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50화
“겉으로는 우아한 백조도 수면 아래에서는 엄청 헤엄을 치고 있다고 하잖아. 꼭 그거 같지 않아?”
강재한의 말에 [436]팀이 웃음을 터뜨렸다.
막 무대에서 관객석 맨 끝 쪽까지 달려가려고 발목을 휘휘 돌리며 준비하던 서준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서준이가 관객석에서 등장하는 게 되게 멋있기는 한데…… 이렇게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건 관객들은 잘 모를 거야.”
휴대폰 화면 위에 스톱워치를 켠 김채연이 웃으며 말했다.
무대 위에 있던 서준이 관객석에서 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무대부터 관객석 맨 끝의 준비된 장소까지 열심히 달려가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강재한이 ‘저어기!’ 하고 대사를 칠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등장해야 했다.
게다가 그렇게 달려가는 사이 관객들에게 들키지 않게 주의해야 했다.
그걸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 바로 우주선 추락 장면.
관객석을 향해 조명을 비추면, 눈부시고 어지러운 붉고 푸르고 노란 빛들이 관객들을 혼란하게 만들면서 시야를 가려준다.
그리고 귀를 시끄럽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음악들이 서준이 움직이는 소리를 숨겨준다.
그사이 서준은 무대 아래로 내려와 관객석 끝으로 열심히 달려간다.
그리고 짜잔!
강재한의 대사에 맞춰 옷을 갈아입은 서준이 등장한다.
관객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노력이었다.
“민형이도 잘 봐두고.”
“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조명이었다.
관객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1번, 5번 통로를 이용한다고 하지만 실수로 조명을 움직이다가 서준이 달려가는 모습을 비치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럼 잰다?”
“그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서준이 김채연의 신호에 온몸을 가릴 수 있는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옷 갈아입는 시간까지 재는 거지?”
“응.”
이솔의 물음에 김채연이 대답했다. 휴대폰 화면 속 스톱워치의 시계가 빠르게 움직였다.
제2 소극장의 크기는 미르홀과 달랐다.
관객석이 더 넓어진 만큼 관객석 끝까지 서준이 달려가야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래서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우주선 추락 장면’의 길이를 수정하기로 했다.
“역시. 운동을 잘해서 그런가. 서준이 진짜 빠르다.”
“그러게. 계단을 저렇게 빨리 올라가도 안 지쳐 보이네.”
어느새 관객석 끝에 다다른 서준이 암막 커튼으로 만들어진 장소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연극과 똑같은 시간을 재기 위해 새하얀 가발과 두루마기, 노란 렌즈를 모두 제대로 착용한 상태였다.
물론, 저 암막 커튼 안에 서준의 환복을 도와주는 팀원이 있었다.
“좋아!”
김채연의 스톱워치가 멈추었다.
서준이 흰나비처럼 흰색 두루마기를 팔랑이며 걸어 내려왔다. 일하는 척, [436]팀의 모습을 은근슬쩍 구경하던 직원들이 오, 감탄했다.
“확실히 미르홀보다 길어.”
스톱워치를 보며 ‘우주선 추락 장면’의 시간을 가늠하는 김채연이 말했다.
졸업 공연 때와 마찬가지로 ‘우주선 추락 장면’은 스톱워치의 시간보다 넉넉하게 정해질 예정이었다.
관객석 사이의 통로가 계단 형식이라서 달려가다 발을 헛디딜 수도 있고, 가발을 쓰다가 뭔가 제대로 안 될 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늘릴 수 있지?”
“그럼. 걱정하지 마. 오늘이면 끝나.”
김채연과 음악팀이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어쩌다 보니 의상 담당에서 조명담당이 된 박민형을 보았다.
“민형이는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
씩씩한 1학년의 대답에 서준이 만족스럽게 웃고 [436]팀을 돌아보았다.
“그럼 오후 연습 시작하자!”
팀장의 말에 팀원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31일 토요일.
올해 마지막 연습이 시작되었다.
* *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산에서 보는 해돋이 vs 바다에서 보는 해돋이]
[배우 이서준, 너튜브 채널에 새해 인사 남겨!]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누군가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짐하며 일찍 일어나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평소와 같은 휴일이라 늦잠을 자는 날.
서준은 여느 새해처럼 너튜브 채널 [JUN]을 통해 새해 인사를 남기고 소꿉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최상급 문 안 열렸지.’
상의를 입으며 서준은 새하얀 배경의 도서관 속 굳게 닫힌 커다란 문을 떠올렸다.
성인이 되는 첫날이라 열릴까 했지만, 아쉽게도 최상급 도서관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최상급이라 좀 더 후에 열리려나?’
외투를 입은 서준이 모자를 들었다. 모자에 새겨진 능력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제 그것만 남았는데…….’
언제 다 열까, 생각했던 도서관 문도 이제 서준의 전생들 중 가장 강력한 능력들이 남겨져 있는 최상급의 문, 하나만 남았다.
아니, 선의 도서관과 악의 도서관 하나씩. 총 두 개가 남아 있었다.
‘근데 하나가 열리면 다른 문도 열리니까…… 두 갠가?’
하나든 둘이든.
어차피 최상급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해도, 연기를 위해 사용할 때는 등급을 낮춰서 사용할 생각이라 절실하게 필요하지는 않지만(검색 기능은 이미 포기했다).
‘전부 다 열고 싶다.’
원래 퀘스트는 모조리 깨고 싶은 게 한국인 아닌가.
막상 하나만 남겨두니 더욱 열고 싶어졌다.
‘열리는 조건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게 문제였다.
도서관의 문을 여는 데 필요한 것이 현생의 지능과 마나 정도라는 건 알고 있는데, 그 지능의 수준과 마나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는 서준도 몰랐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라는 조건도 없이, 도서관 문에 손을 대면 알아서 판단해 주니까 말이다.
‘중급도, 중상급도, 상급도 그렇게 간단하게 열렸지.’
중요한 깨달음이나 확연한 변화 같은 것도 없이 그냥 평상시처럼 지내다 보니 열려 버렸다.
상급의 문을 열지 못했던 전생들 중에 서준보다 똑똑하고 강한 전생들이 많았다는 것을 서준은 잘 알고 있었다. 삶의 책만 읽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도 수준 이상의 문은 열 수 없었던 다른 전생(물론 초월적인 존재들은 최상급까지 쉽게 열었다)들과 달리, 현생에서 도서관의 문을 여는 건 제법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악의 도서관까지 열었고.’
생의 도서관에 의지가 있다면 아마 자신의 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아니면 인간이 특별한 건가?’
신발을 신던 서준이 문득 손을 멈추었다.
전생과 현생의 다른 점이라면 전생은 모두 인외의 존재였고 지금은 인간이라는 것.
그게 생의 도서관에 무언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었다.
이것저것 떠올려보던 서준이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상관없나.’
깊이 생각해 봐도 서준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냥 평상시처럼 삶의 책을 읽고 능력을 연기에 활용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처럼 최상급의 문도 활짝 열리지 않을까, 싶었다.
꼭 열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닫혀있는 문을 볼 때마다 조금 거슬리긴 하겠지만, 연기에 활용할 능력은 충분하니까 말이다.
‘문을 여는 조건은 다음 생이든 다다음 생이든 초월적인 ‘내’가 알아내 주겠지.’
[이서준]의 삶의 책을 읽는다면, 후생의 자신이 그 호기심을 풀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미루는 스케일이 ‘내일의 나’도 아니고 ‘다음 생의 나’인 서준은 방 밖으로 나올 때부터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 아빠. 나한테 할 말 있어?”
서준의 말에 거실 소파에 앉아 힐긋힐긋 서준을 보던 서은혜와 이민준이 몸을 움찔 떨었다.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 열심히 쳐다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부부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준아. 오늘 늦게 들어와?”
서은혜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점심만 먹고 올 거야.”
그 말에 엄마, 아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저녁은 집에서 먹는 거지?”
“응? 응.”
“알았어!”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소꿉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연극 [MOEB-436] 3회차 초대권을 주고 온 그날 저녁.
서준은 불판이 올려진 식탁 위에 있는 초록색 병과 갈색 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봐서 익숙하지만 어쩐지 낯선 그것.
소주와 맥주였다.
“이게…… 웬 술이야?”
식탁 위로 생삼겹살과 함께 먹을 채소들을 올려놓던 서은혜와 이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 로망이 서준이랑 술 마시는 거였거든. 졸업 공연 날 최대만 감독님 말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갈 뻔했어.”
“그러니까 말이야. 언제 마시나 했는데…… 벌써 이렇게 됐네!”
두 사람 다 즐거운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술을 엄청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기분이 좋을 때 한 번씩 마시는 부부였다.
“새해라서 친구들이랑 먼저 마실까 봐 조금 걱정하긴 했어. 아주 조금.”
“그렇다고 점심부터 마시진 않지!”
서은혜와 이민준의 말에 서준이 눈을 데굴 굴렸다.
오늘 당당하게 주민등록증을 들고온 박지오가 대낮부터 술을 시킬 뻔했다는 건 소꿉친구들만의 비밀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다기보다는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술맛’이 궁금한 요리사 지망생, 미나가 ‘어떤 맛인지 궁금하지 않냐’는 지오의 말에 조금 혹한 것 같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낮술은 좀.
소꿉친구들의 타박에 지오는 대신 편의점에서 술을 사 가기로 했다.
계산대에서 당당하게 주민등록증을 내밀던 모습이 그것만으로도 꽤 만족한 듯 보였다.
“……응. 1월 1일이 되자마자 마시지는 않아.”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결국 먹지 않은 건 사실이라 서준은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엄마아빠가 즐겁게 웃자, 서준도 하하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잠시 후.
서준과 부부가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불판 위에서 생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소주도 먹어보고 맥주도 먹어보자. 여러 가지 마셔보고 취향에 맞는 걸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어.”
“오늘은 처음 마시는 거니까 조금만 마시고. 못 마시겠으면 바로 말해.”
“알았어. 그럴게.”
서준보다 더 들뜬 엄마, 아빠의 모습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맥주부터 마시는 게 나으려나?”
“일단 배부터 채워야지. 여보, 고기 뒤집어.”
서은혜의 말에 놀란 이민준이 집게로 얼른 삼겹살을 뒤집었다. 잘 익은 삼겹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위로 한입 크기로 잘려 나갔다.
“술 마실 땐 빈속에 먹으면 안 좋아. 앞으로 촬영 끝나고 회식할 때 술 마실 일 있으면 꼭 조금 배를 채우고 마셔.”
엄마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게를 들고 있던 이민준이 서준과 서은혜의 앞으로 잘 익은 고기들을 놓아두었다.
서은혜가 웃으며 고기를 굽느라 바쁜 이민준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은 부모님이었다.
“그러네. 이제 서준이도 회식 때 술 마실 수 있구나.”
새로운 생삼겹살을 불판 위에 올리던 이민준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만약에 서준이한테 억지로 술 마시게 하면 어떻게 하지?”
서은혜의 눈이 번쩍였다.
“그럼 바로 다호 씨한테 말해야지. 나이가 몇이든 억지로 마시게 하는 건 잘못된 일이니까.”
엄마의 말에 상추쌈 위로 고기를 올리던 서준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경력이 꽤 되니까 억지로 마시게 하진 않을걸. 계속 그러면 아예 촬영 안 하는 방법도 있고.”
그렇게 되면 서준이 나갈지, 억지로 권한 사람이 나갈지 알게 될 터였다.
그 정도 힘은 마음껏 휘두를 생각이 있는 15년 차 탑배우, 서준이 상추쌈을 냠 입에 넣었다.
잠시 후.
적당히 배를 채운 서준의 앞에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잔과 갈색에 거품이 몽실몽실 올려져 있는 큰 잔이 놓였다.
“엄마는 소주가 좋더라.”
“아빠는 맥주.”
묘하게 기대하는 눈빛에 서준은 신중히 고민하다 손을 뻗었다.
기다란 맥주잔이 잡혔다.
아무래도 알코올 도수가 소주보다 낮으니 부담이 덜했다.
맥주잔에는 반의반도 안 되는 양의 맥주가 담겨 있었다. 서준이 조심스럽게 잔에 입술을 갖다 대고 천천히 마셨다.
“으.”
반사적으로 그런 소리가 나왔다.
정말 조금 마셨는데도 입안을 맴도는 쓴맛에 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맛이야?”
그런 아들의 반응에 서은혜와 이민준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물을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고 삼겹살로 입맛을 되살린 서준은 다음으로 소주를 바라보았다. 소주도 작은 소주잔의 반의반도 안 되게 담겨 있었다.
잠시 소주를 빤히 바라보던 서준은 소주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갖다 댔다.
입안을 통과해 목 뒤로 넘어가는 소주에 서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주장하는 알코올 냄새와 맛이 입안에 가득 남아 있었다.
“……으으. 차라리 맥주가 나아.”
그 말에 부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지오 : 술 맛없어-ㅠ-
>지오 : 노.맛.
>미나 : ㅋㅋㅋㅋ
>지윤 : ㅋㅋㅋㅋ
>지후 : 쟤 한 입 먹고 말았음.
>미나 : 지후 너도 마셨어?
>지후 : ㅇㅇ난 소주가 괜찮더라.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난 맥주.
<소주 병원 맛 나…….
>지오 : ㅋㅋㅋ병원 맛ㅋㅋㅋ
>지오 : 근데 맞음. 병원 맛. 으.
>지윤 : 서준이 너도 마셨어?!
<ㅇㅇ부모님랑 같이 마셨어.
>미나 : 나도 부모님이랑 마셔봐야겠다!
>지윤 : 다들 성인 됐다고
>지윤 : 새해 첫날부터 술판이네…… ㅎ
<ㅋㅋㅋㅋ
>미나 : ㅋㅋㅋㅋ
>지오 : ㅋㅋ술판ㅋㅋ
>지후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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