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07화
길어지는 서준의 고민 속에 권세아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단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어요?”
“으음. 그래. 없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서준에 권세아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요? 단 한 번도요? 연습이 힘들거나 잘 안될 때 다른 일을 해볼까, 하고 아주 잠깐 생각한 적도 없어요?”
서준은 기억을 더듬어갔다.
‘연습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아.’
[쉐도우맨2] 촬영 전, 아직 악의 도서관이 열리지 않았을 때. 마기를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만족할 만한 악역 연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작품을 찍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곧바로 악의 도서관이 열려서 다행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싶었다. 다른 작품들을 촬영하면서 악의 도서관을 여는 것 이외의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선기를 열심히 단련해서 완벽하게 감춘다거나.’
어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대로 안 되는 상황에 초조했는지, 씩씩 성을 내고 그런 다짐을 해버린 꼬마 서준이었다. 그때야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분명히 악의 도서관이 열리지 않았더라도 촬영이 너무 하고 싶어서 그 다짐은 흐지부지되었을 것 같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서준이 속으로 웃고는 입을 열었다.
“연기 공부를 위해서 잠시 작품 활동을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다른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네.”
“세상에…….”
서준의 대답에 권세아가 입을 쩌억 벌렸다.
“진짜 뼛속까지 배우네요. 오빠는.”
“하하.”
칭찬을 들은 듯 기쁘게 웃는 서준을 보던 권세아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제 고민은 이해하기 힘들겠어요.”
권세아도 1년 전까지는 서준처럼 오직 바이올린만 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부모님한테 가볍게 말해본 적이 있어요. 만약에 내가 다른 걸 하고 싶다고 하면 어떨 것 같냐고요.”
한숨처럼 권세아가 말했다. 이왕 이야기를 내뱉은 김에 조언은 듣지 못해도 다 풀어놓고 싶었다.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이발사처럼.
“부모님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리를 잡은 후에 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 자리라는 게 어디까지일까요? 콩쿠르 우승? 아니면 단독 연주회? 유명 오케스트라와의 합주?”
몇 살이 되어서야 꿈꾸던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울컥한 마음에 저절로 음악감독에 대해서 찾아보게 된다. 그런데 막상 무언가를 시도해 보려고 하면 겁이 났다.
“무섭기도 해요. 새로운 길로 갔다가 실패할까 봐요.”
실패.
이것저것 도전해 볼 나이인 16살에게는 이른 단어이지만, 벌써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던 권세아에게는 살갗에 와닿는 단어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걱정이에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부모님이었다.
권세아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지해 준 엄마 아빠.
“바이올린이며 레슨비며 많은 돈을 쓰고 시간도 저를 위해 쓰셨는데…… 다른 걸 하고 싶다고 하면 실망하실 테니까요.”
어쩌면 못하게 막을 수도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언성이 오고 갈 수도 있었다. 평화로운 가정이, 우리 집이 그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게 권세아는 무서웠다.
“그리고 교수님들에게도 죄송하고 기사도 걱정되고…… 막 어렸을 때는 천재였다가 크면서 평범해진 사람들도 많잖아요.”
쓰러져가는 천재들에게 향하는 걱정과 비아냥이 담긴 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만약 음악감독의 길로 향하다가 실패해 버리면 쏟아질 그런 말들과 관심에 권세아는 덜컥 겁이 들었다.
“……그런 게 걱정이 되는데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항상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생각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정말…… 어쩌면 좋을까요?”
앞으로의 삶과 진로에 대해 고민과 걱정이 가득한 권세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준은 생각했다.
‘이런 모습이 보통이겠지.’
아무래도 권세아와 서준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람들과 서준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음 생이 있으니까.’
다음 생이 있기 때문에 지금 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하면 되고, 다음 생이 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지금 생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 꽂힌 많은 책들 중에 겨우 한 권일 뿐이니까.’
인간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겨우 몇 시간, 겨우 몇 분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하나의 삶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준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심각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생각하기엔…….’
오크 무리에서 추방당한 미식가 오크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내쫓기거나 제 발로 나온 적이 많아서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보면 이번 생은 운이 좋아.’
엄마 아빠가 배우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만약에 엄마 아빠가 배우가 되는 걸 반대했다면…….’
진지한 얼굴로 반대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다.
‘미성년자는 인간 사회에서 힘이 없으니까 성인이 될 때까지는 참았겠지만…….’
그 이후는…… 으음.
극단적으로 향하는 상상에 침음성을 삼킨 서준은 권세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많은 생을 살아본 서준으로서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미련이라는 건 본인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깊게 남아 언제고 다시 떠오르니까 말이다.
‘첫 생의 꿈을 지금 이루고 있는 것처럼.’
지금은 ‘내 꿈’이지만.
어깨를 으쓱인 서준이 입을 열었다.
“드라마나 영화는 말이야.”
“네?”
갑자기요? 의아해하는 권세아의 모습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의 이야기거든. 아주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온갖 사람들이 나와.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을 겪게 되고 그 상황에서 다양한 선택이 나오지. 작품 중에는 세아 너 같은 고민을 하는 캐릭터들이 꽤 있어.”
“근데 그건 영화잖아요.”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간접 경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현실은 영화보다 더 하다잖아.”
그건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권세아의 모습에 작게 웃은 서준이 말을 이었다.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작품들을 읽어보거든. 거기에는 세아 너처럼 미래를 가지고 고민하는 캐릭터도 있고 나처럼 미래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캐릭터도 있어.”
권세아의 눈이 반짝였다.
“어떻게 됐는데요? 그 캐릭터들은?”
“다 실패하지.”
“……네?”
“아님 성공하거나.”
“……네?”
이해할 수 없는 서준의 말에 권세아는 눈만 깜빡였다.
“일단 나처럼 미래에 대해 고민이 없는 캐릭터들은 사고를 당해.”
“갑자기요?”
“영화잖아. 사건 사고를 만들어줘야지.”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사고를 당하고 나서부터 이야기가 진행돼. 사고를 극복하는 캐릭터가 있고 극복하지 못하는 캐릭터가 있지. 극복하지 못한 캐릭터는 계속 한자리에 머물러 있겠지만, 사고를 극복한 캐릭터는 사고를 이겨내고 꿈을 계속 이어나가거나 새로운 꿈을 찾지.”
서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준은 지금 영화에 빗대어 전생의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미식가 오크처럼 하고 싶은 대로 살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삶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너처럼 여러 갈래 길에서 고민하는 캐릭터들은 어떤 길을 가도 후회를 해. 꿈을 찾아갔던 캐릭터는 현실에 벽에 부딪혀 잘하던 것을 계속 할 걸 그랬다며 후회를 하고, 잘하던 것을 찾아갔던 캐릭터는 꿈에 미련이 남아 후회를 하지.”
어쩐지 권세아는 서준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는 한다는 거네요.”
“그래. 어떤 선택이든 후회는 생기니까 결정은 너 스스로 내려야 한다는 거야. 최대한 덜 후회하게, 널 첫번째로 생각해서 말이야.”
서준이 말을 이었다.
“미래에…… 아니, 바로 몇 시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많이 살아봤는데, 죽음은 뜬금없이 찾아오고는 했다.
언제나 같은 하루. 누군가가 던진 돌에 맞아 죽기도 했고 독초를 먹어서 죽기도 했고 발을 잘못 디뎌서 죽기도 했고 지나가던 드래곤한테 밟혀서 죽기도 했다.
그래서 서준은, 서준의 전생들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다.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다친다면 후회하지 않을까? 시도라도 해볼걸, 하고. 나라면 죽기 전까지 후회할 것 같아.”
‘죽어서도 후회하겠지.’
경험자 서준의 말에 권세아는 생각에 잠겼다.
미래를 안다면 과감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텐데. 사람의 미래는 너무나도 불확실했다.
“서준 오빠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지. 이 정도로 고민하는 거 보면 너도 엄청 하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이제 겨우 16살이니까 20살 때까지는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
박자를 맞추는 메트로놈처럼 권세아의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서준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조금 줄었지만, 그렇다고 단번에 바이올린을 놓아버리기에는 너무 무서웠다.
바이올린은, 제 전부였으니까.
“정 안 되면 병행해야지. 작곡하고 바이올린하고.”
그런 권세아를 보며 서준은 ‘보통 사람’에게 맞는 조언을 해주었다.
만약 자신의 일이었다면 다른 건 다 관두고 꿈에만 매달렸겠지만, 권세아는 한 번 사는 삶이었고 평생 해나갈 일을 결정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런 서준의 말에 권세아가 얼른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건 못해요. 둘 다 엄청 힘들 텐데…….”
“안 해봤잖아.”
“안 해봐도 알아요. 분명히 둘 다 하다가는 둘 다 망할걸요.”
확신하는 권세아의 말에 서준이 쓰게 웃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
“……급하게요?”
권세아가 눈을 끔벅였다.
“작년에 꿈을 찾아서,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던 바이올린이 사실은 네 꿈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초조해진 건 알겠어.”
정곡을 찔린 듯, 권세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야 하는 바이올린처럼 작곡도, 음악감독도 일찌감치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지?”
서준의 말에 권세아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꿈을 찾고 나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한참이나 뒤처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잘못된 것 같고, 돌아가려고 하니 그 길이 너무 먼 것 같았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아. 아니, 빠른 거야. 나이가 들어서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는걸.”
뒤늦게 꿈을 찾아가는 어른들도 있었다. 꿈을 포기하기엔 권세아는 너무 어렸다.
“너무 안 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시도를 해봐. 바이올린과 작곡을 병행하다 보면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거야. 어느 쪽이 더 끌리는지.”
“그거야 작곡이겠죠.”
권세아의 말에 서준이 웃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나도 몇 번 본 적 있는데, 음악감독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상상했던 거랑은 다를걸?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관계자가 그렇게 말하니 권세아가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일단 작은 거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 짧은 영상에 네가 작곡한 곡을 삽입하는 것부터 말이야. 그리고 바이올린 활동도 하면서 살펴보는 거지. 병행할 시간은 있는지, 체력은 충분한지 말이야.”
“으음.”
“그러다가 이 정도는 할 만하다 싶으면 조금 긴 영상을 맡아보고 그다음에는 단편 영화나 독립 영화의 음악을 맡아보는 거야. 우리 학교에서도 영화 많이 만들잖아. 그쯤 되면 너도 결정할 수 있을 거야. 완전히 음악감독으로 진로를 잡을 건지, 아니면 벤자민 교수님처럼 때때로 작업 의뢰만 받을 건지.”
생각에 잠겼던 권세아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네! 그렇게 해볼게요.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민으로 어지럽던 권세아의 두 눈동자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저 열기가 권세아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일 터였다.
“상담 고마워요. 서준 오빠.”
밝아진 권세아의 얼굴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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