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05화
다음 날.
금요일 오전 수업 [연기 입문]을 끝내고 서준과 친구들은 학생식당에 모여 점심을 먹을 무렵, [바벨탑]이 끝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인터넷은 아직도 [바벨탑]과 서준의 카메오 장면에 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이거 봐봐. 지금 외국에서 바벨탑 장면으로 낚시하고 있음ㅋㅋㅋ
=(링크)
링크로 이어진 게시글은 [제목: 배우 서준 리, UN 회의에 서다]라는 제목으로 여러 개의 장면이 캡처되어 있는 글이었다.
그 아래 댓글들에는 언제 이런 연설을 했냐며, 왜 뉴스나 기사는 하나도 없냐며 물음표가 가득했다.
-왜 해외소식 전하는 코너에도 없어?
=응.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진짜 하나도 없어.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이 UN 연설 할 때는 기사도 많이 나오던데…… JUN이 외국 배우라서 그런가 :(
-UN 연설 영상은 어디서 볼 수 있어? 너튜브에도 없던데. 풀 영상 보고 싶어.
서준 리를 좋아하지만, 서준 리가 카메오로 출연하는 한국 드라마까지 찾아볼 정도는 아닌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놉! 이거 한국 드라마 장면이야! 픽션!
시차 상관없이, 서준의 카메오 분량까지 챙겨보는 외국 새싹들이 댓글을 달았지만, 그것보다 낚시글에 대한 댓글들이 더 빠르게 쌓여갔다. 또 사실을 알고도 장난스럽게 낚시글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렇게 오해와 설명으로 댓글창이 혼란스러워졌다.
-엉망진창이다ㅋㅋ진짜ㅋㅋ
-ㅋㅋ나도 엄마한테 보여줘야겠음ㅋㅋ
-난 이미 아빠한테 보냄ㅋㅋ 아빠 되게 자랑스럽다고 말하는데ㅋㅋ 드라마고요ㅋㅋ
-이렇게 대 낚시의 시대가 오고ㅋㅋ
* * *
“지윤아. 이거 봤어?”
영화과 친구가 웃으며 내미는 휴대폰에 머리를 싸매고 시놉시스를 쓰고 있던 황지윤이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 화면 속에는 혼란으로 가득 찬 영어 댓글들을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게시글이 있었다.
“이게 뭐야. 하하.”
오해와 설명으로 뒤죽박죽되어 있는 댓글들에 황지윤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두 팔을 위로 쫙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친구가 빙그레 웃었다.
“꽉 막혔을 땐 쉬었다가 하는 게 좋지.”
“고마워.”
“별말씀을. 점심 먹으러 가자.”
“그래.”
짐을 챙긴 황지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와 함께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메뉴는 항상 먹는 매콤치킨마요. 음식을 받아온 황지윤과 친구는 [바벨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연설 장면에선 이서준 배우밖에 안 보이더라. 그게 탑배우의 장악력인가?”
친구의 말에 황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약조절을 정말 잘해. 연설 장면에서는 엑스트라들에게는 시선도 안 가게 강한 존재감을 보이면서도 대기실 장면에서는 배우들을 일반인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만 연기하잖아. 상대 배역이나 장면까지 생각해서 존재감을 조절하는 거지.”
지금까지의 서준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황지윤이 말을 이었다.
“이전 작품들도 그래. 배역과 장면에 알맞은 존재감을 드러내잖아. 혼자 있을 때나 중요한 장면에서는 누구보다 강렬한 연기로 시선을 끌고, 다른 배우들과 함께 있을 때는 혼자 튀지 않게 조절하고. 그래서 탑배우인가 봐.”
친구가 동의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 탑배우 이서준.”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 친구들의 말에 서준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친구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황지윤이 있는 곳 바로 뒷자리에 서준과 친구들이 앉아 있었지만, 시끌벅적한 학생식당인 데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서 그런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서준이 일코도 한몫했을 테고.”
“얘 진짜 스파이해도 잘할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말이야.”
정체가 뭐냐는 듯한 친구들의 표정에 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 두 분은 영화과인가 보네.”
“어. 황지윤 선배님이야. 영화과 3학년.”
……주희야?
서준과 친구들이 떨리는 시선으로 양주희를 바라보았다. 전성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과 학생들도 알고 있어?”
“나라고 전부 아는 건 아니야. 황도윤 선배님 동생이셔.”
전부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 건 기분 탓일까.
왠지 한예대 모든 과에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양주희의 말에, 친구들의 시선이 테이블 건너 황지윤에게로 향했다. 서준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황도윤 선배님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현실 남매, 황지윤과 황도윤이 들었다면 펄펄 날뛰었을 터였다.
“선배님 동생이 영화과셨구나.”
“오. 나도 저 선배님 알아.”
한지호의 말에 다들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양주희야 워낙 발이 넓으니 알고 있는 사이라지만 이제 1학년인 네가 어떻게 타과 3학년 선배를 아냐는 얼굴이었다.
“그 수업 있잖아. 문학 분석.”
“영화과랑 극작과 듣는다던?”
정식 이름은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문학 분석]. 한지호가 중간고사 때 힘들어했던 수업이었다.
“엉. 그 수업에서 봤어.”
서준과 친구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한지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거 조별 과제도 아니고 다른 과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어떻게 알아? 보통 수업만 딱 듣고 나오지 않아?”
김주경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별과제가 아닌 이상, 다른 과 학생들과 함께 교양 수업을 들어도 얼굴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에 한지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친한 건 아니고 그냥 얼굴만 알고 있어.”
오.
한지호에게 핑크빛 나날이,
“강의실에서 4학년 선배랑 싸우는 거 봤거든.”
“……응?”
……싸워?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서준과 친구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서로의 표정을 보니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어…… 음…… 우리과 4학년 선배님이랑?”
과대 동생과 4학년의 싸움이라니.
냉정하게 보자면 개인적인 일이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돌아가지는 않았다.
조용히 묻는 박시영에 한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영화과 4학년이랑.”
“……아하.”
그럼 뭐. 우리랑 상관없지.
서준과 친구들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근데 왜 싸우셨대?”
서준의 물음에 모두 한지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영화과 친구한테서 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은데…….”
한지호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서준과 친구들도 몸을 숙였다.
“그 4학년이 1학년 영화 소재를 훔쳤나 봐.”
“……!”
서준과 아이들은 반응도 제대로 못 한 모습으로 굳어졌다. 심장이 차갑게 식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그 상황에 양주희 홀로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한지호가 말을 이었다.
“영화과 수업 중에 영화 시놉시스를 쓰고 발표하는 수업이 있대. 4학년이 다른 수업에서 먼저 발표하고 나니까 1학년은 뭘 할 수가 없었다더라. 그걸 황지윤 선배님이 알고 강의실에서 싸운 것 같음.”
사방이 떠들썩한데, 이 테이블에만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근데 증거가 없으니까 내 친구도 확실하게 훔친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우연히 비슷한 소재가 나왔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훔친 거 맞을걸.”
양주희의 말에 이번엔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친구들의 눈빛에 양주희가 말을 이었다.
“그 4학년 일행, 옛날부터 그랬대. 조언해 준다고 읽고 나서 소재가 괜찮다 싶으면 가져가고 줄거리 괜찮다 싶으면 자기들이 쓰고.”
강재한이 입을 벙긋벙긋 거리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어디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문제래. 법적으로 대처하기에는 둘러댈 변명이 많은 거야. 예전부터 생각한 소재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문제가 될 정도로 완전히 베끼지는 않는대.”
“쓸데없이 철저하네.”
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양주희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데뷔한 영화감독들 사이에서도 해결하기 힘든 일인데 학생들은 얼마나 어렵겠어. 정식 작품도 아니고 겨우 대학 과제인데…… 그냥 똥 밟았다 하고 지나가는 거지.”
전성민이 입을 열었다.
“그럼 1, 2학년한테 가르쳐 주면 안 되는 건가? 저 선배들 질 안 좋다고.”
“대놓고 떠들면 문제가 되니까 알음알음 소문이 났기는 한데…….”
양주희가 쓰게 웃었다.
“그 4학년들이 실력은 꽤 좋아서 대외 활동으로 좀 알려졌거든. 물론 프로랑 비교하면 아직 멀었지만 1, 2학년들이 보기에는 잘나가는 것처럼 보인대. 이런저런 수상 경력을 보여주면 혹하는 거지.”
설마 그러겠어, 하는 마음이 방심을 만들어낸다.
영화과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보다 심각한 이야기에 한지호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친구한테 말해줘야겠다. 걘 지금 긴가민가하던데…… 뭐라더라? 그 4학년이 친구한테 그랬대. 자기가 먼저 감독이 되면 조연출로 친구를 써서 데뷔할 때까지 돕겠다고. 좋은 소재 있으면 자기가 쓰는 게 더 빨리 데뷔하지 않겠냐고.”
욕이 저절로 나오는 변명이었다.
그리고 그게 또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잘 생각해 보면 인맥이나 학연 같은 거니까.’
하지만 저 말을 정말 지킨다면 몰라도, 단물만 쏙 빼먹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양주희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4학년들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선배라고 군기를 잡는 사람들도 꽤 있다더라. 자기 작품 촬영할 때 스태프로 이리저리 부려먹고 심부름시키고 그런대. 공짜로.”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우리 과 선배님들이 되게 좋아서 다른 곳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김주경의 말에 서준과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양주희가 말했다.
“우리 과에도 있었어.”
“……응?”
“자기가 유명한 감독님 잘 안다고 작품에 꽂아줄 거라는 사람도 있었고, 후배 배역 뺏는 사람도 있었대. 후배 작품에 끼어들어 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랬어?”
아이들의 시선이 저절로 서준에게 향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당연히 서준을 만나러 왔을 터였다. 서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사람 만난 적 없어.”
‘……예상은 가지만.’
능력에 당해 빙글빙글 헤매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양주희가 웃으며 설명했다.
“그 이외에도 군기 잡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젠 몇 명 없대. 황도윤 선배님이랑 학생회 선배님들이 뒤집어엎었다더라. 지금 연기과 분위기 좋은 것도 다 선배님들 덕분이래.”
생각지도 못한 연기과의 역사에 서준과 아이들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아. 선배님들 엄청 대단하시다!”
“그러게.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선배님들 완전 멋짐.”
“우리만 알고 있기에는 아까우니까 다른 애들한테도 가르쳐 주자.”
“오! 그럴까?”
과대 황도윤과 학생회 임원들이 봤다면 쑥스러워하면서도 미소를 지었을, 열렬한 반응이었다.
* * *
점심을 먹은 서준이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C관으로 향했다. C관은 1인실부터 오케스트라 연습이 가능한 대형 연습실까지 있는 음악과 전용 건물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조별 연습을 시작하겠습니다.”
2시간의 수업시간 중 1시간은 교수에게 수업을 듣고 1시간은 조별로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교수의 말에 두 명씩 각자의 연습실로 흩어졌다. 한 달 동안 제법 친해진 서준과 권세아도 배정된 연습실로 향했다.
“그럼 제가 먼저 할게요.”
“그래.”
권세아가 바이올린에 턱을 괴고 연주를 시작했다.
서준은 그 연주를 들으며 한 달 동안 변화한 선율을 머릿속으로 짚어나갔다. 서준과 교수가 짚어준 부족한 점들을 잘 보완하고 점점 발전하는 권세아의 모습이 보였다.
‘슬럼프라기엔 너무 잘하는데…….’
오른손에 쥔 펜이 빙글빙글 돌았다. 생각해 보면 권세아는 입학식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했었다. 그러면 사람들 앞에서 서는 것도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왜 연주회나 콩쿠르에 나가지 않지?’
처음부터 흥미가 없었다면 몰라도 커리어를 잘 쌓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지금까지 아무런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권세아를 보던 서준은 문득 점심때 친구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배 탓인가?’
대학에 들어오면서 바뀌게 된 권세아.
선배 아니면 후배와의 인간관계도 원인이 될 수 있었다.
권세아의 연주가 끝나자 서준이 짝짝 박수를 쳤다. 권세아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서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괜찮아요. 뭐든지 물어보세요!”
씩씩한 권세아의 모습에 작게 웃은 서준이 물었다.
“세아 넌 왜 연주회나 콩쿠르에는 안 나가는 거야?”
권세아가 깜짝 놀라 서준을 바라보았다.
너무 직접적으로 물었나 싶어, 서준은 얼른 말을 이었다.
“아, 말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그냥 고민이라도 있나 싶어서. 나한테 말하기 힘들면 다른 사람들한테라도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서준의 말에 권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먼저 물어보셔서 놀란 거예요. 꼭 들어주셨으면 해요.”
마침 잘됐다는 듯, 조금 기뻐하며 말하는 권세아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한테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서준이 눈을 데굴 굴렸다. 어떤 일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서준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두 손을 꼼지락거리던 권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결심한 듯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영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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