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08화
“……우리 얼마 전에 시험 치지 않았어?”
박시영이 넋이 나간 얼굴로 교재를 팔랑팔랑 넘겼다. 스터디 카페에 모인 다른 아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 유지되던 집중력이 순식간에 흐트러진 것 같았다.
“그건 중간고사. 이건 기말고사.”
“벌써 기말고사라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 6월 셋째 주. 다음 주면 기말고사였다.
“고등학교 때랑 비슷할 텐데…… 진짜 느낌이 다르다.”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10분만 쉬었다 할까?”
“그래!”
아예 10분 정도 쉬었다 하기로 하자, 시든 풀잎처럼 시들시들하던 아이들이 생기를 되찾은 듯 파릇파릇해졌다. 원래 시험 기간 중 딴짓을 할 때가 가장 신나고 생기 넘치는 거다.
“너흰 여름방학 때 뭐 할 거야?”
다음 주 기말고사가 끝나면 곧바로 여름방학이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방학을 시작하는 대학의 방식이 낯설었지만 즐겁기도 했다. 빠르면 이번 주에, 보통은 다음 주에 모든 시험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저번 중간고사 때 일주일 후로 시험이 미뤄졌던 전성민도 이번에는 다른 아이들처럼 제날짜에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오디션 보러 다니려고. 작품도 벌써 골라놨어.”
파인패드로 간식거리를 고르며 김주경이 말했다. 강재한과 한지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목표로 하는 작품과 배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한이 너도 그 역 오디션 보려고?”
“응. 대본이 좋더라.”
“하긴. 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하니까. 그래도 성인이 되니까 할 수 있는 역이 많아서 좋지 않아?”
“맞아.”
작품을 보는 눈이 비슷해 겹치는 것도 있었지만, 아역 때보다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아 만족스러웠다.
“난 과 행사 참가해. 9월 축제 때 연극 올린다더라고.”
“나는 프로젝트팀을 찾아보려고.”
과대를 노리는 양주희는 연기과 활동에 집중하기로 했고 전성민은 프로젝트팀을 찾는 중이었다.
“근데 프로젝트팀들은 꽤 있는데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는 건 어렵더라. 7월까지 못 찾으면 나도 그냥 오디션 보려고.”
전성민의 말에 양주희가 눈을 반짝였다.
“성민아. 프로젝트팀 못 찾으면 같이 연극 하지 않을래? 자리는 많이 남아 있어.”
“음. 그럴까?”
“너희도 언제든지, 시간 나면 연락해!”
양주희의 말에 서준과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난 저번 주에 오디션 붙어서 여름 방학 동안은 공연 준비해.”
박시영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오! 언제 공연해?”
“10월에. 초대권 나오면 줄게. 시간 나면 와서 봐줘.”
“시간 나면이라니. 꼭 가서 봐야지.”
서준의 말에 아이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과 아이들은 박시영이 출연하는 연극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국 연극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처음 올리는 연극이라 인터넷에서도 기대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었다.
친구들의 여름방학 스케줄을 듣고 있던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계절학기 듣는 사람은 없네?”
“……그걸 누가 듣겠어.”
친구들이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중에 졸업 학점이 부족해질 것 같으면 몰라도 1학년이 되고 처음 맞이하는 여름방학이잖아.”
“행복한 여름방학에도 학교에 오고 싶진 않아.”
“서준이 너 계절학기 들으려고?”
“아니. 나도 여름방학까지 학교 오는 건 싫어.”
서준의 단호한 말에 친구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서준이 넌 여름방학 때 뭐 해?”
“오디션 보는 거 아니야?”
“서준이라면 오디션이 아니라 촬영을 하겠지.”
그건 그래.
양주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난 여행 갈 예정이야.”
“여행?”
촬영이 아니라? 눈을 끔벅이던 아이들 중 김주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서준이 넌 학생 때도 촬영이 없을 때는 해외여행 자주 갔었지.”
“그러다가 다큐도 찍고.”
[지금 우리는/바다에 있다]를 떠올린 아이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미국에 가는 거야?”
미국 하면 할리우드, 할리우드 하면 스타.
서준 덕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마음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배우들을 떠올린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아니.”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스페인.”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축구 보러 가.”
오……!
한창 스포츠난을 들썩이게 만드는 축구선수를 떠올린 아이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 * *
>안다호 : 여기도 후보 중 하나야.
>안다호 : (사진)(사진)(사진)(사진)
시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호 형에게서 메시지가 쏟아졌다. 지금 있는 건물보다 높고 큰 건물들의 사진도 함께. 벌써 신사옥 후보들을 고른 모양이었다.
“아니, 벌써가 아닌가?”
3월에 의논한 건 다호 형에 대한 것이었으니, 신사옥은 그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언제고 옮겨야 했으니까 말이다.
>안다호 : 서준이 넌 어떤 게 마음에 들어?
서준이 작게 웃었다.
<형이랑 삼촌 의견에 따를게요. 저보다 회사에 오래 있잖아요.
아무래도 가끔 들르는 자신보다는 회사에서 오래 지내는 안다호나 서은찬의 의견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의견도.
>안다호 : ……우리도 결정을 못 내려서 그래.
>안다호 : 다 장단점이 있어서 말이야.
>안다호 : 몇 군데는 외부 리모델링도 해야 해서 사장님도 엄청 고민 중이셔.
한번 옮기고 나면 꽤 오래 있을 곳이니만큼 신중을 기하는 모양이었다.
안다호가 보내준 건물 내외부 사진들을 보며 서준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래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매주 세 번 이상 음악방송에 나가야 하는 가수팀은 삼사 방송국과 가까운 곳을 원할 테고, 이곳저곳 촬영장을 옮겨 다녀야 하는 배우팀은 교통이 편리한 곳을 원할 터였다. 그 외의 직원들에게는 집하고 가까운 곳이 최고일 테고 말이다.
‘나야 집에 연습실이 있으니 조금 멀어도 상관없지만.’
곰곰이 생각하던 서준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그거 회사 건물도 적용되려나?”
서준의 가족이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올 때 사용했던 능력, [(선/제작)점쟁이 새의 쪽지].
그 능력 덕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사 온 이후로 지금까지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문제도 없고 이웃들도 다 좋고.’
근데 능력의 안내창에 ‘집’이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회사에도 적용이 될지는 모르겠다.
‘안 되면 비슷한 상위 능력을 찾아보자.’
[(선/제작)점쟁이 새의 쪽지]가 중하급이니 중급이나 중상급의 능력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삶의 책에 대해 생각하니 저절로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떠올랐다. 안다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지금 읽고 있는 최상급의 책.
‘근데 너무 많아.’
황금 인어, 파르비타의 삶.
3월, 최상급 도서관의 문이 열리면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4개월 정도 지난 지금 반밖에 못 읽었다.
물론 중간중간 다른 책들을 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책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파르비타의 삶은 반이 음식에 관한 이야기라 읽고 있으면 저절로 배가 고파져 입맛을 다시게 된다. 꿈속인데, 생의 도서관인데 말이다.
‘나머지 반은 상업 이야기라서……경제 관련 책을 읽는 느낌이지.’
자신의 앞순서 권세아의 시험이 끝나길 기다리며 서준은 파르비타의 삶을 떠올렸다.
* * *
황금 인어, 파르비타.
황금빛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인어의 나라 세뮤다리의 둘째 왕자.
서준이 연기를 삶의 낙으로 삼은 것처럼, 파르비타는 음식을 삶의 낙으로 삼았다.
꽁꽁 얼어붙은 북쪽 바다부터 부글부글 용암이 끓는 것처럼 뜨거운 남쪽 바다, 생명체는 살 수 없는 죽음의 서쪽 바다, 무시무시한 소용돌이로 가득한 동쪽 바다까지.
인어족의 꼬리가 닿을 수 있는 바다란 바다는 모두 뒤져, 직접 찾아온 희귀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들을 먹으며 인생을 즐기던 파르비타.
그 엄청난 모험(이라고 쓰고 가출이라고 읽는다)들이 삶의 책에 가득했다. 목숨이 위험했던 건 부지기수였고, 자신 말고 다른 인어들은 위험하다며 기사들 몰래 가출하던 것도 일상이었다.
‘너 왕자잖아…….’
그것도 첫째 왕자가 죽으면 바로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하는 계승권자.
“파르비타아!!”
쩌렁쩌렁 왕궁을 울리는, 아들을 찾는 왕의 목소리도 항상 있는 일이었다.
왕국으로서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 모험의 주체자가 둘째 왕자이며 그 목적이 음식이라는 사실에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험 같은 가출을 계속하던 어느 날.
파르비타는 자신이 바다에서 먹을 수 있는 모든 음식을 먹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럼 육지로 가야지!”
“파르비타!?”
“왕자님?!”
“형! 미쳤어!?”
해적이나 인간들에게 붙잡힌 인어들을 빼면(바다를 나가기 전에 구조하거나 타 종족에게 부탁하여 구조한다), 지금까지 인어족이 육지로 올라간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인어족에게는 땅을 딛고 설 다리가 없…….
“짜잔!”
“……왜 형한테 다리가 있어!?”
“아버지!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궁의!!”
꼬리가 다리로 변한 파르비타의 모습에 나라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생의 도서관의 능력이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냐며 멱살을 잡는 첫째 왕자에게 죽음의 서쪽 바다에서 만난 마법사(거짓말이다)에게 받은 아티팩트로 변한 거라고 둘러댄 파르비타는 여차저차해서 대륙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파르비타 님. 진짜 가시려고요?”
수면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파르비타의 호위기사(소꿉친구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엉거주춤 서서 타 종족을 통해 구한 바지를 입던 파르비타가 씨익 웃었다.
“왜? 걱정돼?”
“네. 육지가요. 육지 생명체들하고요.”
“……”
“나중에 왕국에 쳐들어오게만 하지 마세요. 사고 치면 인어 아니라고 해요. 왜 상체는 못 바꾸는 거예요. 지느러미는 그대로 보이게. 음. 새로운 종족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목도리 도마뱀족? 하여튼 인어는 아니라고 하세요.”
“……”
“그리고 이종족은 먹으면 안 돼요.”
“……야!”
두 배로 늘린 호위 인원 탓에 차출된 첫째 왕자의 호위기사들이 소꿉친구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둘째 왕자님이랑 계속 붙어 있으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파르비타가 외쳤다.
“방법을 찾으면 네 다리를 제일 먼저 만들 테다! 넌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영원히 내 부하니까!”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외친 소꿉친구가 ‘드디어 자유다!’ 하고 만세를 하며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몇 페이지 뒤.
중급 생의 도서관의 문을 연 파르비타가 소꿉친구를 데리고 육지로 올라왔다.
역사에 남을 추격전 끝에 잡힌 소꿉친구는 거의 반쯤 마른 생선 같은 얼굴로 새로 생긴 자신의 두 다리를 바라보았다. 어색하다. 낯설다.
“……마법사한테 받은 아티팩트가 또 있었어요? 그거 하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크흠.”
“! 거짓말일 줄 알았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저 인어로 돌아갈 수 있긴 한 거예요!?”
“자아! 친구! 이제부터 모험을 떠나보자고!”
“야! 파르비타! 내 꼬리 내놔!”
음식에 관련해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파르비타는, 언제나 그렇듯 펄펄 날뛰다가 체념한 소꿉친구를 데리고 바닷가 근처 인간 마을을 둘러본 후, 금세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다.
시장 근처 골목길에 로브를 뒤짚어쓰고 나란히 앉은 두 인어가 조용히 속닥거렸다.
“돈이 필요해.”
음식을 먹기 위해서도,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도, 모험을 떠나기 위해 무기를 사기 위해서도, 잠을 청할 집을 구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하긴 지금까지는 왕궁에서 다 준비해줬죠.”
세뮤다리에서의 파르비타는 누구보다 귀한 왕자였지만 육지에서의 파르비타는 그저 이종족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육지에서 영향력이 아예 없는 인어족이라 더욱 무시당할 게 분명했다.
“상단을 세우자. 이름은 황금 인어 상단!”
세상에 있는 모든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파르비타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파르비타와 소꿉친구의 실력이라면 몬스터 사냥으로도 큰돈을 벌 수도 있었고 왕궁에서 들고 올 수도 있었지만, 대륙 전체로 영향력을 뻗어 나가서 온갖 희귀한 재료를 모으기에는 상단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뭐, 대륙 정복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소꿉친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파르비타를 도왔다.
“근데 인어는 빼죠.”
인어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한 소꿉친구였지만, 파르비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건 여전했다. 그 영향이 육지를 넘어 바닷속 세뮤다리까지 끼친다면 큰일이었다.
왕자님을 제대로 서포터하지 않았다고 부모님께도 한 소리 들을 테고 호위기사 자리에서도 잘릴 수 있었……아니, 그건 좋은 거 아닌가?
소꿉친구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안돼. 내가 인어족 왕자인데, 꼭 들어가야지.”
“네! 그렇네요! 자랑스러운 인어족인데 인어를 뺄 수는 없죠!”
“……너 왜 그래?”
“네? 뭐가요?”
파르비타의 의심 어린 눈빛에 소꿉친구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밝은 얼굴은 처음 보는데…… 아, 배고프다. 느껴지는 배고픔에 파르비타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얘가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지, 뭐. 도망치면 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야. 일단 밥부터 먹자. 나 배고파. 그다음에 사고팔 물건 알아보자.”
“옙! 왕궁에서 알아온 육지 정보도 검토해 보죠!”
로브를 쓴 두 인어가 골몰길을 나와 인간들로 가득한 거리로 조금 어색하게 발을 내디뎠다.
훗날, 대륙 전체를 살 수 있는 재력을 가졌다는 황금 인어 상단의 시작이었다.
* * *
그 황금 인어 상단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공급이니 수요니, 계약이니 뭐니,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바람에 마치 경제 서적을 읽는 것 같았다.
“재미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분량만큼 읽어야 할 책들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가볍게 한숨을 쉰 서준이 열리는 문에 고개를 들었다. 서준의 바로 앞 순서였던 권세아가 활짝 웃으며 강의실을 나오고 있었다.
“오빠 차례예요.”
“그래.”
권세아가 잘하라며 화이팅하자 서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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