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500화
1시간 30분 전.
[바벨탑] 촬영장.
“오늘 촬영 끝났습니다! 철수 준비해 주세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신지혜 피디, 카메라 감독과 쑥덕쑥덕 대던 조연출의 외침에 엑스트라들과 스태프들이 눈을 끔벅였다.
다음 테이크를 찍으려고 각자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촬영이 끝났단다.
“……진짜 끝난 거 맞아요?”
“맞아. 카메라 정리하자.”
카메라 감독이 그렇다니, 머뭇거리면서도 촬영장 여기저기에 설치된 카메라를 하나둘씩 정리하는 촬영팀이었다.
조명팀도, 미술팀도 감독들이 철수 지시를 내리니 어리둥절한 얼굴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로 이렇게 끝났다고?”
“아…… 준 더 오래 보고 싶었는데…….”
스태프들이 정리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엑스트라들도 깨달았다.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촬영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조연출이 엑스트라들을 담당하고 있는 반장에게로 향하고, 신지혜 피디는 배우들에게로 향했다.
배우들은 이미 한 번에 끝난 (물론 클로즈업샷, 바스트샷을 따로 찍긴 했다) 촬영을 기억하고 있어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였는지, 밝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근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요?”
“감독님도 고생하셨어요. 같이 저녁 먹자고 서준이 꼬시던 중이었어요.”
배우들의 이야기에 반색하며 국장에게서 받아온 카드를 꺼내려던 신지혜 피디는 이어지는 서준의 말에 멈칫했다.
“죄송해요. 약속이 있어서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아요.”
“그래? 아쉽네.”
배우들도 신지혜 피디도 아쉬운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종방연엔 꼭 참석할게요. 날짜 정해지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
서준의 말에 신지혜 피디와 배우들이 활짝 웃었다.
“뭐 좋아하는 음식 있어?”
“말만 해요. 제가 제일 비싸고 맛있는 가게로 준비할게요.”
권강민의 물음에 신지혜 피디도 얼른 말을 덧붙였다.
SBC를 털어올 것 같은 눈빛이라 서준이 웃고 말았다.
“저만 좋아하면 되나요. 다른 분들도 맛있게 드셔야죠.”
종방연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던 서준이 시계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요. 오늘 촬영 정말 멋졌어요!”
“서준아. 잘 가!”
신지혜 피디와 배우들, 스태프들에게 인사한 서준이 얼른 걸음을 옮겼다.
안다호가 그 옆을 쫓았다.
“다호 형. 옷…….”
“대기실에 준비해 놨어. 화장 지워줄 스태프분도 대기실에 있을 거야. 미리 부탁드렸거든. 다른 짐은 다 챙겼으니까 그것만 끝내고 바로 차에 타면 돼.”
곧바로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 둔 안다호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다호 형.”
“별말씀을.”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서준이 의자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분장팀 스태프가 빠르게 서준의 화장을 지웠다.
가벼운 화장이라 금세 깔끔하게 지워졌다.
스태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서준은 안다호와 함께 대기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서준이 차에 오르고 안다호도 운전석에 앉았다.
서준이 안전벨트를 맨 것을 확인한 안다호가 시동을 걸었다.
“그럼 출발할게.”
“네!”
아직도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까.
서준은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보며 하랑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 * *
텃밭에서 아이들과 채소를 구경하고 있던 허운성이 으으윽 하는 앓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폈다.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몸을 웅크리고 ‘왜요? 왜요?’ 하고 묻는 말에 대답하느라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형아니까 더 큰 거 뽑을 거야!”
“아냐! 내 감자가 더 커!”
아이들은 누가 더 큰 감자를 캘지 대결하고 있는 터라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린다 싶을 때, 명진이가 말을 걸었다.
“선생님.”
“응?”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래. 가자.”
제작진에게 아이들을 부탁한 허운성이 명진이를 데리고 [병아리 반]으로 향했다.
부엌에서는 김자영이 마지막 저녁 식사를 위해 열심히 고기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이게 너튜브 조회수 300만 레시피……!”
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명진이 손 씻었어?”
“네에!”
“그럼 감자 캐러 가볼까?”
“아, 선생님. 당근도요!”
“네. 알겠습니다.”
김자영의 말에 허운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아달라는 명진이를 읏샤, 안고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새까맣고 커다란 차.
허운성에게도 익숙한 차였다.
‘모델은 다른 것 같지만.’
일명 연예인 차라고 불리는 밴의 등장에 허운성도, 허운성을 찍고 있던 카메라맨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게스트 와?”
“아뇨.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게다가 오늘이 마지막 촬영인데…….”
묘하게 대화에서 데자뷔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잠시 침묵에 빠져 있던 허운성과 카메라맨이 눈을 마주쳤다.
지금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카메라맨이 얼른 휴대폰을 들었다.
“강 피디님! 여기 이서준 배우가 오는 것 같아요!”
-……뭐?! 진짜?!
“아니,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엄청 비싸 보이는 밴이 오고 있습니다!”
카메라맨이 강수정 피디와 통화하는 사이에도 검은색 밴은 점점 가까워졌다.
카메라맨은 그 장면을 계속 촬영하면서도 초조해졌다.
아니, 진짜 이서준 배우면 혼자서 어떻게 찍으라고.
“무슨 일이에요?”
“서준 쌤이 오고 있는 것 같은데?”
부엌에 있던 김자영이 허운성의 옆으로 왔다.
김자영을 담당하고 있던 카메라가 추가되었다.
텃밭에 있던 카메라도, 숲에 있던 카메라도 하나씩 합류했다.
강수정 피디와 작가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때마침 주차장에 밴이 들어섰다.
소식을 들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달려온 블루문 매니저가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우고 주차장 쪽으로 향하는 걸 보니, 백 퍼센트 이서준이었다.
“운전석일까요? 조수석일까요? 뒷자리일까요?”
서준이 어디서 나올지 몰라, 카메라들이 차 주변을 찍었다.
오늘은 매니저가 운전했는지, 저번과는 다르게 차는 카메라들이 있는 쪽으로 조수석과 뒷좌석 문이 보이게 주차를 했다.
곧 차의 뒷문이 열렸다.
옆으로 스르륵 열리는 커다란 차 문.
차에서 나온 남자가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이 보였다.
배우 이서준이었다.
* * *
“여긴 어쩐 일이야, 서준 쌤!”
“이든이가 하랑이 사진을 보여줬거든요. 안 올 수가 있어야죠.”
“그랬어? 우린 몰랐는데…… 하긴 하랑이가 서준 선생님 많이 기다리긴 했어.”
허운성과 김자영의 말에 서준이 작게 웃었다.
‘이야기 안 했나 보네.’
아마 서준이 [바벨탑] 촬영 때문에 통화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괜히 거짓말했다가 통화를 못 하면 여러 사람이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랑이는요?”
“숲속에서 나물 캐고 있어.”
“애들이 나물이랑 풀을 구분해요?”
“그냥 다 뽑는 거지, 뭐.”
허운성과 김자영의 말에 명진이와 안녕, 하고 인사를 하고 있던 서준이 웃었다.
“그럼 전 그쪽으로 가볼게요.”
“아, 서준 쌤. 저녁 먹었어? 안 먹었으면 먹고 가는 건 어때?”
1인분 더 준비하려는 김자영의 말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하룻밤 자고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오오!
“우리야 괜찮지!”
“환영입니다!”
두 선생님과 제작진이 환호성을 질렀다.
허운성에게 안겨 있던 명진이도 다들 기뻐하는 모습에 같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만세를 했다.
* * *
“그렇게 된 거야.”
“어쩐지…… 하랑이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제작진분들이 분주해 보인다고 생각했어. 근데 왜 이렇게 행동력이 좋은 거야? 이젠 겁이 나서 너한테 연락도 못 하겠어.”
“기회는 있을 때 잡는 거니까? 원래 작품도 타이밍이 생명이거든. 그리고 이렇게 기다리는데 어떻게 안 와.”
이제 좀 진정하는 것 같은 하랑이를 토닥이던 서준이 말했다.
걱정을 한시름 놓은 박이든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잘 왔어. 촬영은?”
“잘하고 왔어. 단번에 끝내고 왔지.”
“오오! 역시 이서준!”
박이든의 오버액션에 서준이 팔꿈치로 박이든의 옆구리를 꾸욱 누를 때, 울음을 그친 하랑이가 꼼지락거렸다.
“하랑이, 선생님 많이 기다렸어?”
서준이 금세 표정을 바꾸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이든이 으으 몸을 떨었다.
“응…….”
서준이 품에 안긴 하랑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뇽 안 해써.”
뜻 모를 하랑이의 말에 서준과 박이든이 눈을 깜빡였다.
* * *
하랑이는 [숲속의 병아리 반]이 정말 좋았다.
커다랗고 예쁜 집도 좋고, 작은 놀이터도 좋고, 텃밭도 좋고, 선생님들도 좋고, 형 누나들도 좋고, 처음 보는 커다란 카메라들도 신기하고, 다가갈 때마다 도망가는 어른들(제작진)도 재미있었다.
“이곤 비미린데…… 하랑이는 주니 떤땐님이 제일 조아……!”
바로 옆에 박이든이 있는데도, 큰 목소리로(하랑이는 속삭이는 거였다) 비밀이라고 말하는 하랑이에 서준과 박이든이 웃고 말았다.
하랑이는 이 즐거운 만남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가끔 집에 놀러 오는 삼촌이나 이모처럼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니 선생님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에 또 만나요’도 했으니, 기다리고 있으면 주니 선생님이 와서 또 신나게 놀 거다.
그렇게 하랑이는 들뜬 마음으로 주니 선생님을 기다렸다.
주니 선생님께 보여주려고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청룡 님 인형도 들고 왔고 새로 산 피포 인형도 들고 왔다.
드니 선생님하고 주니 선생님 이야기도 했다.
“주니 떤땐님 오레지 쥬스 조아해!”
서준이 박이든을 흘긋 봤다.
박이든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병아리 반]과 이제 영원히 안녕이라고 했다.
형 누나들과도, 선생님들과도 안녕이라고, 잘 인사하고 오라고 했다.
하랑이는 영원히 안녕, 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할머니 집 근처 키즈카페가 ‘망해서’(이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이제 영원히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된 것을 하랑이는 기억한다.
아무리 울어도 떼를 써도 엄마 아빠는 안된다고 했다.
하랑이는 생각했다.
[병아리 반]과 영원히 안녕하면…… 그러면 주니 선생님도 영원히 안녕이었다.
“……하랑이 안뇽 안 해써…….”
하랑이가 싫다고 해서 ‘안녕’이 아니라 ‘다음에 또 만나요’, 라고 해버렸다.
이젠 영원히 안녕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주니 선생님은 [병아리 반]에 하랑이를 만나러 왔다가 하랑이가 없는 것을 보고 엉엉 울면서 하랑이를 계속 기다릴지도 몰랐다.
하랑이가 할머니 집 근처 키즈카페가 텅 빈 것을 보고 엉엉 운 것처럼 말이다.
“……떤땐님…… 우러…… 시러…….”
“그래서 선생님이랑 안녕하고 싶었어? 하랑이 이제 못 오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으응.”
아이의 세상과 어른의 세상은 이렇게나 다르다.
그저 지나가는 인사 한마디에 이렇게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떤땐님한테 안뇽하고…… 선믈도 주꼬야.”
어른들의 걱정과 달리, 하랑이는 제 나름대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이든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들이 의외로 똑똑해.”
“그러게 말이야.”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랑이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그렇게 어려 보였는데…….’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나 커버렸다.
흐뭇하게 웃으며 하랑이를 바라보던 서준에게 박이든이 속삭였다.
“근데 너 어떻게 하랑이 말을 알아듣냐?”
이제 겨우 세 살.
알고 있는 단어도 적고 발음도 부정확하며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비유할 단어를 찾는 것도 어려운 나이.
나름 열심히 이야기하는 하랑이였지만, 박이든은 반의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서준이 통역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어디선가 촬영하고 있던 작가님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거다.
시청자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 자막을 써야 하니까 말이다.
“문맥 파악은 대본 분석의 기본이니까.”
‘능력도 쓰고 있고.’
하랑이가 이별을 힘들어할까 봐, [병아리 반]으로 오던 중에 찾은 능력이 다른 쪽으로 효과를 발휘해 버렸다.
[(선)구름 양치기의 소통-중하급]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달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 읽을 수 있습니다.
몽실몽실한 구름 양들을 키우는 조인족, 구름 양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