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452화 (452/1,055)

0살부터 슈퍼스타 452화

그것이 입을 열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귀가 트인 듯 아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보.

-이.보.시.

고장 난 기계처럼 뚝뚝 끊어지던 짐승 같은 목소리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관객들의 시선을 휘어잡고 숨소리를 짓누르고 심장을 떨리게 한 그것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보시오.

마침내 그것은 자연스럽게 완성된 말을 내뱉었다.

그 모든 게 이질적이며 기이했다.

먼 산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듯하기도 했고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정말로 환청 같은 목소리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걸어가던 그것이 무대와 관객석 사이에 준비된 계단을 올라 무대 위로 향했다. 방 안에 있는 보부상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보부상의 앞날을 예측한 관객들의 심장이 불안으로 격렬히 뛰었다.

“이보시오. 문 좀 열어주소.”

조금 전, 주모의 입에서 들었던 대사를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관객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새하얀 그것이 보부상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보부상이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순간 소극장 전체가 어두워졌다.

숨 막히는 어둠 속, 탁! 탁! 하고 조금 전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던 생명이 사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털이 삐죽 서고 소름이 돋았다.

번쩍.

뒷간과 부엌 쪽에 불이 들어왔다. 보부상의 물음에 주모가 대답했다.

“우리는 요 뒷산 이름을 따서,”

번쩍.

붉은빛이 아래에 새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그것이 나타났다. 방 안 벽에 짐승의 발톱 자국이 가득했고 이불 사이로 축 늘어져 있는 보부상의 팔과 다리가 보였다.

“장산에 사니,”

뜸을 들이며 애태우는 주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관객들의 시선은 그것의 창백한 얼굴과 생기 하나 없는 노란색 눈동자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고개를 꽉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장산범이라고 부르지.”

!!

그 말에 송유정과 임예나, 그리고 관객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막이 내려오고 관객석이 밝아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제야 따로 동떨어져서 보이던 이야기가 하나로 맞춰지는 듯했다.

탄성조차 내뱉지 못한 관객들이 여운에 빠진 사이,

배우들은 커튼 뒤에서 커다란 숨을 내쉬었다. 박연지와 김영찬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436]팀원들이 무대 뒤에서 나와 배우들에게 생수를 나누어주었다.

“와. 땀 봐.”

미술팀 2학년이 놀라며 물을 마시고 있는 박연지에게 휴지를 건네주었다. 조금 전까지 관객들의 애를 태우며 ‘장산범이라고 부르지.’ 하고 말하던 배우는 어디에 갔는지 물병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주모에게 질문했던 김영찬도 떨리는 손으로 벌컥벌컥 물을 마시다가 켁켁거렸다. 목에 걸린 것이었다. 음악팀 1학년이 그런 김영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무대에 선 게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어른 하나 없이 온전히 학생들만 서고 관객들이 많이 있다는 부담감에 둘 다 생각보다 엄청 긴장한 듯했다.

“둘 다 괜찮아?”

박연지와 김영찬이 김주경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목을 축이고 있는 3학년들은 전혀 긴장한 것 같지 않았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저런 게 연륜인가 싶었다.

고작 1, 2년 차이지만 말이다.

걱정하는 3학년들의 모습에 박연지와 김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근데 연말 공연 때보다 엄청 떨려서 실수할 뻔했어요.”

귀여운 후배들의 모습에 3학년들이 웃었다.

“연습보다 잘하던데? 둘 다 실전파 아냐?”

“익숙해지면 나중엔 재미있을 거야.”

한지호와 강재한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희가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라고 묻는 후배들을 보며 웃던 서준이 커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커튼 너머로 정신을 차리고 술렁이는 관객들이 느껴졌다.

[(선) 중급천사의 부채를 발동합니다.]

[(선) 중급천사의 부채]로 남아 있던 모든 마기를 날려 보낸 서준이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커튼콜 준비할까?”

“그래.”

“네!”

물병과 휴지를 치운 배우들은 커튼 앞에 일렬로 서자, 커튼이 천천히 올라갔다.

장산범이라니! 안드로이드라니!

울렁이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려보던 관객들이 다시 막이 오르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두루마기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떨던 관객들은 곧 생기가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서준을 보며 안심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대 위에 선 배우 이서준은 생기는커녕 살아 있는 것인가 의심될 정도로 창백하던 조금 전의 모습과 다르게, 지금은 생기는 물론이고 스타다운 아우라가 넘치고 있었다.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의 차이였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 배역에 빠져들어 능숙하게 연기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주모와 보부상2는 앳된 얼굴로 긴장한 듯 이곳저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TV나 영화에서 종종 봤던 3학년들은 자신의 연기에 만족한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배우들이 고등학생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분명히 이 연극을 기획하고 만든 것이 고등학생들이라는 걸 알고 왔는데도 관객들은 새삼 그 사실에 깨달은 듯 놀라고 말았다.

“와…….”

어디선가 그런 감탄이 흘러나오고 어디선가 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

불길이 번지듯 퍼져나간 박수 소리가 이내 제2 소극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박수 소리에 담긴 감탄과 찬사에 배우들은 활짝 웃으며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 * *

“와…… 장산범이라니 생각도 못 했어요.”

“저도요. 그때 우주선이 추락해서 지구에 온 걸까요?”

“그런가 봐요. 어?! MOEB를 거꾸로 하니까 범이에요!”

제2 소극장 건물 로비.

[MOEB-436]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일 텐데도 옹기종기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게, 지금 연극 [MOEB-436]을 본 사람들은 졸업 공연 당시 학생들, 가족들과 여기 이곳에 있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작품을 보면 그 속에 담긴 떡밥들과 감탄이 저절로 나왔던 이야기,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했던 배우들의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인터넷에 올려도 댓글을 쓰면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고 전부 까놓고 후기를 올리기는 너무 이르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바로 옆에서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들 서준이 팬분들이라 마음이 편해요.”

“그죠?”

보통 영화라면 이럴 수 없겠지만, 치열할 경쟁을 뚫고 티켓팅한 관객들이라서 그런지 다들 열린 마음으로 같은 심정으로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아무런 대화 없이 이 자리에서 벗어나면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지 못할 게 분명해서 더욱 그랬다.

“빨리 영화객 님이 리뷰 해주셨으면 좋겠네. 아니, 연극객인가?”

그런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여유로운 두 사람.

운 좋게 친구끼리 첫 공연을 보러와 언제든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 있는 송유정의 말에 임예나가 으음, 신음을 흘렸다.

“근데 영화객 님이 운이 없으셔서…….”

“……아하.”

매번 시사회에서 광탈하는 영화객을 떠올린 송유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배우 이지석,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 출국!]

[연극 ‘MOBE-436’ 벌써 4회차! 연일 호평!]

[연극 ‘MOBE-436’ 후기, 고등학생 연극이 아닌 것 같더라.]

-오. 이지석 출국했네. 오디션 잘 보려나?

=걱정 안 함ㅎㅎ 앞으로 한국 배우들 많이 나갔으면!

=이서준은 또 언제 할리우드 영화 찍으려나.

-내가 연극을 봐야 호평이든 비평이든 할 거 아니야ㅠㅠ

=22 좀 보여줘라ㅠㅠ 3월까지 어떻게 기다려.

=436. 436. 하고 울지요ㅠㅠㅠ

=2차 티켓팅을 노리는 수밖에ㅠㅠ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러지ㅜ

-후기를 보고 싶으면서도 안 보고 싶은 이 마음.

=스포일러 없는 후기 모아옴 (링크)(링크)(링크)(링크)

=근데 중요한 게 다 빠져서 전부 비슷비슷해ㅠㅠㅋㅋ

-너튜브 영상은 언제 올려준대?

=2월 마지막 공연 끝나고 1시간 뒤에.

=3월이 아니라 다행ㅠㅠ

-미리보기 없음?? 돈 내고 볼게요ㅠㅠ

=라이브로 해줘ㅠㅠ 카메라만 설치해 주면 내가 알아서 볼게ㅠ

-영화객 님 티켓팅 성공하셨대?

=ㄴㄴ 했으면 1월 초 리뷰 때 말했겠지.

=지인 피셜. 1초 광탈.

=ㅋㅋㅋㅋㅋ

[브라운블랙, 오늘 오후 6시 새 싱글 앨범 공개!]

[코코아엔터, 3월 배우 이서준 포토북과 응원봉 새로운 모형 판매!]

[코코아엔터, ‘예약은 2월 초순 예정!’]

-오. 브블 신곡 나옴?

=나오자마자 들어야지. 믿듣블.

-포토북이라니……! 포토북이라니……!(손 덜덜 짤)

=어렸을 때 사진부터 최근 사진까지 들어간다고 함. 최대한 미공개 사진들만 모았다고.

=으아아아! 돈! 돈을 모아야 해! (저금통 탈탈)

-3월 판매 예정이면 3월 10일이겠네.

=22 서준이 생일에 맞춰서 나올 듯.

=생일 이벤트를 하려고 했더니, 생일 이벤트를 해주네ㅋㅋㅋㅋ

=22 왜 서준이 생일인데 우리가 선물을 받는지ㅠㅠ

=33 선물 좀 받아라. 서준아ㅠㅠ

=10년 넘게 말하고 있지만 콬아와 서준이가 안 들어줌ㅠㅠㅋ

-연극 광탈(2차도 광탈 예정ㅠ)로 다친 마음 포토북으로 달래네.

=콬아 병 주고 약 주는 솜씨가 대단해졌다.

=근데 운 좋은 사람들은 약(연극) 먹고 약(포토북) 먹겠지……

=진심 부럽다ㅠㅠ

-설마…… 포토북 선착순은 아니겠지?

=콬아가 생각이 있으면 아니겠지;;;

=22 예약이니까 알아서 물량 맞출 듯.

=물량 없으면 전쟁 나는 거고(진심. 궁서체)

=22 다른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하게 포토북 보는데…… 나만 없어.

=와…… 상상만 해도 최악이다;;;;

=연극도 광탈인데 포토북까지 그러면 진짜 울 것 같다.

=22 악몽 꿀 것 같다.

=악몽 : 이런. 어떡하지? 너 바로 앞에서 끊겼어.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여기까지! 뒤에 돌아가세요! (쩌렁쩌렁)

=그것보단 이게 더 가능성 있지.

=??? : 와! 어제 포토북 예약 마지막 날이라고 사이트 터졌잖아! 예약 못 하는 줄 알았네!

??? : ……(동공지진)……포토북 예약이 어제까지였다고?

=와씨…… 진짜 욕 나왔다.

=222 알람 백 개 맞춰놔야지.

* * *

“포토북이라니. 진짜 좋다!”

여기 연극도 봤고 포토북도 살 행운아들이 있었다.

송유정이 베개를 껴안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임예나가 노트북 앞에 앉아 마우스를 잡고 뜻밖의 기쁜 소식에 난리 난 [새싹부터]를 돌아보고 있었다.

[새싹부터] 공지에는 코코아엔터에서 간단하게 올린 포토북 설명도 있었다.

“블루문 때 사진도 있대!”

“진짜?! 파란 머리 서준이라니! 아. 장산범은 안 나오려나? 두루마기랑 백발도 잘 어울리던데. 노란색 렌즈도!”

“3월이니까 나올 것 같은데…….”

“돈. 돈을 모아야 해! 소장용, 감상용, 포교용으로 3개를 사야 하니까!”

“응원봉 모형 말이야. 장산범이니까 백호도 나오려나? 백호 쓰다듬는 백발 두루마기 서준이 피규어도 좋겠다……!”

“그러게! 연극 초반부처럼 평화로운 분위기도 좋을 것 같고, 후반부처럼 조금 오싹하긴 해도 사냥 바로 전에 날카로운 분위기도 좋을 것 같다!”

으아아아아!!

송유정이 베개를 잡아 뜯으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고 임예나도 벅차오르는 마음에 마우스를 잡고 흔들었다.

잠시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 동시에 조용해졌다.

흐흐흐흐. 그런 희한한 웃음소리가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행복한 침묵을 즐기던 송유정이 고개를 돌려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근데 예나야. 아까부터 노트북 앞에서 뭐 해?”

“오늘 브블 싱글 나오잖아.”

“아. 그게 오늘이야?”

“응. 방금 떴어.”

송유정은 엎드려 두 손으로 턱을 괬다.

브라운블랙의 팬은 아니지만, 서준의 지인인지라 신곡이 나오면 꼭 챙겨 들었다. 게다가 나오는 곡마다 좋기도 했다.

“소리 좀 크게 해봐. 같이 듣게.”

“그래. 근데 앨범 제목이 신기하네.”

“엉? 뭔데?”

“범이래. 범.”

임예나의 말에 송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극을 본 뒤로 범, 호랑이, 장산, 산, 하얀색 하면 하나만 떠올랐다. 임예나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꼭 436 같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럼 튼다?”

“응.”

임예나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재생 버튼을 눌렸다.

둥.

나지막한 음이 흘러나왔다. 기타라기보다는 조금 더 굵직한 현을 튕기는 소리.

그다음에 흘러나오는 심장 고동 같은 북소리의 박자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개 글도 하나도 안 읽고 들어서 몰랐는데 전통악기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때, 느릿하고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겁게 한 발을 내딛는 듯했다.

-범.

두둥.

-범 내려온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