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09화
서준은 바이올린을 들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교수가 권세아의 점수를 채점하고 있는 듯 펜으로 종이 위를 체크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종이가 쌓여 있었는데 아마 앞서 시험을 친 학생들의 것인 것 같았다.
[바이올린에 대하여(심화)] 강의는 C관의 조금 큰 연습실을 빌려 시험을 쳤다. 서준이 맨 마지막 순서였다.
서준이 들어온 것을 느낀 교수가 고개를 돌렸다. 서준이 꾸벅 인사를 하자 교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교수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 이름을 확인했다.
“연기과 이서준 학생?”
“네. 이서준입니다.”
“그럼 지정곡부터 들어보죠.”
시험 내용은 바이올린으로 지정곡 하나와 자유곡 하나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지정곡은 삼 주 전에 미리 알려주었고 처음 연주와 지금의 연주를 비교하여 얼마만큼 나아졌는지, 지적당한 부분을 고쳤는지 확인하고 그걸 점수로 매긴다고 했다.
물론 기본적인 실력도 고려한다.
연주가 1에서 10으로 바뀔 때는 그 변화가 잘 드러나지만 9.5에서 10으로 바뀔 때는 똑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잘하는 학생이 오히려 점수를 못 받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린에 턱을 괴는 서준을 보며 교수는 귀를 기울였다. 기다란 활이 현을 스치며 부드러운 선율이 들렸다.
배우 이서준의 바이올린 실력은 바이올리니스트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물론 [오버 더 레인보우]와 버스킹 영상,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까지, 전부 영상이라 후처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교수는 기본적으로 배우 이서준의 실력이 좋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지만.’
연주만 들으면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것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준급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회에 온 듯한 감미로운 지정곡의 연주가 끝나고 자유곡이 시작되었다.
이것 또한 지적할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취미생활일 뿐일 텐데 이 정도 실력이라면 바이올린에 집중한다면 얼마나 잘할지. 기대감만큼 아쉬움이 쌓여갔다.
‘세아랑 같이 활동하면 좋을 텐데…….’
그리고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에서 연주한 빈BIN까지. 분명 한국의 클래식계에 커다란 바람이 불었을 거다.
‘……이젠 힘들겠지만.’
어느새 채점이 아니라 감상이 되어버린 시험 시간이 끝났다. 됐다는 교수의 말에 바이올린을 정리하던 서준을 교수가 불렀다.
“이서준 학생.”
“네. 교수님.”
“고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감사 인사에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서준의 표정에 교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냉막하던 얼굴에 작은 온기가 돌았다.
“세아에게 조언을 해줬다고 들었습니다.”
편하게 부르는 이름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수님. 혹시 세아랑 아는 사이세요?”
“네. 세아가 어렸을 때부터 제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하.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교수들이 어린 영재들을 가르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언까지는 아니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가장 어려운 법이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서 사라지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또 한 명의 제자가 그렇게 사라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교양 수업에까지 불러들인 교수가 쓰게 웃었다.
“이서준 학생 덕분에 세아가 다시 마음을 잡았습니다. 올해 콩쿠르도 준비하고 있어요.”
“잘됐네요. 아, 그런데…….”
음악감독을 하고 싶다던 건 들었나 모르겠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스승으로서 아쉬운 일이지 않을까.
그런 서준의 생각을 알아차린 교수가 작게 웃었다.
“음악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죠. 세아가 음악을 놓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쉽지 않은 건 아니나 활짝 웃는 제자를 보면 그런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활짝 웃는 얼굴을 본 게 벌써 1년 전이었으니까.
‘그런 고민이 있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스승이라서, 부모님이라서 더 말 못 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교수가 앞을 바라보았다. 쑥스러워하는 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권세아에게 교양수업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랜덤으로 만들어진 조원이 서준이 아니었다면 지금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권세아가 어떻게 됐을지.
“정말로 고맙습니다.”
진심이 가득한 인사에 서준이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하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그렇게 시험을 끝낸 서준은 강의실을 나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교수님. 멋진 분이시네.
>권세아 : 우리 쌤이요? 우리 쌤은 언제나 최고죠!
권세아의 답장에 서준이 웃었다. 어릴 때 만났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 *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5월 초.
카페의 문이 열리고 따뜻한 바람과 함께 들어온 대학생들이 카운터에서 좋아하는 음료를 주문한 후 벨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구석진 자리에 앉은 서준과 아이들이 테이블 위에 각자 조사해 온 여행지 목록을 펼쳐놓았다.
여행지는 유럽.
박지오가 있는 스페인을 시작으로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유럽 이곳저곳을 여행할 예정이었다.
“난 여기 음식점들은 꼭 가 보고 싶어.”
친구들, 선배들, 교수님들에게까지 물어물어 유럽에 간다면 꼭 가 봐야 하는 음식점들에 대해 알아온 미나의 눈이 반짝였다. 서준과 지윤, 지후가 오호, 감탄하며 미나의 목록을 살펴보았다.
“레스토랑만 있을 줄 알았는데 작은 식당도 있네?”
“현지 식당을 빠뜨릴 수는 없지!”
별이 붙은 레스토랑부터 작은 현지 식당, 카페, 디저트 가게까지. 서준과 아이들이 유용하게 쓰고 있는 맛집 지도의 유럽 버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난 여기 가고 싶어.”
소설가 지망생, 지윤이 꺼내놓은 목록은 왠지 아이디어가 퐁퐁 떠오를 것 같은 유럽의 고성들과 작품 속 한두 번은 꼭 나오는 유명 관광지, 그리고 옛날 작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관광지였다.
“아, 서점도 가 보고 싶어. 그리고 뮤지컬이나 연극도 볼 수 있다면 보고 싶고.”
“나랑 비슷하네.”
지윤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자신의 목록을 내밀었다.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아 오랫동안 공연해온 뮤지컬도 있었고 평가는 별로 없지만 흥미로운 내용의 신작 연극도 있었다.
“서준이라면 이렇게 갈 줄 알았어.”
“나도.”
미나와 지윤이 예상 가능했던 목록에 웃는 사이, 눈에 띄는 한 장소에 지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연주회? 연주회 가려고?”
“마침 제이슨이 유럽에서 연주회를 하던 중이라서.”
아하.
서준에게서 자주 제이슨 무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보러 갈까?”
“근데 제이슨 무어의 연주회면 이미 매진된 거 아니야?”
“초대석 있을걸. 다섯 자리면 괜찮을 거야.”
“박지오는 졸 것 같은데…….”
지후의 말에 서준과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후 넌 어디 가고 싶어?”
“난 그쪽 대학들 구경하려고. 가능하다면 수업도.”
“수업?”
“어. 된다면 듣고 싶어. 그래서 일단 메일 보내보려고.”
오오.
친구들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오자 지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1학년이라서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것 말고는 그냥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볼 생각이야.”
“지후랑 지오는 생김새 빼면 닮은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추진력이 닮았나 봐.”
“그러게.”
미나와 지윤의 이야기에 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박지오랑 닮았다니.
“차라리 서준이를 닮았다고 해.”
“서준이?”
나?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던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서준을 보며 작게 웃은 지후가 말을 이었다. 유리잔 안에 든 얼음이 지후가 휘젓는 빨대에 달그락거렸다.
“원래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거든. 그냥 박지오 사는 것 좀 보고 유명 관광지만 구경하다 올 생각이었는데, 대학이 눈에 들어온 거야.”
유명한 외국 대학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사람들의 모습이 지후의 눈에 들어왔다. 문득 외국 대학에선 어떤 수업을 듣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궁금해졌다.
“그냥 좀 궁금하네, 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서준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서준과 지윤, 미나가 눈을 끔벅였다.
서준이라면…….
“그쪽에서 거절하더라도 일단 물어볼 것 같았지.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수업을 청강해 보고 싶다고.”
승낙하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거절한다고 해도, 메일 한 번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빙그레 웃는 지후의 모습에 지윤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도 한번 보내볼까?”
외국의 문학 수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은 지윤도 했었다. 언어가 달라서 전부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수업의 분위기만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외국 연기 수업이라…….”
“요리 학교도 되려나?”
서준과 미나도 혹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알아보기 시작했다.
* * *
“……여행이라며?”
미묘해진 안다호의 표정에 서준이 하하 웃었다.
“답장이 안 오면 그냥 여행이나 하려구요.”
“답장이 오면 수업을 듣고?”
“네.”
즐거워 보이는 서준의 모습에 안다호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유럽 간 김에 뽕을 뽑겠다는 건가?’
새벽같이 일어나 관광을 시작하는 한국인답다면 답달까. 근데 그게 왜 수업으로 이어지는 건지…… 유유상종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근데 지후는 안 될 확률이 높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의대니까.”
게다가 이제 겨우 1학년 1학기가 지났다. 새하얀 백지상태의 박지후가 외국 의대 수업을 청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아예 메일을 안 읽을 확률이 제일 높지만요.”
스팸으로 취급될 확률이 높아서 서준과 아이들은 다른 쪽도 찾아보고 있었다.
“일반인도 청강할 수 있는 수업 쪽을 찾고 있어요. 어느 정도 수업료도 생각하고 있고요.”
꼭 대학 수업이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이것저것 찾아보니 다양한 단체나 협회에서 선보이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일주일의 짧은 수업부터 한 달이 걸리는 수업까지 있어, 여행도 만끽하면서 수업도 듣고 싶은 미나와 지윤은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미나는 유학도 생각하고 있어서 더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근데 연기 수업은 별로 없더라고요.”
아쉬워하는 서준에 안다호가 작게 웃었다. 글쓰기와 요리에 비해 연기 수업을 원하는 사람들은 드물기 때문일 터였다.
“예정대로 스페인부터 출발하는 거야?”
“네.”
“그럼 경호를 어떻게 한다…….”
자주 드나드는 미국이야 체계가 갖춰져 있어 괜찮았지만, 유럽 쪽은 여행 이외에는 간 적이 없어 하나부터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아이들끼리만 가는 여행이라, 안다호도 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지오 에이전시 연락처가 어떻게 돼?”
역시.
현지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편이 가장 좋았다.
* * *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로 한 6월 말이 되었다.
아이들끼리 떠나는 유럽여행에 걱정된 부모님들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공항이 북적북적했다.
“우리 오랜만에 모였는데 다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여기가 좋던데, 어때?”
아이들의 나이만큼 우정을 쌓아온 부모님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배웅 나온 거 아닌 것 같지?”
“응.”
“그러게.”
지오 갖다주라며 부모님이 바리바리 싸주신 캐리어를 끌던 지후의 말에 서준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호호 즐거운 표정이 아들딸 배웅은 핑계인 듯했다.
“그럼 이제 슬슬 들어가자.”
“그래.”
아이들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티켓와 여권을 확인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작은 짐을 위쪽 짐칸에 올려두고 각자 자리에 앉았다. 좌석이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몇 시간 걸린다고 했어?”
“13시간쯤.”
“와……”
서준의 말에 아이들이 질린 얼굴로 안전벨트를 맸다. 벌써부터 몸이 뻐근한 것 같았다.
“13시간이나 어떻게 앉아 있지?”
“금방 지나갈걸.”
그리고 13시간이 지나갔다.
* * *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제공항.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공항 안, 마침 비행기가 도착했는지 게이트로 입국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듯 밝은 표정으로 캐리어를 하나둘 끌고 나오는 가운데, 아직 어려 보이는 학생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사육당한 느낌이야.”
“그러게.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자고.”
서준과 아이들은 13시간 동안 앉아 있어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풀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오가 마중 나오기로 했지?”
“어. 그렇긴 한데 걔가 제시간에 나왔을 것 같지는 않은데…….”
쌍둥이인 죄로 매번 지오를 챙기고 다녔던 지후의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게이트 앞은 마중 나온 사람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한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저쪽도 서준과 아이들을 발견한 모양인지 번쩍 손을 들고 흔들었다.
“지오다.”
“별일이네. 아, 태주 형이 있었구나.”
지후의 말에 서준과 아이들의 시선이 지오의 옆으로 향했다. 모자를 쓴 박지오의 에이전트, 김태주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마 오늘 운전을 맡은 모양이었다.
일행을 발견한 서준과 아이들이 캐리어를 끌고 지오와 김태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오야. 과자 사 왔……!”
바르셀로나 한인마트에는 새로 나온 과자가 없다며, 징징대던 지오에게 주려고 사 온 한국 과자가 든 종이가방을 내밀던 지윤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지윤이 놓친 종이가방이 털썩, 하고 바닥에 부딪혔다. 서준과 지후, 미나도 한곳에 시선이 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너 다쳤어?!”
놀라는 친구들의 모습에 오른쪽 발에 붕대를 감은 박지오가 헤헤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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