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98화
서준과 눈이 마주친 권세아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서준도 웃으며 인사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정말로 낯을 많이 가리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슬럼프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30분부터 퇴실 가능합니다.”
교수의 호명이 끝나고 시험지가 앞에서 넘어왔다. 시간을 확인한 서준이 시험지를 읽어 내려갔다. 간단한 문제부터 어려운 문제까지 골고루 있었다.
‘전부 주관식인 게 신기하긴 하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시험문제는 객관식이 대부분이었는데 말이다. 객관식 문제는 하나도 없이, 길고 긴 주관식의 답을 적을 자리가 텅 비어 있는 시험지에 서준이 작게 웃고는 답을 써 내려갔다.
* * *
“이제 퇴실하셔도 됩니다.”
30분이 되고 시계를 확인한 조교의 말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수는 시험이 시작되고 5분쯤 살펴보다가 자리를 떴고 조교가 대신 감독하고 있었다.
서준도 조교에게 시험지를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왔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강의실을 나온 학생들이 하나둘 복도를 떠나는 사이, 서준이 복도 한쪽에 서서 휴대폰을 살펴보고 있었다.
[배우 김종호 할리우드에서 열심히 촬영 중!]
[할리우드에서 보내드립니다! 배우 이지석, 김종호와의 인터뷰!]
1월에 가서 벌써 4월 말.
이제 슬슬 촬영이 끝날 때가 아닐까 싶었다.
영화에서 단역으로 나오는 지석이 형은 벌써 촬영을 끝냈지만, 할리우드에서 오디션을 볼 만한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종호 삼촌도 그렇다고 하고.’
아마 두 사람의 차기작도 할리우드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때, 강의실 안에서 학생들이 우르르 나왔다. 비슷한 시간에 시험을 끝낸 것인지 아니면 다들 나가니까 그냥 포기하고 나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서준은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없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없었다. 볼을 긁적인 서준은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르셀로나 FC B 박지오, 오늘 경기 출전!]
[바이올리니스트 제이슨 무어, 5월부터 유럽 순회공연!]
스포츠며 예술이며 한국, 미국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아는 사람들의 기사를 확인했다. 다들 잘살고 있구나,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강의실 문이 열렸다.
홀로 나오는 학생을 보고 서준이 활짝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안녕하세요.”
“……!”
누가 말을 걸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나오던 권세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같은 조가 된 연기과 이서준입니다.”
“아, 네! 네! 기악과 권세아입니다.”
꾸벅 인사한 권세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텅 빈 복도에 홀로 서 있는 서준이 눈에 띄었다. 아까 30분이 되고 일찌감치 나갔던 서준의 모습도 떠올랐다.
권세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혹시…… 저 기다리고 계셨어요?”
“네.”
의아한 듯한 권세아의 얼굴에 서준이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다음 주에 촬영이 있어서 수업에 못 오거든요. 미리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교수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자신이 조 활동 빌런이 될 줄이야.
물론 교수님이야 대외활동(촬영, 전시회, 공연 등)으로 빠지는 건 괜찮다고 했지만, 졸지에 교수님께 일대일로 코멘트를 받아야 하는 조원에게는 미안했다.
“아…… 괜찮아요! 촬영 중요하죠!”
권세아가 눈을 깜빡이다가 조금 신기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병아리반 촬영이세요?”
“아뇨. 바벨탑이에요.”
“아! 드라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머뭇거리던 권세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연주회로 빠질지도 모르니까, 괜찮아요. 촬영 잘하고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는 권세아의 모습에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연주회라…….’
슬럼프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일주일 후. 금요일.
10시에 시작한 [연기 입문] 시험이 끝났다.
시험 때문에 평소 수업시간보다 1시간가량 일찍 끝난 덕분에, 신난 연기과 1학년들로 강의실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난 이걸로 중간고사 끝!”
“나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전성민이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난 다음 주에 시험 하나 남았어.”
중간고사 기간이 있긴 하지만 고등학교 때보다 교수의 재량이 강해서 시험이 미뤄지는 경우가 있었다.
“다음 주까지 시험이라니…… 차라리 3개 같이 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근데 중간고사가 밀리면 기말고사도 밀리는 건가?”
김주경의 물음에 전성민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양주희와 한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학은 기말고사 끝나면 바로 방학이라고 하던데!”
“성민이 너 학교 일주일 더 나와야겠네!”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야. 너희들 시험도 늦어질 수도 있지.”
전성민의 말에 다들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건 그래. 스케줄은 교수님이 정하는 거니까 말이야.”
“그래도 기말고사는 빨리 쳤으면 좋겠다.”
“그러게. 시험이 끝나면 방학이라니…… 진짜 그냥 안 와도 되는 거야?”
“그렇다던데?”
오오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학년들에게 방학식도 없는 대학의 방학은 신세계였다.
“그럼 밥 먹으러 갈까?”
“벌써? 11신데?”
양주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하자, 한지호가 시간을 살폈다.
“다들 수업 없잖아. 밥 먹고 집에 가면 될 것 같은데?”
“서준이 수업…… 아, 오늘 촬영이지?”
김주경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몇 시까지 가면 돼?”
“1시 반까지 가면 돼. 12시 반에 다호 형이 데리러 오기로 했어.”
“밥은?”
“너희랑 먹으려고 했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서준의 모습에 친구들이 웃으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먹을래?”
“글쎄……”
“뒤쪽에 제육볶음 먹을까? 거기 이제 사람 좀 줄었다던데. 11시면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지 않아?”
“그래! 그러자.”
“나 먹어보고 싶었어!”
양주희의 말에 서준과 아이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맛있는 제육볶음을 배부르게 먹고 근처 카페에 들러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서준은 징징, 느껴지는 진동에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안다호 : 도착했어.
>안다호 : 지금 어디야?
벌써 12시 30분이 된 모양이었다. 안다호의 메시지에 서준은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가 볼게.”
“그래. 촬영 잘하고 와.”
“잘 가. 서준아!”
친구들이 손을 휘휘 흔들며 인사하자 서준도 웃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카페를 나와 안다호가 알려준 곳으로 가 보니, 익숙한 검은색 밴이 있었다. 스르륵 열리는 문에 서준은 얼른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안다호가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점심은 먹었어?”
“네. 저번에 갔던 제육볶음집에서 먹었어요.”
“아, 거기. 맛있었지.”
안다호는 운전대를 돌려 촬영장으로 향했다.
안전벨트를 맨 서준은 촬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오늘 찍을 장면의 대본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서준아. 다 왔어.”
“네.”
서준이 차에서 내리고 안다호는 짐가방을 챙겼다. 길고 긴 대기시간 동안 서준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든 짐가방이었다. 세면도구나 담요, 유자차 같은 음료와 간식들이 들어 있었다.
“엄청 크네요.”
“그러게.”
오늘 서준이 촬영할 장소는 자체 제작한 세트장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장소를 대여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규모가 컸다.
아직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인지, 건물 주위로 짐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럼 들어가 볼까?”
“네.”
서준은 안다호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펴보고 있던 조연출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대기실로 안내했다.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서준이 왔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온 [바벨탑]의 신지혜 감독이 활짝 웃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이 배우?”
“네. 든든하게 먹고 왔어요.”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꽤 여러 번 찍어야 할지도 몰라요. 편집할 수도 있기는 한데…… 전 그 느낌 그대로 살리고 싶거든요.”
신지혜 감독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작품을 위해서인걸요.”
서준은 작품을 생각하는 감독의 고집을 좋아했다. 물론 그게 타협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아집이 되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럼 아직 촬영까지 시간이 남았으니까 대기실에서 편하게 쉬어요.”
신지혜 감독이 나간 후, 근처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온 서준은 대기실 안에 있던 배우의 모습에 활짝 웃었다.
“소영이 누나!”
“서준아. 어디 갔다 왔어?”
“양치질하러 갔다 왔어요.”
“아, 양치질. 중요하지.”
서준의 말에 최소영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험 쳤다며? 무슨 수업이었어?”
“연기 입문이요.”
“와. 연기 입문! 오랜만에 듣는다.”
한예대 출신인 최소영도 1학년 때 들었던 수업이었다. 벌써 두 손을 꼽을 정도로 옛날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똑똑.
서준과 최소영이 즐겁게 대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대기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서준 씨.”
[바벨탑]에 출연하는 남자 주인공 권강민과 두 배우였다. 이렇게 와도 되나, 싶어 조금 어색한 듯한 표정이 최소영을 발견하고는 편안해졌다.
“소영이도 여기 있었네!”
“안녕하세요. 이 배우. 오랜만이에요!”
일단 배우라면 기본 호감도가 높은 서준이 배우들의 등장에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하핫. 이렇게 반겨주니까 너무 좋은데요?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권강민이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두 배우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배우들의 손에는 대본이 들려 있었다.
“대사가 별로 없긴 하지만…… 촬영 전에 맞춰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서준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아주 많이 있었다.
“저야 좋죠!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제가 연기 시작하기 전부터 서준 씨가 활동하고 있어서요. 되게…… 뭐랄까…… 신기하네요.”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도 서준의 작품을 봤고, 연기를 시작한 후에도 서준의 작품을 봐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스크린에서만 봐왔던 배우를 현실에서 만나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더욱이 이제 곧 함께 촬영까지 할 예정이었다.
“맞아요. 워킹맨 때 봤을 때도 되게 신기했어요. 진짜 꿈 아닌가 했다니까요.”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배우가 말했다.
“……진짜 말 놔도 되지……요?”
서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안다호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촬영장에 위험한 곳은 없나, 미리 둘러볼 예정이었다.
* * *
배우들 간의 잠깐의 대본 리딩이 있었다.
“역시 이 역. 재밌어요.”
“그러게. 시청자분들도 엄청 재미있어 하실 것 같아.”
웃으며 말하는 서준에 최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대본 리딩이 서준을 만나러 온 핑계긴 하지만, 세 배우는 소홀히 연기할 생각은 없었다.
‘……소홀히 할 수도 없었지.’
그 짧은 대본 리딩에서도 서준의 연기력이 느껴졌다.
그 연기에 합을 맞추려다 보니 저절로 힘을 쏟게 되었다. 진짜 짧은 대사인데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저는 앞으로도 서준 씨한테 말 못 놓을 것 같아요.”
“나도. 소영이는 어떻게 저렇게 편하게 대한대?”
“소영이는 옛날부터 친했잖아.”
그런 배우들의 대화에 서준과 최소영이 웃고 말았다.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배우들에게 조연출이 찾아왔다.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아 슬슬 의상을 갈아입고 분장을 해야 했다.
“그럼 우린 가 볼게. 서준아.”
어찌어찌 서준에게 말을 놓은 권강민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서준이랑 친해졌다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이 가득했다. 다른 두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서준아. 좀 이따 봐.”
“네!”
최소영까지 대기실을 나가고, 타이밍 맞춰 안다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다호의 손에는 의상팀 스태프가 준 오늘 의상이 들려 있었다.
“이걸로 갈아입으면 되고, 주연배우들이 먼저 촬영할 예정이라서 분장팀은 좀 이따 온대.”
“네. 알았어요.”
대기실 구석에 마련된 간이 탈의실에서 서준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서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이든이었다.
>박이든 : 지금 바쁨?
묘하게 데자뷔가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ㄴㄴ
<아직 촬영 전이야.
읽은 것 같은데, 박이든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서준이 고개를 돌려 안다호에게 물었다.
“다호 형. 오늘 이든이 병아리반 촬영 있죠?”
“응. 금요일, 토요일 촬영이니까. 아마 오늘내일이 마지막 촬영일걸?”
‘그럼 저쪽도 바쁠 텐데…….’
무슨 일인가 걱정이 들었다.
잠시 후, 박이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박이든 : 아, 미안.
>박이든 : 너 오늘 촬영이라는 거 까먹고 있었어.
>박이든 : 촬영 잘해!
박이든의 메시지에 흐릿하게 웃은 서준이 휴대폰을 두드렸다. 묘하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것처럼 보여 안다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이든아.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어.
<첫 번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
<두 번째는……
……에 약간의 분노가 들어 있다는 건 박이든도 느꼈을 거다.
또 길고 긴 침묵이 지나가고 나서야 박이든에게서 겨우 메시지가 왔다.
>박이든 : (사진)
>박이든 : (사진)
>박이든 : (사진)
>박이든 : 하랑이가너기다려!
끙끙 앓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보내버린 박이든의 띄어쓰기 하나 없는 메시지보다 사진이 먼저 서준의 눈에 들어왔다.
밝은 배경으로 하랑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옆구리 쪽으로 삐쭉 튀어나온 용 꼬리도 보이는 걸 보니 청룡님 인형을 안고 있는 듯했다.
해가 지는 저녁, 하랑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청룡님과 함께 날다람쥐 피포의 인형까지 함께 나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하랑이의 옆에 앉아 있는 박이든의 뒷모습도 보였다.
다시 밝은 하늘, 하랑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슨 놀이를 했는지 온몸이 알록달록한 물감 범벅이었고, 단풍잎만 한 양손에는 물감에 물든 두 개의 천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하랑이는 그렇게 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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