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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447화 (447/1,055)

0살부터 슈퍼스타 447화

무대가 어두워지고 막이 내려왔다.

SF에서 조선 시대로 넘어가는 이야기와 안드로이드의 정체에 놀란 관객들이 넋을 놓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전개는 상상도 못 했다.

줄거리를 대충 알고 있던 학생들도 서준이 관객석에서 등장할 때부터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저런 연출까지는 공고문에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르홀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아직도 폭풍처럼 몰아치던 장산범의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짐승의 발자국처럼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실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묵직했던 분위기가 일순 변하면서 턱하고 막혀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의 변화를 떠올리고 다시 이야기를 처음부터 되짚어보니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 장난 아니다…….”

짝짝짝짝!!

커다란 박수와 함께 미르홀이 시끌벅적해졌다.

* * *

관계자석도 마주치는 두 손바닥을 멈추지 않고 연극에 대해 이야기했다.

“장산범이라니 생각도 못 했어요.”

“제목도 그냥 지은 게 아닌 것 같습니다. MOEB를 거꾸로 하면 BEOM. 범이잖습니까.”

오오.

우정한 감독의 말에 모두 감탄을 흘렸다.

“그러면 436도 관련이 있을 것 같네요. 장산범의 이야기가 나왔던 때 일까요? 1436년?”

“조선이 1392년에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소은진 작가의 말에 다들 장산범이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인가?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도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장산범은 민담보다는 도시 전설 쪽에 가깝다고 들었거든요. 전해져오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최신의 것이라고요.”

“도시 전설이라…… 민담과 도시 전설이라니까 시대가 확 차이가 나네요. 전 장산범이 옛날부터 전해지는 요괴인 줄 알았어요.”

박도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강태영이 옆자리에 앉은 에반 블록과 그 뒷자리에 앉은 리첼 힐을 눈치챘다. 아차 싶었다.

“아! 장산범 아세요? 미국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 같은 거거든요.”

강태영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이번 연극[MOEB-436]은 ‘장산범’에 대해 모르면 반전의 재미가 조금 줄어드는 연극이었다.

“아! 세이렌! 세이렌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머리를 싸매고 설명하려고 애쓰는 강태영의 모습에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빙그레 웃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장산범.”

“아, 알고 계셨어요?”

강태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김종호와 이지석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을 바라보았다.

“한국어를 배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도 이틀 전쯤에 알았어요.”

리첼 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명해 줘서 고마워요. 태영 씨. 에반. 종이 들고 있지?”

“어. 여기.”

에반 블록이 웃으며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배우들과 감독, 작가들이 무슨 종이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뭔가요?”

“준이 연극을 보기 전에 준 겁니다.”

우정한 감독의 물음에 에반 블록이 웃으며 종이를 건네주었다. 우정한 감독과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종이의 내용을 보기 위해 고개를 쭈욱 뺐다.

“저건……?”

에반 블록에게 막혀 아무래 고개를 쭉 빼도 강태영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위치라서 에반 블록이 설명해 주었다.

“한국의 요괴 모음입니다. 요괴의 이름부터 관련된 이야기까지 짧게 나와 있죠. 아무래도 리첼과 제가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지만 그런 옛날이야기는 약한 편이거든요.”

리첼 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도 그게 걱정이 된 모양인지 그걸 꼭 읽어보고 오라고 하더라구요. 거울처럼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어요.”

이런 게 있다면 [거울]처럼 완벽한 스포일러는 아니더라도, 장산범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연극을 볼 때 꽤 도움이 될 터였다.

“근데 장산범 이야기가 적혀 있으면 너무 티가 나지 않을까요?”

연극을 재미있게 보기 위해선 장산범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연극이 장산범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만다. 그러니 연극의 반전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의 스포일러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강태영의 말에 우정한 감독이 웃으며 들고 있던 종이를 강태영에게로 넘겼다.

강태영과 그 건너편에 앉아 있던 브라운블랙이 눈을 반짝이며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음악과 관계자들도 흥미로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구미호, 그슨새, 두억시니……?”

리첼 힐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내용을 미리 예상하는 건 싫은지 장산범 말고도 다른 요괴들의 이야기도 넣어뒀더라고요.”

서준의 철두철미함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준이 연기, 조금 힘 빼고 했죠?”

최대만 감독의 확신 섞인 물음에 배우들은 물론이고 감독들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도 마찬가지였다.

“연극엔 딱 적당했죠. 더 힘줬으면 너무 현실감 있어서 기분이 나빴을 겁니다.”

그 사이에서 브라운블랙만 고개를 갸우뚱했다.

힘을 빼면 연기를 못한 게 아닌가? 힘을 뺐다기엔 되게 박력 있던 것 같던데?

“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서준이가 연기를 잘하잖아요.”

영화제의 상이란 상은 싹쓸이하고 있는 [흘러가다]의 바쁜 일정을 잠시 미루고, 미리내 예고 특강에 참여하고 졸업 공연 티켓을 손에 넣은 민희경 감독이 입을 열었다.

브라운블랙이 팔불출처럼 ‘우리 서준이가 연기를 잘하긴 하지’라고 생각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무 잘해서 가끔 진짜인가, 착각할 때가 있거든요.”

배우들과 감독들, 작가들이 동감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한 번씩 서준의 연기에 낚여본 경험이 있었다.

“연기에 익숙한 감독이나 배우들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인데 일반인은 어떻겠습니까.”

최민성 감독의 말에 브라운블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영상이었다면 진짜 유진이 죽는 씬과 보부상이 죽는 씬을 더욱 집중했을 겁니다.”

새하얀 장갑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핏발 선 진짜 유진의 눈동자가 M을 바라볼 터였다. M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목을 잡고 팔을 잡고, 손가락을 세워 손톱이 그 팔에 박힐 정도로 힘을 줄 터였다.

하지만 안드로이드인 M는 조금의 타격도 없이 그저 벌레 한 마리를 죽이는 것처럼, 아니 쓰레기 하나를 치우는 것처럼 그저 가볍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영상이, 서준의 한예대 실기 시험 영상과 함께 감독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영상이라면 보부상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장산범의 잔인한 모습이 그대로 담아냈겠습니다만…… 연극이라서 서준이는 그걸 전부 들어냈죠.”

기분 나쁨과 오싹함.

자신의 연기가 관객들에게, 객관적으로 어떻게 보일지 잘 알고 있는 서준은 그 사이에서 아주 잘 조절했다.

“그래도 공개되는 영상 편집본에서는 조금 오래 나왔으면 좋겠어요. 애들 표정 연기도 자세히 보고 싶고요.”

이다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모두의 시선이 관객석에서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에게로 향했다. 특히, 서준이 걸어 내려왔던 관객석 쪽을 가장 가까이서 찍고 있던 오른쪽 카메라 쪽으로.

아르바이트로 미리내 예고에 촬영에 참가한 독립영화 감독이 몸을 움찔 떨었다. 어쩐지 관계자석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찐한 시선에 꼭 고양이 앞의 생선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 * *

막이 내려가자 서준은 온몸의 힘을 풀었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관객들의 놀란 표정을 떠올리니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잘된 것 같네.’

카메라가 필터처럼 능력을 한 번 걸러주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연극은 서준의 능력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장산범이 관객석에서 깜짝 등장하는 만큼 보통 때보다 더 충격적일 게 분명했다.

‘물론 최하급으로 낮춰서 사용했지만…….’

그래도 관객들에게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무대 위의 모든 일이 바로 앞, 살갗에 닿는 것처럼 느껴질 터였다.

‘그렇다고 마기를 빼놓고 연기할 수는 없지.’

선기와 마기.

그 사이의 균형이 중요했다.

그래서 서준은 미리 관객석에 선기를 깔아두고 장산범을 연기할 때는 마기를 흘려보냈다. 두 능력 다 같은 등급이라, [쉐도우맨3] 때처럼 한 능력이 다른 능력을 깨부수지는 않았다. 연습도 하긴 했다.

‘관객석에 관객들이 꽉 차 있는 상태에서 연습해 보지는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된 것 같았다.

만족스럽게 웃은 서준은 후우, 숨을 내쉬며 능력을 발동했다.

[(선) 중급천사의 부채가 발동합니다.]

상쾌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관객석에서 선기와 대립하던 마기가 깨끗이 정화되었다. 그 바람을 맞고 정신을 차린 관객들이 하나둘 입을 여는 덕분에, 적막하던 관객석이 술렁이는 게 커튼 너머까지 느껴졌다.

마지막 한 톨의 마기까지 정화된 것을 확인한 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팔다리 한쪽을 이불 밖으로 쏙 빼놓고 죽은 척을 하고 있던 강재한이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재한아, 괜찮아?”

서준이 손을 내밀었다.

“응. 괜찮아. 이 부분은 푹신푹신해.”

강재한이 서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강재한이 발을 디딘 구역이 침대 매트리스처럼 물렁물렁했다.

미술팀에서 세트장을 만들 때, 달려드는 서준에 눌려 강재한이 쓰러질 구역을 폭신폭신한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서준과 강재한도 걱정 없이 정말로 사냥하는 범과 쓰러지는 먹이처럼 격렬한 액션을 취할 수 있었다.

주모 역을 맡은 박연지와 보부상2를 맡은 김영찬이 상기된 얼굴로 서준과 강재한의 곁으로 왔다.

“완전 멋졌어요! 선배님들!”

“리허설 때보다 더 박력 넘치는 것 같았어요!”

장산범을 연기할 때는 무시무시했던 백발과 노란 눈동자였지만, 연기를 하지 않는 서준의 그런 모습은 화보나 다름없었다. 특히 검은 정장과 하얀 두루마기가 어우러져서 멋졌다.

“너희도 정말 잘했어. 연습도 잘했는데 실전도 더 잘하던데?”

생기가 도는 황금빛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맞아. 진짜 주모랑 보부상인 줄 알았어.”

선배들의 칭찬에 두 후배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흐흐흐 웃었다.

“정말요? 중간에 대사 깜빡할 뻔했는데 다행이에요.”

“저도요. 서준 선배님 등장할 때, 관객석 분위기가 세트장 뒤까지 느껴져서 엄청 긴장했어요.”

과학자 역의 김주경과 진짜 유진 역의 한지호도 들뜬 얼굴로 무대 위로 올라왔다.

여러 팀이 무대에 오르는 학교 공연이라 따로 커튼콜은 없었지만, 다행히 마지막 팀이라서 조금 무대 위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와! 재한이 너 어떻게 서준이 연기를 보고도 그렇게 태연하게 연기해?”

“연습 때보다 잘한 것 같은데?”

김주경과 한지호가 감탄을 내뱉었다. 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넓은 미르홀 안에서 무대 위에 있는 강재한에게만 영향을 주지 않게 연기하는 것은 서준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보부상1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바로 맞은 편에서 등장하는 장산범이 없는 듯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아주 태연하게 연기해야 했다.

‘1, 2학년들로는 조금 힘들었을 테지만 재한이가 지원해서 다행이었지.’

아이들의 말에 강재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긴 했는데, 서준이랑 연극 한 번 해봐서 괜찮았어. 서준이는 실전에서 더 집중하니까 나도 최대한 내 연기에 집중했거든.”

“이래서 경력자를 뽑나 봐.”

“그러게 말이에요.”

서준과 아이들이 감탄의 눈빛으로 짝짝 박수를 쳤다. 강재한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내려가자. 뒤에 애들 와있어.”

“그래.”

김주경의 말에 공연을 무사히 마친 아이들이 웃으며 막 무대를 내려가려던 찰나,

짝짝짝짝!!

커다란 박수와 환호성이 막 너머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들려오는 그 커다란 함성에 서준과 아이들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미르홀 밖으로 학생들과 가족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반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어 가족들과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반응 좋은데?”

떠들썩한 학생들과 가족들의 반응을 보며 기자들이 눈을 빛냈다. 지금도 이서준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들에 어떤 연극인지 궁금하다는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다. 현장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옮겨야 했다.

“436! 거꾸로 하면 634잖아! 그거 장산 높이야. 634미터래!”

“딱 ‘장산’하고 ‘범’이네. 뒤집으면 634-BOEM이잖아.”

물론, 지금 기자들의 귀에 박히는 스포일러는 빼고 말이다.

기자들은 들려오는 장산범, MOEB, 436, 안드로이드 등의 단어를 애써 한쪽 귀로 흘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야. 근데 관계자석에 외국인도 있던 것 같은데 외국인 강사도 오냐?”

“아. 에반 블록이랑 리첼 힐?”

동생을 툭툭 치며 묻는 형의 말에 동생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조금 으쓱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뭐?”

“……응?”

형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에 걸어가던 다른 학생들의 가족들도 멈췄다.

미리내 예고 학생들이 얼떨결에 말해버린 1학년을 보며 아이고, 하는 표정을 지었고 가족들과 집에 가고 있던 연기과 3학년 김하운이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야. 너…… 방금 뭐라고?”

“아, 아, 아, 아니…… 그게…….”

사색이 된 1학년이 덜덜 떨었다.

기자들이 눈을 번쩍였다. 학생들의 반응을 보니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서준이가 말해도 괜찮대!”

김하운의 목소리에 ‘뭐?’ 하고 돌아봤다가 3학년 선배를 알아본 학생들이 근질근질했던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이 놀라서 미르홀을 돌아보고 관계자석과 가까이에 앉았던 가족들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진작 말하지.”

“그러게. 얼굴이나 한번 봤을 텐데. 실제로 보면 어때?”

“분위기 장난 아니야! 한국어도 엄청 잘해!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기자들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삿거리에 입꼬리를 귀까지 올리며 기사를 써 내려갔다. 역시 이서준. 기삿거리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자세히 이야기하라며 형에게 붙잡혀 탈탈 털리던 1학년은 그런 분위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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