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86화
어두워진 방 안. 서준은 침대에 누웠다. 적당히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대고 포근한 이불을 덮고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았다.
‘나 얼마나 안 잤지?’
그제 7시쯤 일어났으니 약 41시간 만에 잠이 드는 것이었다.
능력 때문에 피곤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안 잔 적이 없으니 묘한 기분이 들긴 했다.
천장을 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 내일 할 일들을 조금 생각하던 서준이 눈을 감았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잠에 빠졌다.
* * *
“생각해 보면…… 나 안 자는 거 아닌가?”
생의 도서관에서 눈을 뜬 서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통 잠에 빠지면 꿈을 꾸거나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아 눈 깜빡하면 아침이라는 느낌이라던데, 서준은 자신의 의지와 의식을 그대로 가진 채 생의 도서관에서 지내다가 아침이 되면 깨어났다.
물론 서준도 사람인 만큼 삶의 책을 읽고 싶지 않은 날도 있어서 생의 도서관에 오지 않고 그냥 잠만 자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밤을 생의 도서관에서 삶의 책을 읽으며 보내고는 했다.
몸은 자고 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책을 읽고 행동을 한다는 건 안 자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싶었다.
“그럼 나는 얼마나 안 잔 거지?”
서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요즘은 생의 도서관에 매일같이 온 터라 도서관에도 오지 않고 잠을 청했던 건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몇 년 정도.
“……근데 안 잔 것치고는 상태가 좋단 말이야.”
생의 도서관에서의 활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도, 정신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멀쩡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준이 무언가를 떠올렸다.
“자각몽이랑 비슷한가?”
꿈이라는 자각이 있고 꿈속인 만큼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깨어나면 그냥 잠들었다 깬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
아무리 활발하게 움직여도 깨어나면 그저 한낱 꿈인 보통 사람들과 달리 서준은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자각몽과 비슷한 것 같았다.
“뭐…… 상관 없나?”
전생도 이랬고 전전생도 이랬고 수많은 전생들도 아마 이랬을 터였다. 생의 도서관에서 평생의 밤을 보내고 멀쩡한 정신과 몸으로 아침을 맞았겠지.
“원리 분석은 다음 생의 나에게 맡기자.”
언젠가 ‘나’는 과학자나 마법사 같은 똑똑한 ‘삶들’을 살 테니까 말이다.
내일의 나가 아니라 다음 생의 나에게 할 일을 미룬 서준은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생의 도서관의 문 앞에 섰다. 두 개의 문 중 큰 쪽, 최상급 도서관의 문이었다.
“얼른 대고 들어가야겠다.”
어차피 안 열릴 테니까 얼른 푹신한 의자에 앉아 어제 못 읽은 책을 읽고 싶었다.
그저 매일같이 하는 일이라 별생각 없이 커다란 최상급의 문에 손을 댔다가 곧바로 작은 문으로 들어가려던 서준은 손을 댔던 부분이 반짝 빛나자 눈을 깜빡였다.
“……어?”
우우웅.
도서관의 문이 울기 시작하더니, 서준이 만졌던 부분이 동그랗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물결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본 적 있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마지막, 최상급의 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어?!”
서준이 놀라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이게 왜 열려?!”
누군가 있었다면 ‘네가 열었으니까?’ 하고 딴지를 걸 것 같았다.
하지만 서준은 일단 닫힌 문이 있으니 버릇처럼 열려는 시도는 한 것뿐이었다. 진짜로 열릴 줄은 몰랐다. 서준은 입을 쩌억 벌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최상급의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 이게 왜 열려?’
상급까지는 이해한다.
‘서준’이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도서관의 개방 조건이 조금 널널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이 정도의 마나와 정신력이라면 상급 능력을 다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최상급은 좀…….”
서준은 반짝반짝 빛나는 문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따지면 상급까지는 그래도 생명체라고 할 수 있었다.
대륙고래도, 안개늪의 파수꾼도 종족 그 자체가 대단하긴 했지만,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생명체들과 다름없었다.
태어나 보니 대륙고래라서 행성을 헤엄쳐 돌아다닌 것뿐인데, 태어나 보니 안개늪의 악어 수인이라서 대대로 내려오는 파수꾼 일을 맡았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보고 경외감을 느낀 타 생명체들에게 신으로 취급받았고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보니 상급이 되었다.
하지만 최상급은 그 이상이었다.
초월자나 신과 같은.
최하급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마족까지 유혹했던 미믹도 종족 내의 초월자나 다름없었다. 거의 개미가 코끼리를 붙잡은 것과 비슷했으니까. 아니, 미믹과 마족의 차이는 그것보다 더 컸다.
상급은 재능만으로 충분하다면, 최상급은 재능은 물론이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상급이 타인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생들이었다면, 최상급은 자신의 능력으로 종족을 초월하여 신이 되거나 신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된 생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었다.
최상급 능력의 주인들은.
물론, 책에 스며든 능력은 ‘신급 존재’의 많은 능력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들이었다.
“근데 왜 열리는 거야…….”
서준은 반짝반짝 빛나던 빛이 사라지고 이제 슬쩍 밀면 열릴 것 같은 문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준이 생각하기에, 지금의 자신은 최상급 능력을 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마나도 부족한 것 같았고 정신적 능력도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생은 아예 안 열리거나 열려도 나이가 좀 많이 든 다음에 열릴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자기 열릴 줄은 정말 몰랐다.
“들어가? 말아?”
최상급 도서관의 문 앞에서 서준이 머뭇거렸다.
몸이 능력을 견디지 못하고 펑하고 터졌던 지난 생들의 ‘바보’들이 떠오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근데 또, 그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생의 도서관이, 똑똑한 전생들이 그렇게 허술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나를 안 믿으면 누굴 믿어.’
……악의 도서관에 있는 전생들이라면 조금 의심해야겠지만.
고민하던 서준이 걸음을 옮겼다.
“일단 들어가 보자.”
……어쩌면 검색 기능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 * *
최상급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문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서준이 몸을 흠칫 떨었다.
“……침대?”
침대가 여기 왜 있어?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곳에 새하얀 이불과 베개가 있는 침대가 있었다. 서준이 의아한 얼굴로 침대에 손을 댔다. 힘을 주자 매트리스가 폭신하게 들어갔다.
역시 침대다.
“아까 잠에 대해 생각해서 생긴 건가?”
별생각 없이 이어지던 잡생각들이 떠오른 서준이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의 도서관에 들어오자마자 ‘검색’만 외칠 걸 그랬다.
검색! 검색! 검색!
“그럴 리는 없겠지.”
그저 편의를 위해 침대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누워서 책을 읽고 싶은 날도 있을 테니까. 내일이면 최상급 도서관은 옆 도서관과 합쳐져 하나의 도서관이 되고, 이 침대는 책상과 함께 놓이게 될 터였다.
폭신한 침대에 앉은 서준은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다른 곳이랑 똑같네.”
최상급이라서, 마지막 문이라서 뭔가 다른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천장이며 벽지며 책장까지 똑같았다. 많은 책장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그저 평범한 도서관이었다.
침대의 등장과 평범한 도서관의 모습에 서준은 긴장이 조금 풀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지금의 자신은 최상급 능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똑똑한 전생들이 만든 생의 도서관이 그렇게 판단했으니까.
“평범한 나는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작동 원리는 자세히 모르지만 잘 사용하니까 말이다.
최상급 능력을 받아들이기로 한 서준이 편한 마음으로 주위를 좀더 둘러보았다.
“책이 적네.”
확실히 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
아주아주아주 드물게 나오는 최상급 능력이라서 그런지 ‘전생들’이 적었다.
“……권수는 많고.”
그런데 전생의 수가 적은 대신 각 삶마다의 이야기가 길었다.
신급이라 웬만하면 죽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아주아주아주 오래 살아서 겪었던 일들이 많았을 테니 이해는 갔다.
“그렇다고 책장 하나에 전생 하나는 너무한 거 아니야?”
서준이 질린 눈으로 책장을 바라보았다.
맨 위쪽부터 맨 아래쪽까지. 안 그래도 커다란 책장인데, 그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은 오직 하나의 삶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걸 다 언제 읽을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숨을 쉰 서준이 도서관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최상급이라 오래오래 살았을 테고 그만큼 기억에 깊게 남아서, 지금의 서준에게도 희미하게나마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겸사겸사 검색 기능도 찾고.’
……솔직히 말하자면 검색 기능만 찾아도 된다.
이제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열릴 도서관 문도 없고 서준의 능력으로는 생의 도서관에 흠집조차 못 내니까 말이다. 거의 계란으로 바위치기급이다.
“제발 있어라.”
최상급의 도서관은 다른 곳보다 작아서 금세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도서관을 세 번이나 둘러본, 안 살펴본 곳이 없는 서준은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검색 기능은 없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래. 뭐. 그럴 줄 알았어.”
담담하게 말하는 서준이었지만, 시무룩한 얼굴은 전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잠시 실망하던 서준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까 발견했던 책 앞으로 향했다.
“기대했던 검색 기능은 없고 이게 있네.”
책장을 가득 채운 하나의 전생.
서준이 손을 뻗자, 책장 맨 위 첫 번째 책이 마법처럼 두둥실 떠서 서준의 손에 안착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편하게 잘 만들었는데 왜 검색 기능이 없냐고.”
오늘은 좀 투덜거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서준은 침대로 향했다.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 표지를 살펴보았다. 깊은 바다 빛과 번쩍이는 황금빛이 뒤섞인 표지 위로 책 제목이 보였다.
[황금 인어]
서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최근에 겪었던 최상급의 전생이었다.
“최근이라 해봤자 엄청 오래됐지만.”
몇십 몇백인지 모를 전생들이 황금 인어의 삶과 서준의 삶 사이를 벽처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으로는 이 인어가 바다가 아닌 뭍, 그러니까 지상 위에서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직업이 아마…… 상인이었던가?”
인어의 모습과 함께 반짝이던 황금이 떠올랐다. 확실히 돈에 관련된 일이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최상급 정도가 되는 삶이니, 그저 그런 상인이 아니라 전 대륙을 돈으로 살 수 있었던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좋은 능력이면 다호 형한테 주자.”
일단 ‘선의 도서관’에 있는 능력이니 나쁜 능력을 아닐 거다.
‘아빠랑 희상이 삼촌 회사는 손댈 것도 없이 잘되고 있고 은찬이 삼촌도 잘하고 있으니까.’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다호 형에게 가장 필요할 것 같았다.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책 제목만으로 능력을 맞히긴 힘들었지만 추리는 조금 할 수 있었다.
상인에게는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
일단 운이 엄청 좋아야 하고 상업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야 할 터였다.
어쩌면 사람을 잘 판단하는 능력일지도 몰랐고, 어쩌면 수많은 선택지 중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일지도 몰랐다.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르고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일단 내가 먼저 써봐야겠지.”
상급도 다른 사람에게 써본 적이 없는데, 최상급을 다호 형에게 쓰려니 조금이 걱정되긴 했다. 너무 과한 능력이라면 다호 형에게 안 좋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뭐, 정말 좋은 능력이라면 등급을 하락시키는 방법도 있으니까.’
서준은 책을 읽기 위해 표지를 내려다보았다.
“……근데 이걸 언제 다 읽지?”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황금 인어]의 책들을 떠올린 서준은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1권을 읽고 중간을 뛰어넘어, 마지막 권을 읽으면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책을 모두 읽어야만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갈 길이 멀어, 서준은 얼른 첫 페이지를 넘겼다.
<인어의 나라, 세뮤다리에 둘째 왕자가 태어났다.
이름은 파르비타. 황금빛 머리칼에 푸른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인어였다.>
* * *
“아.”
양치질을 하고 있던 서준이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끔벅였다.
‘악의 도서관도 열렸겠네.’
그쪽 책은 참…….
읽기가 겁난다.
악의 도서관, 최상급 전생들이라니.
얼마나 많은 세상을 파괴했을지 얼마나 많은 악행을 했을지.
물론 복수에 불타올랐던 삶들도 있어 슬프기도 하겠지만, 그냥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더러운 전생들도 있었다.
‘……흑역사 같은 느낌이지.’
서준이 힘 빠진 얼굴로 해탈한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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