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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446화 (446/1,055)

0살부터 슈퍼스타 446화

빠르게 변하는 무대 위 이야기들에 몰입하고 있던 관객들은 커다란 굉음에 몸을 움츠렸다가 폈다.

이렇게 끝나나?

싶을 때, 노란색 조명 하나가 켜졌다.

파란색 조명이 켜졌다. 붉은색 조명이 켜졌다.

바로 관객석에.

눈앞에서 붉고, 푸르고, 노란빛이 뒤얽히자,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른 연극에서 쓰이지 않아 몰랐는데 일부 조명은 관객석으로 향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에 맞춰 귓속을 파고드는 음악이 있었다.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이 되는 정신 사나운 소리였다. 쿵! 하고 심장을 울리기도 했고 날카로운 음으로 귀를 파고들어 오싹하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

우주선이 추락하고 있다는 걸 관객들은 알 수 있었다.

앉아 있는 의자만, 바닥만 흔들린다면 미르홀 자체가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풍경이었다.

관객들에게는 다행히도, 등장인물들에게는 불행히도 그런 정신 사나운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들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관객석을 이리저리 비추던 빛과 귀를 어지럽히던 소리가 일제히 사라졌다.

그 변화에 귀가 먹먹해지는 사이에서 에반 블록은 어쩐지 희미하게 물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르홀에 침묵이 맴돌았다.

시끄럽다가 조용해지니 더욱 적막하게 들렸다.

‘……끝났나?’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언제 내려갔는지 모를 막이 다시 올라가며 무대 위에 빛이 들어왔다.

부엉- 부엉-

갑자기 들려오는 부엉이의 울음소리에 관객들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올라간 막 뒤로 드러난 무대의 풍경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우주선의 모니터였던 스크린에, 나무와 풀, 돌 그리고 달이 뜬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마치 어디에 있는 산 같았다.

그때 옷감이 거칠어 보이는 한복을 입은 두 남자가 무대 오른쪽에서 나타났다. 목화솜이 달린 패랭이 모자를 쓰고 등에 짐을 가득 진 걸 보니 두 남자는 아마도,

‘……보부상?’

같았다.

“아이고. 저기서 좀 쉬었다 가세!”

“거참! 멀기도 하다!”

힘겨운 듯 걸어온 두 보부상은 무대 중앙에 있는,

‘……주막??’

처럼 보이는 세트장을 발견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갑자기 180도로 변한 풍경에, 관객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해도 못 하고 무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Γ 모양으로 된 주막은 왼쪽은 방이었고 뒤쪽은 부엌과 뒷간으로 보였다.

그 부엌에서 주모가 나왔다. 물에 젖은 손을 재빠르게 앞치마에 닦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아이고, 이 늦은 시간에 어떻게 오셨소?”

분명 모든 배우가 고등학생일 테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일 저쪽에 장이 서잖소. 거기에 가는 거지.”

“나도요. 윗마을 영감 하나가 물건 놓고 하도 실랑이를 하다 보니 이 시간이지 뭔가.”

“서생원? 으으. 그 영감탱이가 엄청 지독하긴 하지.”

같은 영감에게 시달린 적이 있는 두 보부상이 진저리를 쳤다.

어느샌가 음악도 유쾌한 리듬의 전통 악기로 변해 있었다.

관객들은 이해하길 포기하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몇몇은 긴장으로 가득하던 어깨가 풀어져,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여기 막걸리 한 사발씩이랑 국밥 두 그릇!”

“얼른 먹고 출발해야지.”

주모가 깜짝 놀랐다.

“아니, 안 주무시고 그냥 가시려고?”

“바쁘다고 하지 않았소? 일정대로 움직이려면 지금 출발해도 많이 늦었소.”

한 보부상의 말에 다른 보부상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안 되오. 안 돼!”

주모가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먹을 건 안 내오고 말리는 주모를 보며 보부상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안 되오?”

“요즘 요 뒷산에서 호랑이가 나온다는구려. 호랑이!”

두 보부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벌써 여럿 죽어 나갔소!”

호환.

산을 넘고 또 산을 넘어 다니는 보부상들에게 그것보다 안 좋은 소식은 없었다.

“아이고. 망했네!”

“……방은 있소?”

일찌감치 포기한 보부상들의 말에 주모가 내심 반색하며 방으로 안내했다.

무대의 중앙에서 조금 왼쪽에 자리 잡은, 관객석에서 훤히 보이는 방에 두 보부상이 자리를 잡고 앉아 짐을 풀었다.

“그런데 자네는 어디서 오는 길인가?”

“바닷가 쪽에서 왔지. 잘 마른 생선이 있는데 뭐 좋은 거 있소?”

“오. 잘됐군.”

두 보부상이 각자 물건을 바꿔 가졌다.

“자네 뭐 재미난 이야기는 없는가?”

밥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방에 드러누운 보부상의 말에 남은 짐을 정리하고 있던 보부상이 입을 열었다.

“요 몇 달 전에 앞바다 쪽에서 용왕님이 나타났다고 하더구만.”

“용왕님?”

“바닷가까지 물이 밀려들 정도로 물보라가 화악, 일고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렸다지? 용왕님이 노하신 게 틀림없다면서 제사를 지내길래 배 든든하게 먹고 왔지!”

보부상의 말에, 혼란한 와중에 들려왔던 물소리를 떠올린 에반 블록이 눈을 반짝였다.

짐을 정리하던 보부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뒷간이나 다녀와야겠소.”

“가는 길에 부엌에 들러서 막걸리 먼저 들고 오게.”

관객석을 바라보며, 옆으로 누운 보부상이 손을 휘휘 저었다.

다른 보부상이 방을 나와 뒷간으로 향했다. 그사이 부엌에서 주모가 상을 들고 나와 방문 앞에 섰다.

“이보시오. 여기 문 좀 열어주소.”

“아이고……!”

주모의 목소리에 보부상이 기합과 함께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온 주모가 막걸리와 간단한 안주가 올려진 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국밥은 좀 끓여야 하니까 기다리고 있으쇼.”

“펄펄 끓여주시오.”

주모가 방을 나가고 보부상이 커다란 그릇에 막걸리를 따랐다. 그러고는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탕!

“아니!”

그릇을 시끄럽게 내려놓은 보부상이 관객석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놈의 호랑이는 시도 때도 없이 나와!”

손가락으로 왼쪽 아래 관객석을 가리켰다.

“요기서 나오고!”

번쩍!

보부상이 가리키는 곳, 관객석 사이의 통로에 밝은 조명이 비쳤다. 갑자기 켜지는 스포트라이트에 관객들이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이어지는 보부상의 모습에 웃음소리가 나왔다.

“조기서 나오고!”

번쩍!

오른쪽 아래 관객석에 빛이 비쳤다.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불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거기서도 나오고!”

오른쪽 위쪽 관객석에 빛이 비쳤다.

마치 관객 참여 영화처럼, 가족석 사이의 통로를 밝게 비추는 빛에 가족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서도 나오지!”

왼쪽 위쪽 관객석에 빛이 비쳤다.

모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도, 김종호와 이지석, 다른 배우들도.

서준의 재미난 연출에 감탄하던 감독들과 작가들도.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관계자석 사이의 통로를 밝게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새하얀 것이 서 있었다. 아래를 보고 있던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놈의 호랑이는 안 나오는 데가 없어!’

라고 말하는 보부상의 목소리가 관객들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새하얗고 기다란 실들이 하늘하늘 흩날리는 모습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길게 늘어뜨린 흰 머리카락 사이로 핏기 하나 없는 피부와 새빨간 입술, 샛노란 눈동자가 보였다. 음울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무대만 바라보고 있던 관객들도 뒤를 돌아보고 멈춰버린 관객들과 더이상 대사를 치지 않는 보부상의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리에 앉은 배우들과 감독들의 고개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는 ‘그것’을 따라 움직였다. 걸음걸음마다 흩날리는 길고 새하얀 머리카락들이 마치 환상처럼 보였다.

두둥.

심장을 불안하게 두드리는 북이 울렸다.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인데도 그것이 입고 있는 새하얀 두루마기가 움직일 때마다 너울처럼 일렁였다.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새하얗다고 생각했는데, 잘 살펴보니 아래쪽은 군데군데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마치, 호랑이 무늬처럼.

헐겁게 입은 그 두루마기 사이로 이질적인 옷들이 보였다.

새까만 바지와 재킷, 새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 구두를 보며 모두 그게 누군지 알아차렸다.

무거운 적막 속.

발걸음에 맞춰 둥, 둥 북소리만 들렸다.

아무도 가볍게 숨을 내쉬지 않았고 아무도 가볍게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이 커다란 공간을 이 많은 사람들을, 이 존재는 등장만으로 단숨에 사로잡고 있었다.

길쭉한 두 팔이 가볍게 흔들리고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이질적이었다.

사람의 걸음이 아닌 듯 무거운 것 같으면서도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고장 난 로봇 같으면서도 사냥을 앞둔 짐승의 그것처럼 보였다.

바로 옆에 진짜 짐승이 있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또 시선을 잡아끌어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샛노란 짐승의 눈이 관객석을 휘이 둘러보았다. 허리를 넘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새하얀 두루마기가 마치 구름처럼 흩날린다.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시선에 마치 나무나 돌 같은, 산을 이루는 무생물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그것’은 관객석에서 무대까지.

느린 걸음으로, 그러나 거침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어두운 관객석, 홀로 빛나는 스포트라이트가 ‘그것’을 따라 움직였다.

대충 걸친 얼룩덜룩한 두루마기. 그 안에 보이는 검은색 정장. 나풀거리는 긴 머리칼. 그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과 샛노란 눈동자.

모두 숨을 죽이고 고개뿐만 아니라 몸까지 뒤로 돌려, ‘그것’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입을 열었다.

-크르크극스

바람 소리처럼 낮게 읊조린다.

거칠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다.

-크르크극스

-크르크극스…… 이……

이어지던 울음소리 사이로 처음으로 관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왔다.

-이.

-이.보.

고장 난 기계음처럼 뚝뚝 끊어진다.

-이.보.시.

그런데 이상하다.

-이보.시.오.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은 거친 목소리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점점 매끄러워지고 가냘파진다.

-이보.시오.

마치 여자 목소리처럼.

-이보시오.

이제는 완전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몇몇 관객들이 어쩐지 들어본 목소리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것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관객들의 시야가 확 넓어졌다.

새하얀 두루마기와 은실 같은 머리카락에 머물러 있던 시야가 무대의 바닥, 무대의 배경인 뒷간, 부엌 그리고 무대의 중앙에 있는 방과 보부상에게로 닿았다.

같은 무대 위에 있는데도, 저런 존재감을 뿜어대는데도 보부상은 하나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정말로,

두꺼운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배우들과 감독들이 가득한 관계자석에서 감탄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것이 걸음을 옮겨 방 앞으로 다가갔다.

보부상이 막걸리를 마셨다.

“에잇, 간에 기별도 안 가네!”

정확한 발음은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이 방문 앞에 소리 없이 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머리카락이 삐죽 섰다.

“여기 문 좀 열어주소.”

주모의 목소리였다.

“어이쿠. 이제 밥이 왔나?”

보부상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반가운 표정을 짓는 보부상의 눈앞에 새하얀 것이 멀대처럼 서 있었다.

“아니, 당신은 뭐……!”

그것이 보부상에게 달려들었다. 보부상이 뒤로 쓰러졌다. 무대 위가 새까맣게 변했다.

탁! 탁!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오다가 잠잠해졌다.

관객들이 숨도 못 쉬고 어두운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번쩍.

뒷간 쪽에 조명이 켜졌다. 뒷간에서 나온 보부상이 부엌으로 향했다.

“주모. 막걸리 있소?”

“아까 방에 갔다줬소. 국밥은 좀만 더 기다리쇼.”

보부상의 물음에 부엌에서 빼꼼 목을 내민 주모가 말했다.

조금 전, 그것의 입에서 나왔던 것과 정말로 같은 목소리와 톤이었다.

보부상이 부엌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 호랑이 있잖소. 사람 꽤나 죽였으면 이름도 있을 텐데, 이름이 뭔가?”

“이름은 뭐 하려고?”

“뭐,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잖소.”

주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엌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스피커로 주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요 뒷산 이름을 따서,”

번쩍.

방에 빛이 들어왔다.

붉은색 조명이었다.

관객들이 반사적으로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붉은빛 때문인지 새하얀 머리칼과 두루마기가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이불 아래로 보부상의 팔과 다리가 보였고 벽에는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장산에 사니,”

그것, MOEB-436이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들어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듯, 생기 하나 없는 샛노란 눈동자였다.

“장산범이라고 부르지.”

……!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리고 MOEB-436, 아니, 장산범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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