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53화
[범]
[범 내려온다]
느릿하고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사냥을 앞둔 범처럼 조용한 듯 읊조리는 박서진의 목소리.
[범이 내려온다]
한 글자 한 글자 조용히, 그러나 힘이 실린 것이 느껴지도록 내뱉는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승이 내려온다]
그러다 천천히 박자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느릿하게 커다란 발을 디디던 범이 사냥감을 향해 다가가듯.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 귀 쭉 찢어지고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두웅!
산에서 내려오는 범의 발걸음에 맞춰 은근히 들리던 장구와 북, 거문고의 선율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하며 노래가 시작되었다.
브라운블랙 네 사람의 목소리를 넋 놓고 듣고 있던 송유정과 임예나의 귀에 다시금 후렴 부분이 들려왔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다시 한번 읊조리듯 나오는 부분에 송유정이 눈을 끔벅이다 입을 열었다.
“어…… 나만 장산범이 떠오르는 거야?”
“……아니. 나도 그래.”
이 주 전, 그날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옆에서 등장했던 장산범이 새하얀 머리칼과 얼룩덜룩한 두루마기를 나풀거리며 느릿하고 이질적인 걸음걸이로 내려가던 강렬한 모습이.
“와…… 이거 미리 계획하고 한 건가?”
“역시 이서준 사단.”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 * *
[브라운블랙, 싱글앨범 ‘범’ 발표!]
[브라운블랙, 너튜브 ‘범’ MV 공개!]
[판소리와 가요의 콜라보! 브라운블랙의 ‘범’!]
-브블 새 노래 좋더라.
=22 판소리 들어간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되게 느낌 좋음.
=333 생각보다 찰떡같이 어울림.
=444 난 범 내려온다 부분 계속 따라부르고 있어ㅋㅋ
-여기서 수궁가를 듣게 될 줄이야;;;
=수궁가가 뭐야?
=토끼의 간. 동화책 있잖아. 용왕이 아파서 약(토끼의 간) 구하려고 육지에 간 자라가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왔는데 토끼가 거짓말하고 다시 육지로 돌아가는 거.
=제목이 토끼의 간ㅋㅋ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었는데 제목이 되게 직설적이다ㅋㅋㅋ
=수궁가 중에서도 [범 내려온다] 부분. 자라가 토끼(토선생) 부르려다가 턱이 아파서 호랑이(호선생)를 잘못 불러버림.
=오호.
-여기 판소리 명창이 부른 영상(링크)
=편곡 했나 보네. 부르는 방법이 다름.
=내가 판소리까지 듣게 되다니ㅋㅋㅋ
-와…… 와…… 여기서 이서준 사단이……!
=?? 뭔데? 갑자기 이서준이 왜 나와??
=연극 안 봄?
=……연극 봤다고 자랑하냐?
=ㅈㅅ 그럼 말 못 함.
-?? 브블 신곡 글에 이런 글이 나오기 시작했음.
=도대체 뭐길래 연극 본 사람들은 다들 이런 반응이야??
* * *
연극 [MOEB-436]은 6회차 공연이 끝나고, 날짜도 벌써 1월 말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월요일로 은하수센터는 휴관 일이었지만, [436]팀은 제2 소극장에 모이게 되었다.
“나 하루종일 이것만 듣고 있어.”
김주경과 이솔이 일주일 전에 발매된 브라운블랙의 신곡, [범]의 후렴 부분을 따라부르며 발을 까딱거렸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도 모르게 ‘범 내려온다.’ 부분을 따라부르고 있었다.
“역시 브블.”
음악과 아이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짝짝 박수를 쳤다.
“판소리를 이렇게 넣다니 생각도 못 했어.”
“그러니까 말이야. 대중들 반응도 좋더라.”
대기실에 모여 [범]을 틀어놓고 아직 오지 않은 팀원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범]의 제작에 한몫한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아직 황예준이 곡의 방향을 잡지 못할 무렵, 황예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서준의 연극 대본이었다.
SF에서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관객석에서 등장할 거라는 설명도 인상 깊었다. 간단히 ‘이렇게 연기할 거다’ 하고 보여준 서준의 연기에 황예준의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졌다.
그렇게 ‘호랑이’라는 아이디어에 확 꽂혀 버린 황예준은 곧바로 호랑이와 관련된 전통 악기, 노래, 이야기 등에 대해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빈번하게 나왔던 옛날이니 뭔가 하나쯤은 나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렇게 발견한 것이 바로 판소리 [수궁가].
황예준은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한 대목을 가져와 노래 후렴 부분에 넣어 신곡 [범]을 만들었다.
브라운블랙의 신곡 [범]은 나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너튜브에 업로드된 뮤직비디오도 엄청난 조회 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주부터는 음악방송 무대에서도 1위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부분 들을 때, 장산범 등장 장면이 딱 떠오르지 않아?”
“맞아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딱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김채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강재한이 서준에게 물었다.
“서준아. 이거 계획한 거야?”
“아니. 형들한테 한 번 보여주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느낌이 비슷할 줄은 몰랐지.”
그것도 아주 잠깐의 연기.
그 이후로는 서준도 브라운블랙도 연극 준비와 앨범 준비 때문에 서로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다.
“역시 이서준 사단……”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통하는 정도인가 봐요.”
감탄하는 팀원들에 서준이 민망한 듯 뒷목을 매만졌다.
“다들 먼저 와 있었네!”
“안녕하세요!”
그렇게 브라운블랙의 [범]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팀원들도 쏙쏙 도착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자, 잠시 나갔다가 들어온 서준이 도착한 팀원들을 둘러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너튜브에 올릴 영상 촬영할 예정인 거 다들 알지? 은하수센터 직원분들도 도와주실 테지만 우리도 최대한 열심히 해보자.”
“그래.”
“네!”
“그럼 먼저 오늘 촬영을 도와주실 감독님들을 소개할게.”
서준의 부름에 세 사람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436]팀 여러분.”
[436]팀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에 있는 감독들을 바라보았다. 연극 [MOEB-436]을 촬영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찾아보았던 얼굴들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놀라는 아이들의 표정에 우정한 감독, 최대만 감독, 최민성 피디가 빙그레 웃었다. 연극 [거울]을 촬영하고 편집했던 감독들이었다.
“아!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놀란 것도 잠시, [436]팀이 기쁜 표정으로 꾸벅 인사했다. 감독들도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연극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를 최대한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어요.”
우정한 감독이 말했다.
“롱테이크 촬영이라고 하죠? 한 장면을 짧게 여러 번 촬영하는 보통과는 다르게 길게 잡아 연극의 생생함을 살릴 예정입니다. 그래서 연기 도중 맥이 끊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영화와 같이 컷컷으로 나뉘는 보통의 촬영이 뮤직비디오라면, 오늘 촬영은 음악방송 무대처럼 끊임없이 연극을 진행하면서 촬영할 예정이었다.
최민성 피디가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말했다.
“크게는 두 버전으로 촬영할 예정입니다. 배우분들의 표정까지 보이는 클로즈업 샷과 무대 전체가 보이는 풀샷으로요. 클로즈업 샷 촬영 때는 등장인물마다 카메라가 하나씩 배정될 겁니다. 물론 무대 위까지 저희가 올라갈 예정이고요.”
“꼭 예능 촬영 같네요.”
서준의 말에 최민성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 담당 카메라가 있어 한 사람의 표정과 반응을 찍는 예능 촬영과 비슷했다.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할 거예요. 그러니까 클로즈업 샷을 찍을 때는 표정 연기와 시선 처리에 주의해 주세요.”
연기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연지와 김영찬이 침을 꼴깍 삼켰다.
“롱테이크 촬영이긴 하지만, 몇 군데는 끊어서 갈 예정입니다. 진짜 유진의 등장이나 우주선의 추락, 장산범의 등장 같은 부분 말이죠.”
최대만 감독의 말에 [436]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연극상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 조명을 끄는 장면이었다.
[436]팀에게 충분히 설명해 준 우정한 감독이 말했다.
“그럼 촬영 준비 시작할까요?”
그 말에 연기팀을 분장시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분장팀 직원들이 연기팀 아이들에게 의상을 건넸다. 박민형과 김채연은 조명&음향실로 향했고 이솔과 미술팀은 세트장 확인을 위해 무대로 향했다.
그렇게 너튜브 영상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배우 이지석, 할리우드에서 기쁜 소식 전해!]
[새로운 할리우드 스타 예약! 배우 김종호 출국!]
[연극 ‘MOEB-436’ 내일 2차 티켓팅 예정!]
-헐. 이지석 오디션 합격!
=될 줄 알았지만 엄청 좋네! 촬영 잘하고 와요!
-김종호 배우 잘 다녀오세요!
=22 영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지석이랑 김종호 같은 영화인가?
=ㅇㅇ그런가 봄.
=꼭 봐야겠다!
-2차 티켓팅! 2차 티켓팅! 2.차.티.켓.팅!
=이번엔 꼭 성공하고 만다……!
-영화객 님ㅋㅋ 동생분한테 마우스를 맡긴대ㅋㅋ
=영화객님 동생분 경력 : 브블팬으로 콘서트 다수 참가.
=그 피켓팅을?!?
=오오…… 비장의 무기까지! 이번엔 성공하시려나?
=무슨 트로트의 황제 콘서트 대신 구매해 주는 손주 같은 느낌ㅋㅋㅋ
-근데 동생분은 서준이 연극 안 보신대?
=1차 티켓팅으로 보셨댘ㅋㅋㅋ 그래서 지금은 영화객 님 약올리고 계시다고ㅋㅋ
=이번에도 되시면 진짜……. 대.단.
* * *
인천국제공항.
박지오의 에이전트가 시계를 보며 박지오와 가족들을 기다렸다.
원래라면 에이전트가 직접 마중 갈 예정이었지만, 공항까지 친구들과 함께 올 거라고 해서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근데 박지오 선수 말입니다. 좀 더 일찍 가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스페인에서 여러 수속을 도와줄 부하 직원의 말에 에이전트가 턱을 매만졌다.
보통 재능이 있는 선수들은 십 대 때 해외 유소년팀에 들어가 해외축구를 익히며 활동을 시작한다. 아무래도 한국축구 풀이 작기도 하고, 해외가 목표라면 어릴 때부터 훈련이나 외국 선수들의 플레이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으니까 말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현재 고교 축구 선수 중 가장 잘하는 박지오는 지금 프로에서 가도 가뿐히 제 몫 이상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 구단 쪽에서도 노리는 곳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실력이었으니, 주위의 자신보다 못하는 또래 선수들에게 경쟁심을 가지기엔 쉽지 않았을 거다. 경쟁이란 건 비슷하거나 더 높은 실력의 선수들을 보고 투지를 불태우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좀 더 대단한 선수들을 바로 옆에서 보고 경험해야 한다.
박지오에게 명함을 주었던 에이전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며 유럽행을 권했다.
한국에 있으면 안 된다, 내 자식이었으면 당장 갔다, 부모가 선수의 앞길을 막고 있다, 자신만 믿으면 곧바로 프로로 데뷔할 수 있다.
계약을 앞두고 온갖 말이 오간 끝에,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한 현 에이전시가 선택받았다.
“지오가 예상한 것보다 실력이 부쩍부쩍 늘더라고.”
그 당시 유럽행을 선택했으면, 지금쯤이면 +10 정도 실력이 향상하지 않을까, 판단했던 에이전트였는데 최근에 한 테스트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15 정도더라.”
“오…….”
“거기다 부상도 하나도 없고 피로가 쌓인 곳도 하나도 없이 깨끗하고. 메디컬 부문에선 진짜 감탄만 나왔지. 지오 몸 관리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으니까.”
얼떨결에 정답을 맞혀 버린 것도 모르는 에이전트에게 부하 직원이 물었다.
“그래도 유럽에서 지냈다면 더 늘지 않았을까요? +20 정도요.”
“글쎄. 아닐걸? 우리 그때도 지오의 재능이 거의 최상급이라고 판단했었잖아.”
“음. 그랬죠.”
최상급 재능에 최상급의 환경으로 판단 내린 예상치가 +10이었다.
하지만 박지오는 에이전시의 추측을 뒤엎고 한국에서 그것보다 훌륭히 성장했다. 스페인에서의 활약이 정말 기대될 정도로.
“어렸으니까 멘탈도 영향을 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일찍 유럽에 갔다가 적응을 못 하고 향수병에 걸리는 어린 선수들도 꽤 있으니까 말이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박지오 선수에겐 한국에 남는 게 좋은 판단이었네요.”
“그렇지. 알고 보니 최시혁 선수하고도 아는 사이였더라고. 그러면 여러 조언도 들었을 테고.”
“계약도요.”
“으음.”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뒷목이 뻐근했다.
계약서도 얼마나 철저하게 검토하는지 지인들 중에 이쪽 관계자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그게 현재 독일 1부 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최시혁 선수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조사해 봐도 만날 계기가 없는데 말이야. 신기해.”
최시혁과 박지오는 5살 정도 차이가 나는 터라 만나기에도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로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한 에이전트와 부하 직원이었다.
“아. 저기 오시네요.”
박지오와 쌍둥이 형 박지후, 그리고 부모님이 캐리어를 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 쌍둥이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명이 있었는데, 아마 친구들인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형!”
박지오가 에이전트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제부터 스페인에서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은 하나도 없는 밝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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