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63화
[SBC 워킹맨, 이번 주 배우 이서준 출연?!]
[이서준 배우 보신 분! 예고편에도 이서준이 있었다?]
[이서준 창작극 ‘MOEB-436’, 이제 2회 남았다!]
[연극 ‘MOEB-436’, 너튜브 공개까지 이제 1주일!]
[스포일러 조심! 이서준 ‘워킹맨’ 촬영 목격담!]
[바벨탑 최소영과 이서준의 인연!]
“이야. 들썩들썩하네.”
“…….”
“근데 우리 드라마에 대한 건 최 배우뿐이네. 그래도 뭐, 티저만 잘 만들어서 보여주면 그 시청자들 중에서 조금은 보지 않을까?”
“…….”
휴대폰으로 이리저리 연예부 기사들을 살펴보던 [바벨탑]의 신지혜 피디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SBC 방송국 내부에 있는 편집실. 편집기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조연출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떤 티저가 좋아?”
혼자 판단하면 객관성이 없을 것 같다며 신지혜 피디에게 끌려온 [바벨탑]의 조연출이었다.
“……이거 17번하고 21번은 똑같은 거 아니에요?”
눈 밑에 그늘이 가득한 조연출의 물음에 신지혜 피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반박했다.
“아니지. 여기 17번은 이 부분에서 긴장감이 느껴지도록 조금 속도를 늦췄잖아. 21번은 속도감을 넣으면 좋을 것 같아서 빠르게 돌렸고.”
“다 똑같아 보여요. 선배.”
“아니지. 잘 봐봐.”
신지혜 피디가 조연출의 어깨를 붙잡았다. 조연출의 어깨가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으아아아. 선배. 그냥 아무나 고르면 안 돼요? 아니면 좀 쉬었다 하든가요…….”
신지혜 피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안돼. 아직 바벨탑 촬영도 많이 남아 있고 홍보 영상 편집에 쓸 시간도 거의 다 썼으니까 빨리 제일 좋은 영상을 만들어서 넘겨야 한다고. 국장님도 계속 연락하시잖아.”
그거야 조연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21개째의 [바벨탑] 홍보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상의 개수만 21개지 비교해서 보려면 여러 번 반복해서 봐야 했기 때문에 수십 번은 비슷비슷한 영상을 본 것 같았다.
“문자가 아니라 영상으로도 가능하다면 게슈탈트 붕괴가 일어날 것 같아요.”
본방 편집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초췌해진 조연출의 얼굴에 신지혜 피디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끝났어요?!”
“다른 구성 티저도 있으니까 그거 보자. 9개 정도 만들어놨어.”
히이익!
조연출이 기겁하며 마우스를 달칵달칵 눌러대는 신지혜 피디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도대체 얼마나 홍보 영상에 진심인 거예요?”
“드라마 성공해야지. 그래야 너도 입봉하고 나도 새 드라마를 좋은 조건으로 맡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조건도 좋잖아. 드라마 홍보영상이 나온다고 얼마나 보겠어. 그냥 채널 돌리지. 이서준 배우로 시청자들 모아놨을 때 시선을 확 끌어야 해.”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어 조연출은 입을 다물었다.
모니터에서 새로운 티저 영상이 재생되었다. 다시 고난의 시간이 돌아왔다.
조연출이 반쯤 감긴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서준 배우가 카메오로 출연하면 좋겠네요. 그러면 이렇게 홍보 영상에 열 올릴 필요도 없을 텐데…….”
홍보 영상이 뭐냐.
그냥 [배우 이서준, 카메오 출연!]이라는 기사 하나만 내도, 어뷰징 기사들이 좌르르르 뜨고 알아서 홍보해 줄 터였다.
“시청자들도 알아서 몰려올 테고요.”
“그러게. 근데 그럴 일은 없잖아. 최 배우한테 데려오라고 부담 줄 수도 없고. 그러니까 홍보 영상이나 잘 골라 봅시다. 후배님.”
“……부처님, 하느님, 천지신명님! 제발 여기서 탈출하게 해주세요!”
조연출은 두 손을 모으고 진심을 다해 기도했다.
그 기도를 들었는지, 띠롱띠롱 신지혜 피디의 휴대폰이 울렸다.
“국장님인가?”
신지혜 피디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하는 드라마국 국장이었으니, 이번에도 티저 언제 완성되냐는 연락이 분명했다.
신지혜 피디가 조연출에게 눈짓했다.
조연출은 초췌한 얼굴로, 그러나 순순히 ‘다른 버전의 홍보 영상’들을 클릭해 보기 시작했다. 힘들긴 하지만 시청률을 위해서니 어쩔 수 없었다.
‘드라마가 망하는 것보다야 지금 조금 힘든 게 낫지.’
생각보다 좋은 상황에 조금 투정을 부려본 것뿐이었다.
조연출이 영상에 집중하는 사이, 신지혜 피디는 연락한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응? 최 배우네?”
이번 드라마의 여주인공, 배우 최소영의 연락이었다.
“네. 최 배우. 무슨 일이에요?”
-감독님.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좁고 조용한 편집실.
최소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괜찮아요.”
-저번에 카메오를 넣으면 좋을 것 같다던 배역 있잖아요.
카메오.
그 단어에 편집실의 공기가 멈춰 버렸다.
조금 전까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최소영, 카메오, 그리고……
어떤 예감이 들었다.
아니, 확신이었다.
숨을 쉬는 것도 멈춘 신지혜 피디와 조연출이 통화 중이라고 표시된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감독님? 신 감독님?
“아, 네. 네! 있었죠. 카메오 캐릭터 있었죠!”
신지혜 피디의 다급한 손짓에 조연출이 급하게 테이블 구석에 처박아 놓은 [바벨탑]의 콘티를 가져왔다. 각 화에서 어떤 장면을 뽑아내 티저로 만들 것인지 궁리하기 위해 놓아둔 것이었다.
팔랑팔랑 종이가 넘어갔다.
신지혜 피디는 각 화의 중요 장면을 뽑아 만든 콘티를 빠르게 살폈다.
카메오는 홍보에도 도움이 되니, 촬영에 들어가기 전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배우들에게 ‘이 캐릭터들은 카메오로 생각 중이니, 많은 섭외 부탁드립니다.’ 하고 말했었다.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신지혜 피디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여, 여러 캐릭터가 있었는데 어떤 걸 말하는 건지……?”
-네. 그중에…….
최소영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신지혜 피디는 종이를 넘겼다.
조연출이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 일련의 상황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숨소리라도 냈다가는 모든 게 꿈처럼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콘티를 넘기던 신지혜 피디의 손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이거다.’
카메오가 연기하는 배역은 보통 작품에 짧게 나오면서도 인상 깊은 캐릭터였는데, [바벨탑]에서 ‘그 배우’에게 어울리는 배역은 이것밖에 없었다.
휴대폰 건너에서 들려오는 최소영의 말도 신지혜 피디와 같았다.
-배우 나이가 캐릭터 설정보다 적은데 괜찮을까요?
“네. 네. 당연히 되죠! 딱히 누군가를 모델로 삼은 캐릭터는 아니니까요! 단역이니 얼마든지 변동 가능합니다!”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신지혜 피디가 뒷말을 삼켰다.
-작가님도 괜찮으시겠죠?
캐릭터 설정이 바뀐 이상 대사도 바뀌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그 배우’만 나와준다면 대본을 갈아엎어도 괜찮을 터였다.
“당연하죠! 제일 기뻐하실 거예요.”
하하호호 밝은 통화가 이어졌다.
그 대화를 바라보고 있던 조연출은 답답한 듯한 표정으로 펜을 들어 콘티에 글자를 써넣었다.
[그래서 카메오로 누가 나온대요?!]
아차.
신지혜 피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걸 아직까지 듣지 않았다.
‘그 배우’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예상외로 다른 배우일 수도 있었다.
‘그럼 안 돼……!’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져 신지혜 피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런데 어떤 배우가 카메오로 나와주신다고 하셨나요?”
-아. 그걸 아직 말씀 안 드렸네요!
휴대폰 건너에서 최소영이 민망한 듯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준 배우예요. 작품이 마음에 들었대요.
……!
역시나!
예상하고 있었지만 확신하고 있었지만, 직접 그 이름을 들으니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짜릿짜릿해진 신지혜 피디와 조연출이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숨이 가빠졌지만, 소리를 냈다가는 모든 게 환상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나머지는 이서준 배우 소속사하고 연락하는 편이 좋겠죠?
“네, 네!”
-그럼 다음 촬영 때 봬요. 신 감독님!
“고마워요! 최 배우! 편히 쉬어요!”
진심이 가득 담긴 신지혜 피디의 목소리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고 곧 전화가 끊겼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은 신지혜 피디와 조연출의 눈이 마주쳤다. 두 쌍의 눈동자가 환희와 기쁨, 벅참으로 일렁였다.
참을 수 없었다.
“으아아악!!”
콘티가 허공으로 던져져 사방으로 흩어짐과 동시에 환호성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그 커다란 소리에 반사적으로 저장 버튼을 누른 양옆 편집실의 피디와 조연출들이 뛰쳐나와 벌컥, [바벨탑] 편집실의 문을 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다 끝났어요! 우리 다 끝났다고요……!”
“끝났어…… 으흐흐…….”
사방팔방으로 날려진 종이 쪼가리들이 보였다.
편집실 바닥에 주저앉은 두 여자는 이젠 거의 흐느끼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그런 두 사람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저번 주부터 계속 티저만 만들고 있다더니…….”
“괜찮아? 좀 쉬었다 하는 게 어때?”
너무 열심히 한 모양이었다.
“으흐……흐흐……흐하하하……!”
음.
이미지를 위해서 문을 닫아줘야 할까.
흐느끼다가 이제는 웃기 시작하는 신지혜 피디와 조연출의 모습에 잠시 그런 고민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지나가다가 멈춘 사람들도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신지혜 피디가 연락을 받지 않아, 편집실까지 찾아온 드라마국 국장이 말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길을 터줬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내가 좀 심했나?”
하루가 멀다 하고 가장 멋진 티저를 만들라고 재촉했던 드라마국 국장이 실성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반성했다. 그래도 다 드라마 잘되라고 한 일이었으니 금방 털어냈다.
“……국……장님!”
으하하하, 웃던 신지혜 피디가 국장과 눈을 마주치자 웃음을 멈추었다. 조연출도 동시에 입을 다물자 분위기가 싸해졌다.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아, 국장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주춤거렸다.
“국장님!”
신지혜 피디가 벌떡 일어나 국장에게로 다가왔다. 눈알이 번들거리는 모습에 국장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피디들도 뒷걸음질 쳤다.
“어, 어. 그래. 왜?”
“우리 드라마 이제 끝났어요!”
“어, 어?”
“홍보 이제 안 해도 돼요! 촬영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이게 홍보 영상을 잘 만들었다는 소리인지, 홍보를 안 하겠다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지자 신지혜 피디가 벅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서준 배우가 우리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한대요!”
“……? 누구?”
갑작스럽게 언급된 이름에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은 국장이 되묻자, 신지혜 피디가 환호성을 질렀다.
“이서준 배우요! 이서준 배우!”
안쓰럽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경악으로 바뀌고 국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 정말로?”
“네! 조금 전에 최소영 배우한테서 연락 왔어요! 카메오로 출연한대요!”
사람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신지혜 피디와 조연출의 격렬했던 반응이 이해가 갔다.
“……미친.”
“……잠깐만. 이서준 배우가 우리 방송국에서 드라마 하는 건 처음 아니야?”
그 말에 모두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떴다.
KBC는 [재수사]와 [내의원].
MBS는 [봄이 돌아왔다].
하지만 SBC는 예능 [워킹맨]뿐. 드라마는(카메오지만) 처음이었다.
이서준이 8살 때, [재수사] 카메오로 TV에 출연했을 때부터 무려 12년이 흘렀는데 말이다.
처음으로 그 기회를 잡게 된 SBC 드라마국 국장이 눈을 번뜩였다.
“신 피디.”
“네!”
“그 배역 분량 못 늘리나? 요새 카메오라도 제법 분량 챙겨주잖아.”
카메오로는 아깝다.
할 수만 있다면 주연급으로 분량을 늘리고 싶었다. [봄이 돌아왔다]도 4부작에서 6부작으로 늘지 않았나.
건너건너 듣기로는 수정한 작품이 이서준 배우의 마음에 들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신지혜 피디가 고개를 저었다.
“늘어날 건덕지도 없어요.”
“전혀?”
“전혀요.”
단호박 같은 신지혜 피디의 말에 국장이 설명을 요구했다. 신지혜 피디는 바닥에 떨어진 콘티를 찾아, 국장에게 이서준 배우가 연기할 캐릭터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네.”
쩝.
신지혜 피디의 말대로 늘어날 구석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국장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분량을 늘릴 수 없으면 이서준의 이름을 넣어 드라마 [바벨탑] 자체를 홍보하는 수밖에 없겠네. 콘티를 보니 이게 마지막회 같던데, 홍보만 잘하면 첫 화부터 보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네. 어느 편에 나온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냥 ‘이서준 배우가 나온다.’ 정도로만 홍보하면 이서준 배우가 언제 나올지 궁금해서라도 본방 사수 할 것 같습니다.”
신지혜 피디의 말에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홍보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서준의 카메오 출연을 알릴 수 있을까.
물론 기사 하나만 내도 금세 알려지겠지만, 무려 SBC 드라마 첫 출연이 아닌가. 가장 눈에 띄게, 가장 충격적이게 홍보하고 싶었다.
“근데 최소영 배우가 이 정도로 친했구나.”
“친분도 친분이겠지만 작품도 마음에 들었겠지.”
“바벨탑 작가가 누구라고? 차기작은 뭐한대?”
“최 배우는? 벌써 다음 작품 잡혔대?”
홍보 방법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국장과 신지혜 피디와 일부 사람들뿐.
나머지는 다음 기회를 노려 이서준 사단으로 들어갈 것 같은 최소영 배우와 이서준의 마음에 든 것 같은 [바벨탑] 작가를 노리는 듯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바벨탑]의 조연출이 손을 빼꼼 들었다. 여러모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시선이 쏠렸다. 눈을 데굴데굴 굴린 조연출이 입을 열었다.
“이번 주 워킹맨 방송에 넣는 건 어떨까요?”
오.
사람들의 눈이 번쩍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