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42화
조명 스위치가 무대 뒤쪽에 있던 여울 예중 여울홀과 달리, 미르홀은 무대의 맞은편, 관객석 맨 끝의 2층에 조명&음향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배경 음악도 여기서 나올 예정이라 음악팀 팀장 김채연이 바쁘게 움직였다.
눈을 데굴 굴리던 박민형이 유리창 밖을 보았다. 2층에 자리 잡아서 그런지 무대와 관객석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밝은 불빛 아래, 미술팀장 이솔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배경의 위치와 크기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동선을 체크하는 배우들도 보였다.
서준 선배님이 무대 바닥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는 것 같다. 아마도 회전 무대를 조심하라는 뜻일 터였다.
물론 연극 중에 회전 무대가 돌아갈 일은 없겠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알아두는 편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러고는 관객석 방향을 가리켰다.
서준 선배님이 가리키는 곳곳마다 모니터링을 위한 카메라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저 중 반은 학교 카메라였고 반은 서준 선배님의 카메라였다. 연기팀 3학년 선배님들은 서준 선배님의 집에 카메라가 더 많이 있다고 했다.
“좋아! 민형아. 이쪽으로 와봐.”
넋 놓고 보고 있던 박민형이 김채연의 부름에 잠깐 흠칫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네, 네!”
“서준이가 대본에 표시를 해놓았거든. 여기 표시된 번호대로 스위치를 누르면 돼. 이렇게 줄이 그어진 건 끄면 된다는 거고.”
김채연의 말대로 대사의 부분부분마다 사용되는 조명의 번호가 알아보기 쉽게 쓰여 있었다.
조명 담당은 당연히 김채연 선배님이지, 라고 생각하고 있던 박민형은 길어지는 설명에 잠시 의아함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일단 조명부터 체크해 보자.”
딱, 딱.
김채연의 손에 의해 무대의 불빛이 바뀌었다.
빨강, 파랑, 노랑 등.
무대 위에 서 있던 서준과 아이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조명이 비치는 방향을 살펴보고 있었다.
대본을 들고 있던 서준이 한쪽에 놓여 있던 마이크를 들고 와 조명실 쪽으로 높이 들어 보였다.
“마이크 스위치는 이거야.”
김채연이 마이크 스위치를 누르고 말했다.
[마이크 켰어.]
미르홀에서 종종 연주하는 음악과라서 그런지, 능숙하게 기계를 눌러 마이크를 켠 김채연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무대까지 전해졌다.
[아- 아-. 오케이.]
서준이 조명과 무대를 살피며 말했다.
[채연아. 파란색 켜봐.]
[전부?]
[응. 차례대로.]
딱, 딱.
소리가 날 때마다 무대 위가 푸르게 변했다. 서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조명의 방향과 무대에 떨어지는 빛의 모습을 살폈다.
[좋아. 다음은 빨간색.]
[알았어.]
서준의 말에 대답한 김채연이 박민형을 바라보았다.
“해볼래?”
“아, 네!”
손에 조금 땀이 찼다.
심호흡을 한 박민형이 순서대로 빨간색 조명을 켰다가 껐다.
하나둘 켜지는 조명에 무대 위에 서 있던 서준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학교. 딱 원하는 대로 설치해 주셨네.”
“여기 관리쌤, 은하수센터에서 오셨다더라.”
“오오…….”
한지호의 말에 다들 감탄했다. 은하수센터라고만 해도 믿음이 생겼다.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연습 시작하자.”
“그래!”
무대 위에 있던 아이들이 무대를 잘 볼 수 있게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무대 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자, 김채연은 아이들이 움직이기 쉽게 관객석 뒤쪽의 몇몇 조명을 빼고, 진짜 공연처럼 나머지 조명을 모두 껐다.
그리고 잠시 후.
연극의 시작을 알리듯 무대 위가 밝아졌다.
[크르윽크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괴음과 함께, 종이로 대충 배경을 표시해 둔 무대 위로 새하얀 가운을 입은 과학자, 김주경이 나타났다.
* * *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했다.
배경은 아직 설치되지 않았고 의상은 입었지만 분장은 덜 됐다. 배경음악과 효과음, 그리고 연기가 맞지 않아 간간이 튀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황금 세대.
3학년들의 연기를 보면 부족한 점을 찾기보다 집중하게 되어버렸다.
그중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건,
역시 이서준이었다.
관객석을 가득 채우는 서준의 아우라에 김채연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언제 봐도 참 박력 있는 아우라였다. 그래서 조명을 켜는 타이밍이 조금 늦고 말았다.
아니.
늦을 뻔했다.
김채연이 그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는 손이 있었다.
딱.
조명이 들어왔다.
빛 아래에서 서준의 연기가 이어졌다.
그제야 김채연은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던 미술과 1학년 박민형이 무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김채연이 자신을 보고 있는 줄도 모르는 듯 무대와 대본, 조명 기계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는 박민형의 시선에 무대에 집중한 것이 느껴졌지만, 조명은 대본에 적힌 것과 비슷한 타이밍에 켜지고, 꺼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조명의 번호를 찾고 대사를 따라가느라 조금 버벅거리기는 했지만 처음 하는 것치고는 아주 잘하고 있었다.
‘……얘 천직 아니야?’
무대 조명 쪽으로 진로를 잡는 건 어떨까 싶었다.
그사이에도 연습은 이어졌다.
3학년들의 연기, 그러니까 연습실에서만 보던 연기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연기를 보고 압도당한 연기팀 1, 2학년이 많은 실수를 하긴 했지만, 연습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까지 타이밍은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조명은 확실하게 켜지고 꺼졌다. 서준의 연기에 몰입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에는 박민형의 표정은 정말 집중한 얼굴이었다.
김채연은 박민형과 비슷한 눈빛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드물게는 삘이 꽂혔다고 말하며 연주하는 친구들의 눈에서.
그리고 거의 대부분은,
연기를 하는 서준의 눈에서.
아쉬운 부분을 참지 못하고, 좀 더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내려는 예술가로서의 의지가 아닌가 싶었다.
자신도 그런 눈빛을 할 때가 있나.
잠시 생각하던 김채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민형아. 조명. 네가 하는 게 어때?”
“네,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민형이 조명 기계에서 손을 떼며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 *
“그럼 조명은 민형이라는 애가 하기로 했어?”
“네. 채연이도 그게 좋을 것 같다고 했어요. 조명 신경 안 쓰고 연극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서준의 말에 운전대를 잡은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팀원들은 무대를 제대로 못 보지?”
“다들 연극 준비하느라…… 그래서 정식 공연하게 되면 몇 명씩 돌아가면서 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그 말에 안다호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식 공연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하. 뭐…….”
서준이 민망한 듯 눈을 데굴 굴려 차창 밖을 보았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실수만 안 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너희 팀이 아니면 누가 해. 실수해도 할 수 있을걸.”
팔불출 안다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레이스는 괜찮대?”
“이젠 좀 진정한 느낌이긴 한데…… 자기 마음속에 영화 이클립스는 없대요.”
안다호의 물음에 서준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클립스]가 전 세계 동시 개봉을 하고 바로 몇 시간 후.
서준과 찰리가 영화를 봤다는 메시지에 꾹꾹 화를 눌러 참고 있던 원작자 사라 웰튼의 동생, 그레이스가 펄펄 날뛰었다.
그때, 외국인은 알 수 없는 미국인의 온갖 욕을 다 들은 것 같다고 한국인 서준과 프랑스인 찰리는 생각했다.
“스포일러 될까 봐 말도 못 하고 참았다며.”
“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 내용이었지만요.”
물론 서준과 찰리는 영화 [이클립스]가 나쁜 의미로 좋지 않겠구나 짐작하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원작자의 가족으로 내부 시사회를 보러 간다고 기쁘게 갔다가 돌아왔을 때부터 휴대폰 너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망할지는 몰랐지만.’
11월 말에 개봉한 [이클립스]는 홍보력에 모든 제작비를 쏟아부은 거 아니냐는 합당한 의심과 함께 1달도 채 되지 않아 영화관에서 내려갔다. 그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마린사의 영화가 반사적 이익을 얻기도 했다.
흥행하는 영화가 있으면 망하는 영화도 있다지만, 그게 친구와 친구의 가족과 관련된 일이면 씁쓸해지게 마련이었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서준은 점점 가까워지는 호텔의 모습에 곱게 차려입은 옷을 매만지며 내릴 준비를 했다.
“근데 연극 연습 중에 인터뷰라니, 처음 아니에요?”
보통 서준이 작품을 준비할 때는 스케줄을 받지 않는 안다호와 2팀이라서 더욱 의아했다. 어디 실릴 인터뷰인지 궁금해졌다.
“하하하.”
서준의 물음에 안다호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 * *
“짜잔!”
“TA-DA!”
호텔 방 문을 열자 보이는 모습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당황하는 서준의 모습에 아하하하,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리첼이랑 에반이 왜 여기 있어요?”
리첼 힐과 에반 블록이었다.
“안녕! 준! 오랜……만인가?”
“5월에 봤잖아. 칸에서.”
“아하하. 그랬지, 참.”
감탄사마저도 한국인스럽게 내뱉은 리첼 힐이 활짝 웃으며 서준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에반 블록과 안다호가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서준은 리첼 힐에게 끌려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안다호를 보았다. 놀라는 낌새가 1%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아무리 물어도 웃음으로 때우던 다호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쩐지……!”
상황을 파악한 서준의 찐한 눈빛에 안다호가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서준의 눈빛에 에반 블록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 숨기셨나 봐요.”
“열심히 숨겼죠. 2팀이랑.”
깔끔하게 속은 한 명만 빼고 하하호호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 준. 이거 먹어봐. 맛있어.”
“이것도.”
인터뷰인 줄 알고 곱게 차려입고 온 서준의 앞에 맛있는 간식들이 놓였다. 한쪽에는 상큼한 오렌지 타르트가, 한쪽에는 달달한 초콜릿 타르트가.
이 사람들은 하도 어렸을 때부터 봐서 먹을 것만 쥐여주면 기분이 풀릴 줄 아나 보다.
‘내 나이가 얼만데…….’
냠.
그렇다고 안 먹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포크로 쿡! 찍은 오렌지 타르트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서준의 물음에 에반 블록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강의하려고.”
“와. 강의요? 어디서 하는데요? 언제 해요?”
분석가라는 별명이 붙은 배우, 에반 블록의 강의라면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서준이 눈을 빛내자 세 어른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반응에 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데요? 뭐 또 숨기는 거 있어요?”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웃으며 말했다.
“미리내 예고에서 해.”
“준의 졸업 공연 전날에!”
“칸에서 이야기를 듣고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겸사겸사 준이 수업 듣는 모습도 보고!”
“특별 강의를 하면 졸업공연 볼 수 있다며?”
“미리내 예고 급식 맛있다더라!”
앞뒤 없이 쏟아지는 말들을 찰떡같이 이해한 서준은 들고 있던 포크를 놓치고 말았다. 테이블 위로 떨어진 포크의 소리와 함께, 떨리는 서준의 눈동자가 안다호에게로 향했다.
안다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대.”
조금 해탈한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고등학생의 졸업공연을 보려고 내한한다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말을 듣고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마 다호 형도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을 터였다.
“진짜로 연극 보러 한국까지 온 거에요?”
“응! 준의 연극은 한 번도 못 봤잖아.”
“촬영은 같이 해봤잖아요.”
“촬영은 촬영이고 연극은 연극이지!”
그건 맞는 말이다.
리첼 힐의 말에 서준과 에반 블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도 우리가 미국에서 연극을 한다고 하면 보러 올 거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다.
에반 블록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식 공연하면 팀에 초대권을 주거든요. 그걸로 보는 게 편하지 않아요?”
“다호 씨한테 듣긴 했는데, 특별 강의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준의 친구들도 보고 싶고!”
“그리고 정식 공연은 은하수센터에서 하잖아. 알아보니까 거긴 사람들이 너무 드나들더라고.”
에반 블록의 말에 서준과 안다호가 동의했다. 은하수센터는 매일 매시간 작품들이 공연되는 곳이니 사람들이 없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진이 빠진 기분에 서준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브라운블랙 형들도 오고 에반이랑 리첼도 오고.’
다들 연극을 기대한다는 게 느껴져 조금 어깨가 무겁기도 했지만, 그만큼 즐겁기도 했다.
“아.”
서준이 무언가를 떠올렸다. 세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반이랑 리첼은 연극을 보기 전에 봐야 할 게 있어요.”
“우리가?”
안다호도 무언가 눈치챈 모양인 것 같았다.
“아, 그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둥둥 띄운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의 모습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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