어간 터라 팀 순위를 크게 바꾸지는 못했지만, 결정적인 기회에는 꼭 골을 넣는 지오가 팀에도 사람들에게도 인상을 깊게 남겼어.”
“나한테 사인받는 사람도 생겼어!”
박지오가 환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서준과 미나, 지윤이 놀라며 감탄했다. 뿌듯한 얼굴로 웃던 박지오의 시선에 동생의 얼굴이 들어왔다.
“박지후. 너 표정이 왜 그래?”
“아니. 믿음이 안 가서. 박지오한테 팬이라니…… 십 년은 이르지.”
“야! 태주 형도 봤거든! 그죠, 태주 형!”
지오의 말에 김태주가 요 몇 달 동안을 회상했다.
처음에는 할리우드 스타, 서준 리의 친구라는 소식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도 경기장 안이 좁다는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활약하는 박지오를 보면 다른 건 다 잊고 축구선수 박지오를 응원하고는 했다.
경기장에서 가장 빛나는 스트라이커.
소꿉친구가 배우라서 그런가. 경기장 안에서의 박지오는 관중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김태주가 잠깐 회상하는 사이, 이야기는 저만치 흘러가고 있었다. 화제 전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이틀 후에 경기가 있는데 그게 승격전 마지막 경기야. 여기서 이기면 2부로 승격, 지면 잔류고.”
“오!”
신나게 말하는 지오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게 중요한 시합일 줄은 몰랐다.
“엄청 중요한 시합이었네!”
“근데 다치기나 하고.”
기승전 부상으로 이어지는 지후의 반응에 지오가 소리를 질렀다.
“의료팀이 오늘까지만 붕대하라고 했거든! 낫긴 다 나았어! 그리고 그냥 삐끗한 거야! 심하게 다친 거 아니라고!”
왁왁, 시끄러운 지오의 앞 접시에 서준이 닭다리 하나를 놓아주었다. 궁시렁대던 지오가 닭다리 하나로 조용해지자 아이들과 김태주가 작게 웃었다.
“그럼 그 경기에 지오가 나가는 거예요?”
“그래. 선발이야. 다치지만 않으면 전반 후반 다 뛰겠지.”
유난히 다치지만 않으면, 에 강세가 들어간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김태주의 장난기 어린 말에 박지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다 멈추었다. 입술을 삐죽이는 박지오의 모습에 결국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오야. 그 경기 우리도 볼 수 있어?”
“……오려고?”
“응. 중요한 시합이잖아. 당연히 봐야지.”
서준의 말과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의 모습에 표정을 푼 지오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대답했다.
“승격전이라서 걱정이긴 한데, 팀에 물어보면 될 거야.”
그렇게 다 같이 승격전을 보기로 한 후, 이야기는 다른 화제로 흘러갔다.
“스페인 다음에는 어디 갈 거야?”
여유 시간은 모두 훈련에 집중할 예정인 지오가 부럽다는 얼굴로 친구들에게 물었다.
“프랑스 파리!”
그 물음에 미나가 눈이 반짝이며 대답했다. 지윤과 지후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지오가 눈을 끔벅였다.
“뭐야? 파리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왜 다들 들뜬 얼굴이야?”
“거기 르 꼬르동 블루라는 엄청 유명한 요리학교가 있는데 2주 단기 프로그램이 있대. 나 그거 신청했거든. 학기 중에 진행하는 수업이랑 거의 똑같은 수업이라고 해서 엄청 기대 중이야!”
“우리가 갈 때쯤에 파리에서 국제 도서전도 열릴 거래! 열흘 동안 진행되는 행사인데 참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기대하고 있어!”
상기된 얼굴의 미나와 지윤을 이어 지후가 입을 열었다. 침착하던 평소의 표정과 달리 설레는 얼굴이었는데 서준은 충분히 이해했다.
“난 파리 5대학에 갈 예정이야.”
설마 가장 가능성이 작았던 지후에게 답장이 올 줄이야.
영어로 온 답장은 몇 번을 읽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지후는 서준과 미나, 지윤에게도 확인해 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세 친구들의 놀란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박지후는 실감할 수 있었다.
진짜 답장이 온 것이었다.
“피티에 병원에 계시는 교수님이 파리 5대학에서 특강을 하시고 계시는데, 내 메일을 보시고 특강이라도 괜찮으면 오라고 하셨어.”
이야기를 듣던 박지오와 김태주가 입을 쩌억 벌렸다.
“……너희 여행 온 거 아니야? 유럽까지 왔는데 공부를 하고 싶어?”
“여행도 할 거야. 르 꼬르동 블루 수업 끝나면!”
“응응! 도서전 끝나면!”
“너도 프로 데뷔 안 하고 유럽여행 왔으면 일반인 프로그램이라도 참가하고 싶었을걸.”
지후의 말에 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신이 아직 한국에 있었다면, 유럽 여행을 왔을 때 유명 구단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준비한 프로그램들에 참가했을 터였다.
“뭐, 그건 그렇지.”
아이들의 이야기에 김태주가 이마를 짚었다. 요새 애들은 다 이런가? 나만…… 나만 이상한가? 내가 저 나이 땐 뭐 했지? 그런 의문이 계속 들었다.
“그럼 파리에서만 2주를 보내는 거야?”
“응. 그러려고.”
“숙소도 다 잡아놨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던 지오가 문득 조용히 있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에 가장 들떠야 하는 사람일 텐데 유난히 조용했다.
“서준이 넌 파리에서 뭐 해?”
“……없어.”
“응?”
“아무것도 없어.”
메일을 보낸 대학에서는 답장도 없고, 열리는 영화제도 없고, 참가하고 싶은 일반인 프로그램도 찾지 못한 서준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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