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74화
서준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와…… 이게 뭐예요?”
“우리야 모르지. 한국어로 적혀 있는걸.”
조나단이 웃으며 전체화면을 끄자 까만 화면이 작아지고 제목과 댓글들이 나타났다.
[(팬무비 Fan movie) 브라운블랙 ‘범’×이서준 ‘MOEB-436’]
<해당 영상은 코코아엔터의 허락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가사 풀이(영어)>
직관적인 제목과 함께 더보기란의 설명이 서준의 눈에 들어왔다.
“저희 회사 허락을 받았대요.”
“그럼 다호 씨한테 물어보는 것도 좋지 않아?”
조나단의 말에 서준은 상기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휴대폰을 들어 회사에 있을 안다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 라이언 감독과 조나단 윌은 영어로 풀이된 [범]의 가사를 살펴보고 있었다.
-응. 서준아. 무슨 일이야?
“다호 형. 조금 전에 팬 무비를 봤거든요. 브블 형들 노래랑 연극 영상이랑 합쳐진 거요.”
-……아하.
휴대폰 건너에서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안다호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봤구나. 햇빛빛 님 빨리 올리셨네.
“햇빛빛 님이요?”
익숙한 닉네임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우 이서준의 팬카페인 [새싹부터]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관리해 주고 있는 운영진들 중 하나였다.
-그래. 햇빛빛 님이 4회차 연극을 보셨대. 그거 보고 브라운블랙의 범이 발매되고 보니까, 너무 잘 어울려서 그때부터 문의를 하셨어. 그게 한 달쯤 전인가?
“와아…….”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무려 한 달 전부터 이 영상을 구상한 모양이었다.
-수익 창출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학교 허락도 받고 가수 1팀도 여러모로 홍보할 수 있으니 좋다고 했지.
휴대폰 건너에서 작은 마우스 클릭 소리가 들렸다. 아마 팬 무비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영상을 미리 건네주진 않았어. 형평성 문제도 있으니까. 햇빛빛 님도 당연히 괜찮다고 하셨고.
“그러면 밤새워서 만드셨겠네요.”
-그렇겠지. 편집본의 영상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편집될지도 모르고, 구상했던 장면에 필요한 각도의 영상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흙흙 님하고 물뿌리개 님하고 다 같이 만드신다고 하더라.
다호 형의 말을 들으며 더보기란을 보니, 그제야 제작자의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작 : 햇빛빛, 흙흙, 물뿌리개>
“……엄청 잘 만드셨어요.”
서준이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서준의 작품을 토대로 한 팬 무비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팬 무비는 배우 서준 리의 대표작, [쉐도우맨 시리즈]에 나오는 윌리엄과 진 나트라의 장면들을 모아 만든 [진 나트라 팬 무비]였다.
외국 팬이 만든 [진 나트라 팬 무비]는 음향이나 편집 퀄리티를 따져도 거의 영화급이라 ‘팬’이라는 글자를 떼어버리자, 라는 말들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왔던 [흘러가다]의 팬 무비도 있었고 (꽉 닫힌 해피엔딩이었다) 오래전에 출연했던 [악령]의 팬 무비도 있었다.
[이스케이프]와 합쳐서 좀비를 악령으로 만들어, 신의 힘을 빌려 활과 화살로 퇴마하는 설정으로 만든 [악령×이스케이프]는 꽤 인기가 많았다.
“정말로요!”
이렇게 팬들의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 서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안다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채널 준으로 댓글 달아드려. 엄청 좋아하실걸.
“네! 그래야겠어요! 아, 다호 형. 사이트는 괜찮아요?”
-괜찮아. 어찌어찌 돌아가긴 해.
조금 해탈한 듯한 안다호의 목소리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팬무비 Fan movie) 브라운블랙 ‘범’×이서준 ‘MOEB-436’]
-이게 뭐야……?
=진짜 멋지다ㅇㅁㅇ
=22 연극 보고 브블 노래 들을 때마다 이 생각 났는데…… 만들어주는 금손이 여기 계셨네!
=33 이렇게 찰떡같이 어울릴 줄이야;;; 39489번째 보는 중.
=44 진짜 들을 때마다 생각나서 1일 3범 중.
-근데 이걸 어떻게 만들었대?
=22 시간으로 따져도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햇빛빛, 새싹부터 운영진이던데 영상 미리 받았나?
=ㄴㄴ 새싹부터 게시판이랑 다른 영상에 제작기 나와 있음.
=4회차 연극 보고 계획 > 코코아엔터 문의 >한 달 구상 > 영상 업로드 > 2번 감상, 3번째부터 본격적인 제작 > 영상 공개
=+)흙흙, 물뿌리개 지원.
=+)원래 영화객 생방(서준이 작품)도 매번 챙겨보는데 이번에는 못 봤다더라ㅠㅠ
=정성 대단하다;;;
=근데 2번 감상했다는 거 너무 웃겨ㅋㅋ 팬 무비 제작할 거지만 일단 이서준 작품부터 즐긴다는 거잖앜ㅋㅋ
=역시 새싹ㅋㅋㅋ
-근데 이거 스포일러 되지 않으려나?
=범이라는 건 아는데 장산범이라는 건 모르지 않을까?
=ㅇㅇ그럴 것 같음.
-외국 새싹들 당황 중ㅋㅋ
=왜?
=노래 좋고 서준이 멋진 건 알겠는데 노래 가사가 어려움ㅋㅋ
=22 한국어 배운 해외 팬들도 당황 중;;; 새롭고 어려운 단어들이 마구 나오고 있어;;;
=외국 새싹 : 누에머리를 흔들며, 가 무슨 뜻이야?
한국 새싹1 : 누에라는 벌레가 있는데 그 머리를 흔들…….
한국 새싹2 : 야야, 그거 아니래!
한국 새싹1 : ????
한국 새싹2 : 사전) 누에머리 : 누에머리를 닮은 산꼭대기.
한국 새싹1 : ……;;;
외국 새싹 : ……;;;
=ㅋㅋ한국 새싹이 당황하는 거 아니고?
-나도 누에머리가 진짜 누에(벌레silkworm) 머리인 줄;;;
=누에머리를 흔들며 >> 산꼭대기를 흔들 정도로 (기세 좋게 내려온다)
=한국인도 당황스러운 옛 단어ㅋㅋㅋ
-436은 진짜 한국 작품인 듯.
=22 장산범도 알아야 하고 수궁가도 알아야 해ㅋㅋ
=33 자세히 몰라도 한국인은 대충 가사의 느낌? 을 이해하는데, 그걸 영어로 설명하는 건 힘듦.
-영어 번역 봤음? 범=tiger…… 범이 타이거라니…… 범이 타이거라니…… 맞는 말인데, 멋이 반으로 줄어든 느낌ㅠ
=22 범은 범이야.
=타이거. 타이거 이즈 커밍 다운.
=맞는 번역인데 웃겨ㅋㅋㅋ
=뭔가 외국인들이 입고 있는 한글 티셔츠를 보는 기분?
=ㅋㅋㅋㅋㅋ
* * *
감사의 댓글을 올린 서준이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 감독과 조나단 윌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들어보니 이번에는 팬 무비 편집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두 감독은 브라운블랙의 [범] 대신 어울릴 만한 배경음악이 있나, 찾아보기도 했다.
‘저 정도면 진짜 직업병이 아닐까?’
온갖 영상의 편집 구상을 떠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잘 보니 조금 달랐다. 조나단이 이것저것 의견을 내면 라이언 감독님이 조언을 하는 것 같았다.
이미 멋진 결과물이 눈앞에 있으니 그걸 피해서 연출을 구상해야 했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나단 윌이 인상을 쓰며 [MOEB-436]의 관객석 등장 신을 다시 돌려보았다.
“꼭 등장 씬만 쓸 필요는 없지.”
“아, 뒤쪽에도 더 있죠.”
라이언 감독의 말에 조나단이 아차, 하고는 뒷장면의 장산범을 살펴보았다.
‘아…… 가르쳐 주시는 거구나.’
조카인 데다가 재능도 있고 열심히 노력하고. 게다가 라이언 감독님의 촬영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본 조나단이니,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서준은 테이블 한쪽에 놓인 콘티들을 바라보았다. 저 종이들도 라이언 감독의 가르침 중에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준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감독님. 조나단. 내일 몇 시에 출국하세요? 괜찮으면 오늘 저녁은 저희 집에서 드실래요?”
“오후 비행기라서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요, 삼촌?”
“그래. 오랜만에 준의 부모님도 만나고.”
라이언 감독의 승낙에 서준이 활짝 웃으며 엄마에게 전화했다.
* * *
“내일이 준의 입학식이라고?”
“아, 미국 입학식은 보통 9월이죠?”
“응. 8월 아니면 9월이 보통이지.”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맛있게 구워지고 있었다.
한식이 좋은가 양식이 좋은가, 라는 서은혜의 물음에 한국에 왔으니 한식을 먹으면 좋을 것 같다고 라이언 감독이 답했다. 그 때문에 오늘 저녁 메뉴는 한식. 삼겹살이었다.
조나단도 라이언 감독도 익숙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쌈에 싸서 먹었다. 서준이 미국에 오면 꼭 한 번은 먹는 음식이니만큼 먹는 방법도 맛도 익숙해져 있었다.
“어떤 대학교인데?”
서준이 두 감독에게 한국예술대학교에 대해 설명했다. 좋은 교수님들이 있고 졸업생들과 재학생들 중에도 좋은 배우들이 많다고. 이번에 수강 신청한 강의들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도훈이 형이랑 다진이 누나랑 소영이 누나도 같은 대학교 출신이에요.”
“그렇구나. 여러 경험을 해보는 건 좋은 일이지.”
라이언 감독은 서준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길 바랐다.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된 서준에게는 그런 배움과 경험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온갖 평지풍파를 겪은 전생들의 기억을 가진 서준도 같은 생각이었다. 기억에 조금 남아 있고 삶의 책을 보면 나머지 기억도 제법 떠오르지만.
‘전생은 전생이고 나는 나니까.’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경험을 겪고 새로운 감정을 쌓아나가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전생의 경험이 조금 도움이 되겠지.’
처음 겪는 일이라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담담하고 능숙하게 경험할 수 있을 터였다.
서준이 웃으며 깻잎 위에 밥과 삼겹살을 올렸다. 오늘은 깻잎쌈이 맛있었다.
“근데 대학이라는 게…….”
조나단은 자신의 대학 생활을 떠올려봤다.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1순위로 지원하는 유명 대학이었지만 그만큼 온갖 성격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성별, 나이, 국적. 그 모든 게 뒤섞여 있는 데다가 원래 예술계통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온갖 괴짜들이 있었죠. 한국 대학은 좀 다른가요?”
조나단의 물음에 서은혜와 이민준이 으음, 기억을 떠올렸다.
“유학생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각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부딪힘은 있죠.”
“그런 건 어디든 똑같을 겁니다. 사람이 많으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그래도 우리 서준이라면 잘할 거예요.”
아빠의 말에 서준이 하하 웃었다. 라이언 감독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이상한 사람만큼 재미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이야기니까요. 좋은 인연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맞아. 나도 대학 때 다른 전공 애들하고 친해졌거든.”
조나단을 시작으로 각자 대학 때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십 대 때의 라이언 감독이 비리 교수와 한바탕 했다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도 감탄은 흘러나왔다.
“그런 일 때문에 영화제마다 수상성적이 나빴다는 의혹도 있어.”
“오호.”
조나단의 속닥거림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영화 관계자들일 테고, 만약 라이언 감독과 사이가 안 좋던 교수나 관계자와 친분이 있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삼촌은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말이야. 우리 아버지는 안타까우셨대. 실력을 제대로 인정 못 받는다고.”
그럼에도 라이언 윌 감독은 행동을 바꾸지 않았다. 사회문제를 주제로 영화를 찍고 대중들에게 알렸다. [브로드웨이 루머]처럼 널리 알려진 영화도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었다.
“그래도 실력은 숨길 수 없는 법이잖아?”
조나단이 자랑스러운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조나단 윌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라이언 윌이었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중지추. 주머니 속 못처럼, 뛰어난 실력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이다.
“맞아요. 우리 감독님이 최고죠.”
“맞아. 삼촌이 최고지.”
조나단과 서준이 히히히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그러게 말이야.”
이민준과 서은혜가 웃으며 물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조나단 윌이고 서로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처음 봤을 때가 학생 때이니 어리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밀이야.”
서준과 조나단이 슬쩍 라이언 감독을 한 번 바라보고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본인에게 말하기는 조금 쑥스러웠다.
“그럼 괜찮지?”
“응? 뭐가?”
“내일 입학식에 라이언 감독님도 참석하고 싶으시대. 조나단은 어때요? 괜찮아요?”
서준과 조나단이 속닥거리는 사이, 세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서준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좋지! 좋아요. 꼭 와주세요. 감독님!”
“저도 괜찮아요. 한국 대학은 처음 가 보는 거라 궁금하기도 하고.”
“입학식 끝나면 학교 구경도 하고 선배님들이 맛집도 가르쳐 주셨으니까 점심은 거기서 먹어요.”
“준의 선배라……!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한데?”
“저도 잘은 몰라요. 한 번밖에 못 만났거든요. 근데 좋은 분들인 것 같았어요.”
신이 난 서준과 조나단,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언 감독을 바라보던 이민준이 웃으며 서은혜에게 말했다.
“내일 떠들썩하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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