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99화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서준의 모습에 안다호가 의문을 느꼈는지 서준을 부르려고 했다. 서준이 한발 앞서 박이든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말이다.
“어. 이든아. 하랑이가 날 기다린다고?”
휴대폰 건너에서 박이든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서준이 이렇게 반응할 줄 알았는데. 왜 촬영하는 날을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박이든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저번 주까지는 그냥 잠깐 오나, 안 오나 보는 정도였거든? 하랑이가 서준 쌤이 보고 싶구나, 하고 귀엽게 생각할 정도로.
그래서 사진도 찍고, 해가 지는 저녁이면 박이든이 하랑이 옆에 붙어 앉아 서준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며 잠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응.”
-근데 오늘내일이 마지막 촬영이라는 걸 아이들이 알아서, 지금 여기 분위기가 조금 싱숭생숭하거든. 잘 놀긴 놀지만, 선생님들한테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선생님들도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는 분위기고.
나도 그렇고.
박이든이 조용히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서로에게 정이 많이 들었다는 것일 터였다.
-형누나들하고 선생님들이 그런 분위기니까 하랑이도 대충 느꼈나 봐. 부모님한테도 이야기 들었겠지. 오늘내일만 가면 이제 병아리반에는 가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노는 중에도 가끔 거기에 서 있더라고…… 아니, 꽤 자주.
헤어짐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아이지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원래 아이들은 그런 거에 민감하니까.”
-응. 그렇지.
박이든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마지막 사진 봤어? 하랑이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손수건이 네 거야. 오전에 물감 놀이 했거든. 주니 선생님 줄 거라면서 만들더라.
“……손수건이었어?”
솔직히 닦다가 만 수건인 줄 알았다.
선물까지 만들어줄 줄은 몰랐던 서준은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게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은 왜 했냐.
“그럼 거기서 냉정하게 ‘안 돼. 이제 바이바이야.’라고 말해?”
-……그건 그렇지만.
서준과 박이든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잊을 줄 알았는데…… 나 거기 있었던 거 5시간도 안 되지 않았어?”
-……애들 먹방 보여준다고 네 얼굴 계속 보여준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해.
“아하.”
하긴, 하랑이의 집에서도 보여줄 테니 서준을 잊는 게 더 힘들긴 할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분장팀입니다! 메이킹 필름팀도 있어요!”
그 말에 조용히 있던 안다호가 서준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달라고 할까? 하는 안다호의 눈빛에 서준은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했다.
-아, 너 촬영해야지!
스태프의 목소리가 휴대폰 건너 박이든에게까지도 들린 것 같았다.
-나중에 시간 되면 하랑이랑 영상통화 해주라. 그거 부탁하려고 연락했어. 그럼 이만 끊을게!
서준이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박이든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안다호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 서준아?”
배우 이서준 정도의 위치라면 촬영 시간을 늦출 수 있다는 걸, 안다호도 서준도 잘 알았다.
‘하지만 하랑이가 어려서 영상통화가 짧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데.’
만약 울기라도 하면 달래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릴 테고 박이든도 고생할 거다. 그리고 어중간하게 통화를 끝내면 서준도 영 개운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오늘 촬영은 엑스트라 분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을 몇십 분이고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촬영해요. 형.”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뿐.
그것도 서준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죠!”
의욕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배우의 모습에 매니저는 웃고 말았다.
* * *
“조명 더 올려! 화면이 너무 밝게 나와!”
“소품팀! 이거 쓰는 거야?”
촬영장이 막바지 준비로 시끌벅적할 무렵, 신지혜 피디와 조연출이 오늘 촬영할 콘티를 휙휙 넘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1, 4번 씬은 같은 장소니까 바로 이어서 찍고 2, 3번 씬은 끊어서 가자.”
“네. 알았어요.”
오늘 촬영할 장면은 총 네 장면.
1, 2, 4번 씬은 배우들끼리 찍는 거라 NG가 나와도 곧바로 다시 찍을 수 있는 반면에, 3번 씬은 엑스트라들이 많이 나오는 데다가 원테이크로 찍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다시 촬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3번 씬 찍을 때 NG 나면 오래 걸리니까, 내가 배우들하고 촬영하는 동안 네가 엑스트라 분들하고 리허설하고 있어. 실수 안 하도록.”
“네!”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이자, 빙그레 웃은 신지혜 피디가 가볍게 숨을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끌벅적하던 촬영장이 천천히 조용해지고 있었다. 하나둘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준비 끝나가는 것 같으니까 촬영 시작하자.”
“네! 배우분들 불러올게요.”
잠시 후.
[바벨탑]의 배우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그 뒤를 이어 서준과 메이킹 필름 팀이 나타나자 스태프들이 술렁였다.
권강민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랑 반응이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어쩔 수 없지. 우린 너무 익숙해졌는걸.”
“맞아요. 요 몇 달 동안 하루에도 몇 시간씩 보는 배우들보다야 처음 보는 슈퍼스타가 더 신기하긴 하죠.”
최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소영이 빼곤 우리도 서준이 볼 때 비슷하지 않았어요? 워킹맨 때.”
“그건 그래. 엄청 놀랐지.”
배우들의 농담에 스태프들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화목한 촬영장 분위기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빙그레 웃으며 최소영에게 말했다.
“누나. 촬영장 분위기가 좋네요.”
“응. 원래 분위기도 좋았는데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더 좋아졌어.”
스태프들과 오래 마주치는 주조연 배우들의 성격도 좋았고, 반사전제작이라 스케줄에 여유가 있어 다들 여유로운 덕분이기도 했다.
분장을 끝낸 배우들까지 나타나자, 촬영장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배우들이 동선과 대사를 가볍게 맞추었고 신지혜 피디는 모니터로 그 모습을 확인했다.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영상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신지혜 피디가 목소리를 높였다.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된 촬영장을 보던 조연출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다른 스태프들이 통제하고 있는 3번 씬 촬영장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엑스트라분들은?”
“안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막내 스태프의 말에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촬영 때까지 리허설을 진행할 건데, 잘해주시면 촬영 빨리 끝날 거라고 이야기해 줘.”
“알겠습니다!”
후다닥 뛰어가는 막내 스태프의 모습에 조연출이 빙그레 웃으며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 * *
“네. 일단 첫 번째 리허설은 여기까지고요. 아까 코멘트 받으신 분들은 다음 리허설 때 주의해 주세요.”
서준의 역할을 대신해 대사를 읊던 조연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중간중간 역할과 다르게 오버액션과 어색한 행동 때문에 눈에 띄는 엑스트라들이 있어 지적하느라 이제 겨우 첫 번째 리허설을 끝냈다.
“그럼 바로 두 번째 리허설 시작하겠…… 선배?”
촬영장의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과 신지혜 피디가 들어왔다. 그 뒤를 배우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조연출이 당황하며 시계를 살폈다. 엑스트라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선배. 뭐 문제라도 생겼어요? 시간 별로 안 지났는데?”
조연출이 단번에 신지혜 피디에게로 달려갔다.
“……아니. 문제는 없는데…… 있어.”
“……뭔 소리예요?”
조연출이 짜게 식은 눈으로 신지혜 피디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제야 신지혜 피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를 보고 엄청 놀란 표정, 그리고 왠지 들뜬 것처럼 상기된 표정이었다.
“……왜 이서준, 이서준 하는지 알 것 같아! 어쩌지? 그냥 넋 놓고 보기만 했어. 물론 영상은 멋졌지만…… 이렇게 찍어도 괜찮은 건가 싶은데……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잘 찍었다는 거예요, 못 찍었다는 거예요?”
“엄청 잘 찍었다고! NG도 없이!”
다른 스태프들도 비슷한 반응이라, 조연출은 왠지 그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얼른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럼 바로 3번 씬 촬영 들어가요? 촬영이 너무 일찍 끝나서 리허설 한 번밖에 진행 못 했어요.”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촬영하면서 고치는 수밖에. 시간도 많이 남았잖아.”
“엄청 남았죠.”
신지혜 피디와 조연출이 촬영을 위해 움직일 무렵, 권강민이 입을 열었다.
“코코아엔터에서 배우들을 뽑는다던데, 들었어?”
“코코아엔터면 서준이 소속사요? 정말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옆에 서 있던 두 조연 배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퍼지고 있는 이야기니 숨길 필요도 없었다. 권강민이 수긍하자 두 배우가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크기를 키워야 할 때긴 하지. 할리우드 진출 욕심 있는 배우라면 꼭 고려해 보는 회사잖아.”
“배우 쪽에서 먼저 문의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더라.”
“그건 저도 들은 적 있어요.”
배우들 사이에서도 코코아엔터는 꽤 인기 있었다. 1지망 소속사로 생각하는 배우와 배우지망생도 많았다.
“작품도 잘 골라줄 것 같고.”
“그거 서준이 픽이잖아요.”
서준이 직접 작품을 고른다는 건 일반인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보는 눈은 꽤 괜찮지 않을까? 서준이가 고르는 작품들을 많이 봐왔을 테니까.”
권강민의 말에 두 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영과 이야기하고 있는 서준의 너머, 코코아엔터의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저 아직 계약 기간 남았는데…… 나중에도 계속 계약하겠죠?”
“나도. 막 작년에 재계약했는데.”
“난 올해가 끝이라서…….”
두 배우가 부러운 눈빛으로 권강민을 바라보았다. 권강민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꼭 된다는 보장은 없잖아. 코코아엔터 쪽에서 거절할 수도 있고.”
“기준이 궁금하긴 하네요. 누가 제일 처음 들어가면 대충은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나이일까? 서준이가 있으니까 아역 배우나 아역 배우 출신?”
“아예 신인일 수도 있고.”
“김종호 선배님이나 이지석 선배님같은 이서준 사단일 수도 있죠.”
코코아엔터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러 3번 씬 촬영이 시작되었다.
서준과 배우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엑스트라들도 제 역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금 어색한 부분이 보였지만 신지혜 피디는 일단 NG가 나오더라도 한번 촬영해 보기로 했다.
“레디, 액션!”
뚜벅.
서준이 걸음을 옮겼다.
* * *
“컷! 오케이!”
신지혜 피디와 카메라 감독이 모니터를 보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오케이라고? 다시 안 찍어?”
“이대로 가도 될 것 같은데요! 날것 같은 생생함! 감독님은 별로세요?”
“아니, 나도 현장감 있어서 엄청 좋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이제 한 번 찍었잖아. 좀 더 여러 번 찍어서 좋은 컷을 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진정한 의미에서 원테이크 촬영이네요! 더 찍어도 이것보다는 안 나올 것 같아요! 조금 전 촬영도 이랬거든요!”
반색하는 신지혜 피디의 모습에 카메라 감독이 조연출을 바라보았다. 조연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십 개의 예고편을 만들어내다가 첫 편집을 예고편으로 내보내는 신지혜 피디다. 그런 신지혜 피디가 첫 컷이 가장 좋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촬영장을 나와 모니터링을 하러 가던 세 배우가 마주쳤다. 권강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1호 배우가 너무 대단해서 부담스러울 것 같아.”
“맞아요. 이서준 배우 다음으로 나오는 코코아엔터 2호 배우잖아요.”
“그러게. 누가 됐든 사람들 관심은 엄청 받겠어. 힘내. 강민아.”
“힘내요. 형.”
두 배우의 놀림과 같은 응원에, 권강민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했다.
* * *
“……나믈!”
“하랑아. 나물.”
“웅! 나믈!”
“웅은 되면서 왜 물은 안 되는 거야?”
박이든이 작게 웃으며 다른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오늘 [병아리반]은 잠시 후 저녁에 먹을 나물을 직접 캐러 왔다. 여기에 있는 네 명은 나물을, 나머지 세 명은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를 수확하기로 했다.
박이든과 정나희가 나물팀을, 허운성이 채소팀을, 김자영이 요리를 맡기로 했다.
“꼳!”
나물인지 잡풀인지 모를 초록색 줄기를 끼고 있던 장갑에 풀물이 들 정도로 꽉 쥐고 있던 하랑이가 노란 꽃에 관심을 주었다.
“이거 주니 떤땐님 줄래!”
“으음. 그럼 꽃이 아야 하지 않을까?”
박이든의 말에 하랑이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제 손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풀이 튼튼해진 하랑이의 손힘에 못 버티고 비틀려 있었다.
“나믈…… 아야 해.”
“그건 좀 다른데…… 아니, 같은가?”
같은 식물이니까 나물도 뽑으면 아야 하겠지? 박이든이 끙끙 앓았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나물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꽃은 못 먹잖아. 먹을 때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먹으면 괜찮아. 하랑아.”
하랑아, 하고 부르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하랑이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였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건 뭐 때문일까. 아직 어린 하랑이는 지금의 복잡한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뱃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느껴졌다. 애꿎은 두 주먹만 조물락거렸다.
“하랑아. 준이 선생님 오셨네. 안 봐?”
“선생님 그냥 갈까?”
박이든과 서준의 말에 멈춰 있던 하랑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입술은 삐죽 내밀고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뾰로통한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기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랑이의 붉어진 코끝과 입술이 움찔움찔 떨렸다.
“안녕. 하랑아. 또 만났네.”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은 서준이 두 팔을 앞으로 내밀자, 벅차오르는 울음에 어깨를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쉬던 하랑이는 손에 쥔 풀떼기들이 흩날리는 것도 모른 채 뛰어갔다.
“흐어어엉! 떤땐님!”
덥석 품에 안겨 엉엉 우는 하랑이의 등을 토닥이며 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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