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79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온 서준은 교양 수업이 있는 강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삼촌과 다호 형.
점심을 먹을 때는 친구들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머리 한구석에 두 사람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양 수업 [바이올린에 대하여(심화)]의 강사가 들어왔다.
수강 정정 기간이라서 그런지, 출석도 부르지 않고 짧게 수업 소개와 교재를 알려주고 떠나는 강사와 하나둘 일어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던 서준이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좀 있다가 갈게.
<생각할 게 있어서.
영 상태가 이상해 보이던 서준의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들이 답장을 보냈다.
>양주희: ㅇㅇ
>양주희: 6시까지만 와.
서준은 왼손으로 턱을 괸 체 강사가 나눠준 강의계획서에 펜으로 삐죽삐죽 낙서를 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앞으로 2시간은 텅 비어 있을 예정인 강의실이니 생각에 빠지기에 좋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한데…….’
근래 무슨 일이 있다면, 있을 예정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재계약.
[재계약]이라는 글씨 위로 빙글빙글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이제 성인이기도 하고.’
새해 1월부터 술도 마실 수 있게 된 서준이었지만, 코코아엔터는 법률적으로 계약의 효력이 있는 올해 3월 10일, 서준이 만 19세가 되는 생일날 이후로 정식 재계약을 할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보호자 동의도 없이 이루어지는 서준과 코코아엔터 사이의 계약이라, 서준도 묘하게 들뜨고 긴장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계약서도 생일 이후에 받기로 했는데…….’
사인만 안 했을 뿐이지 재계약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계약서도 받지 않았고 계약서를 받은 후에도 확실하게 검토를 할 예정이니 그게 문제가 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다호 형하고 은찬이 삼촌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데…….’
그것도 의아한 것이 코코아엔터의 사장, 서은찬은 지금껏 가수팀에게만 영향을 끼쳐왔다.
브라운블랙을 처음 맡은 것이 연예계 일의 시작이다 보니 가수에 대해서만 빠삭하지, 배우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겨우 배우가 한 명뿐인 데다가 그 하나뿐인 배우가 너무 유명하고 잘하고 코코아엔터의 투자자이기도 하니, 딱히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다호 형이랑 2팀이 잘하기도 했고.’
그러니 이서준 배우 전담 2팀은 사장의 간섭도 거의 없는 독립적인 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통이라면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겠네.’
물론 연예계라는, 연예인이 거의 1인 회사로 취급받는 특수한 세계가 아니라면 거의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사장의 힘이 닿지 않는다는 상황은 여러모로 문제가 생기기 쉬웠다.
사장이 아니꼬워하며 어떻게든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거나, 팀장이 뒷작업을 해서 전 팀원을 데리고 독립한다거나.
뉴스나 기사로 봤던 일들을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나가던 서준이 눈을 끔벅였다.
‘……삼촌하고 다호 형이……?’
서준이 아니꼬운 표정을 짓는 서은찬과 뒷작업을 하는 안다호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서은찬이 아니꼬운 표정을 지을 때는 누나인 서은혜와 매형인 이민준의 애정행각을 볼 때였고 안다호가 뒷작업을 할 때는 서준의 작품 활동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나타날 때였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습들에 서준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전혀 상상이 안 되네.”
그럴 사람들도 아니고.
친분을 빼두고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그랬다.
사장 서은찬이 2팀에 간섭해도 투자자이자 배우인 서준이 반대하면 모든 게 쓸데없는 일이 된다.
아예 서준이 독립할 수도 있으니 할리우드 스타를 데리고 있다는 네임벨류을 위해서도 과한 간섭은 기본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매니저 안다호가 독립을 한다고 해도 서준이 따라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
일단 할리우드 스타의 매니저였다는 사실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능력 있는 기획자도 다음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운 게 연예계였다. 이름만으로 성공하기는 힘들 터였다.
‘다호 형이라면 잘하겠지만, 시간이 걸리겠지.’
게다가 안다호라면 서준을 두고 독립하지는 않을 거였다.
10년 넘게 함께해 온 배우와 매니저 사이에는 그런 믿음과 친분과 애정이 있었다.
서준은 몇십 년 넘게 지낸 혈연 사이에서도 피 터지는 싸움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했다.
“그럼 뭐지?”
도대체 뭘까.
왜 다호 형의 상태는 이상하고, 삼촌은 왜 직접 통화를 한 걸까.
서준이 펜 끝으로 종이 위를 탁탁 두드렸다.
“아, 모르겠다.”
단순히 생각하자면 서은찬과 안다호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고 어린 서준에게 말하기 민망하지만, 서준이 사이에서 화해를 시켜줬으면 하는 바람이 아닐까, 싶었다.
어른들은 (서준도 이제 성인이긴 하지만) 계기가 없다면 화해하는 것도 어렵게 생각하고는 하니까 말이다.
“진짜 그런 거면 평생 놀려먹을 테다.”
평생 느껴본 적이 없었던,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된 기분이었다.
에휴, 한숨을 쉰 서준이 가방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근데 진짜 크게 싸운 거면 누구 편을 들지…….”
은찬이 삼촌이냐, 다호 형이냐.
모두에게 축하받을 생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나 소속사 옮기려고.”
푸웁!
음료수를 마시던 서준이 동기이자 4살 연상인 박현주의 말에 격한 반응을 보이더니, 따끔따끔한 탄산에 목이 아픈 듯 콜록대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은 강재한이 묘한 표정으로 휴지와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서준이 너 오늘따라 이상하네. 아까 오는 길에도 넘어질 뻔했잖아.”
“……그러게. 나도 오늘 왜 이렇게 난리인지 모르겠어.”
한 번 관심이 쏠리니 귀가 뜨인 것처럼 세상의 온갖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직하고 독립하고 선배, 후배와 싸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길에서 들었던 독립은 집에서 독립해서 자취하겠다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모르게 기운이 빠진 서준이 물을 마시고 물었다.
“현주 누나. 회사 옮기는 이유 물어봐도 돼요?”
“응. 괜찮아. 작은 곳이기도 하고 조금만 검색해 보면 이런저런 소문도 많으니까.”
박현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소속사가 파벌 싸움 중이라서 배우 케어가 엉망진창이거든. 되게 작은 곳인데도 진짜 피 터지게 싸우더라. 회사 자체가 폭발할지도 모를 정도로. 알고 보니까 형제라고 하던데…… 서로 더 잘 알아서 그런가? 여튼, 문제가 되기 전에 나오는 거지. 다행히 계약 기간도 5월까지라 나오기도 쉽고.”
“그렇구나. 확실히 저희 소속사도 파벌이 있긴 있어요. 그렇게 심하지는 않지만요. 그럼 어디 들어가시려고요?”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기의 물음에 박현주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뭐, 내가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연기 활동 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회사? 근데 파벌이 없는 곳이 있나 싶어. 그냥 적당한 곳에 들어가는 거지. 심한 곳은 연예인들까지 나뉘어서 회사가 반토막이 나잖아. 그런 곳만 아니면 돼.”
“……반토막.”
반토막 난 계란말이를 보며 왠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서준의 모습에 강재한과 박현주, 동기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집을 나온 서준이 한숨을 쉬었다.
어제 동기 모임에서 술은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골이 조금 띵한 느낌이었다.
‘생의 도서관에서도 책 제대로 못 읽었지.’
적당히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고심 끝에 골랐는데 생의 도서관까지 도와주지 않는 건지 파벌 싸움으로 죽어버린 전생의 삶을 읽고 말았다.
“어! 서준아! 여기!”
기운이 빠진 얼굴로 걸음을 옮기던 서준은 데리러 온 사람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서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다호 형이…… 아니네?’
서준의 일이라면 작은 일에도 본인이 직접 오던 안다호가 아니라 2팀 직원이었다.
평소에도 2팀 직원이 데리러 온 적이 있었지만, 여러 상황이 겹치다 보니 서준은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어…… 안녕하세요. 형…… 근데 다호 형은요?”
“안 팀장님은 일 때문에 바빠서 내가 대신 왔어. 얼른 타. 출발하자.”
“네에.”
묘하게 발걸음이 무겁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서준은 다시 한번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된 기분을 느꼈다.
‘어른이 되면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감정들을 많이 느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건 좀…….’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서준이 에휴, 한숨을 쉬었다.
* * *
코코아엔터에 도착한 서준은 5층 사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2팀 사무실에 잠시 들러서 안다호가 있나 살펴보았지만 없었다.
‘2팀 분위기는 평소랑 다른 게 없는데…….’
마치 대본을 읽고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처럼 샅샅이 살펴봤으니 확실했다. 2팀 직원들은 평소와 같았다. 안다호와 서은찬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냥 물어보는 게 빠르겠다.’
아니. 곧 이야기해 줄 테니 얼른 가자.
서준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보통 때보다 조금 격한 노크 소리였다.
그 노크 소리에 문 앞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문이 열렸다.
“서준아. 왔어?”
“……다호 형?”
서준이 눈을 끔벅였다. 안다호가 사장실에 있었다.
“음? 어제 잠 잘 못 잤어?”
안다호는 서준의 안색을 살피고는 얼른 서준을 소파로 이끌었다. 서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안다호에게 밀려 폭신한 소파에 앉았다. 상석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서은찬이 안다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은찬이 보기에는 서준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매니저인 안다호가 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안다호의 뒷모습을 한 번, 상석에 앉아 있는 서은찬을 한 번.
“……아니?”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바라보던 서준의 목소리가 묘하게 목소리가 튀었다.
“어제 동기 모임 있다더니, 숙취야?”
“약 사올까?”
안다호가 준 차를 조심스럽게 입에 대며 서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안다호와 서은찬의 사이를 오갔다.
‘싸운 것 같지는…… 않지?’
“……아니. 숙취는 아니야. 괜찮아요. 다호 형.”
전부 다호 형과 삼촌 때문이었지만.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민망해졌다.
그래도 싸운 것 같지는 않아서 안심이 되었다.
따뜻한 차가 몸 안에 들어가서 그런지 스트레스가 사라져서 그런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준이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풀리는 서준의 안색을 살피던 안다호가 빙그레 웃었다. 숙취는 아닌 모양이었다.
“숙취 힘드니까 술 적당히 마셔.”
서은찬이 한소리 했다. 서준이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진짜 시간이 빠르기는 했다. 언제 한 번 회식이나 할까, 싶었다.
“숙취 아니라니까. 그리고 어제 술도 안 마셨어.”
“동기 모임이라며? 그맘때는 박스째로 들이마실 때 아니야?”
“음. 나 빼고 다 마시긴 했지. 그래도 박스는 너무 했다. 삼촌.”
서준이 밝은 얼굴로 하하하 웃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왜 불렀어?”
“아…….”
왜. 왜.
왜 갑자기 분위기가 진지해지는데?
평상시와 같은 분위기에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가볍게 말을 꺼내자마자, ‘아…….’ 하고 신음만 뱉더니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묘하게 자신의 눈치를 보는 듯한 안다호와 서은찬의 모습에 서준은 속이 답답해졌다.
“뭐예요, 형. 뭔데, 삼촌. 나 지금 되게 궁금하거든? 삼촌은 어제 뜬금없이 전화하더니 오락가락하면서 무슨 일인지 말도 안 하지. 엄마 아빠는 형한테 무슨 일 없냐고 물어보지. 오늘 데리러 오지도 않고. 어제 궁금해서 제대로 잠도 못 잤어.”
답답함이 가득한 서준의 말에 서은찬이 뒷목을 매만졌다.
“아, 그랬어? 그게…… 나도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고민하는 바람에 티가 났나 보다. 안 팀장님도 그런 것 같고.”
안다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엄마 아빠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안다호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서준도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서준아.”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의 서은찬이 서준을 불렀다.
“……응.”
서준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안다호가 초조한 듯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서준의 눈에 그게 훤히 보여 대답이 늦고 말았다.
코코아엔터의 사장이 입을 열었다.
“안 팀장님 대신…… 새로운 매니저가 생기는 거, 어떻게 생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