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29화
게시판 앞에 모인 3학년들이 서준이 붙여놓은 졸업공고문을 살폈다.
우주선 이름 같은 연극 제목 다음으로 눈에 띄는 건, 모집하는 등장인물들이었다. 등장인물은 서준이 맡을 캐릭터를 제외하고 총 5명으로 [거울] 때보다 한 명이 늘어 있었다.
김주경이 입을 열었다.
“서준이 이름은 없는 걸 보니, 서준이 캐릭터는 따로 있나 봐.”
“그러게. 아, 이건가?”
어떤 캐릭터인지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고에 적힌 줄거리를 보면 서준이 맡은 역할이 대충 어떤 역인지 알 수 있었다.
박시영이 줄거리의 중심이 되는 캐릭터를 가리켰다.
“줄거리로 보면 이 캐릭터가 아마 이번에는 주인공인 거 같아.”
“거울도 연극만 본다면 서준이가 주인공이긴 했지.”
강재한의 말에 한지호가 킬킬 웃었다.
“그게 다 페이크였지만.”
전성민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등장인물 중 뒤에 적힌 세 캐릭터를 가리켰다.
“근데 이 세 명은 좀 뜬금없지 않아?”
확실히 처음 볼 때부터 등장인물 소개가 희한하다고 생각했던 김주경도 웃으며 동의했다.
“근데 재미있을 것 같긴 하다. 이렇게 이어 붙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반전도 재미있고.”
“그러게. 이해 안 되는 내용도 아니고…… SF잖아. 이런저런 설정을 붙여넣으면 아예 안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양주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우만 아니었으면 우리도 스포일러 없이 이걸 연극으로 봤을 텐데…… 아쉽다.”
박시영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공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떤 역이 좋을까…….”
졸업 공연 공고를 바라보는 미리내 예고 3학년들이 깊은 고민에 잠겼다.
* * *
서준의 졸업 공연 공고가 게시판에 붙고, 서준의 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5개의 등장인물 중 어떤 역할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허둥지둥하는 1학년들과는 달리 2학년들에게는 이것저것 물어볼 아주 좋은 인물이 있었다.
이서준 선배님과 벌써 두 작품이나 찍었고 그것도 둘 다 대흥행!
게다가 그중 한 작품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대중들에게는 배우 이서준 다음으로 주목받고 있는 아역 스타.
“오오. 김한석 님. 우리에게 지혜를!”
물론, 그전에 친구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2학년 2반 아이들은 마치 신에게 제사를 지내듯 과자와 음료수를 사와 김한석의 자리에 올려두고, 재능 낭비일 정도의 연기력을 보였다.
친구들의 장난에 으하하하 웃던 김한석이 이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근데 나도 서준이 형 오디션에서는 떨어져서…….”
“아, 그러네.”
단번에 납득한 친구들이 가져왔던 과자와 음료수를 다시 우르르 걷어갔다. 손도 못 대본 김한석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컷 웃은 2학년 아이들은 책상 위에 과자들을 다 뜯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1반 아이들도 자리를 잡았다.
“3학년들은 못 이기지.”
“그렇다고 오디션을 안 볼 수도 없잖아.”
만에 하나 2학년이나 1학년 중에 이서준 선배님의 오디션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정말 아쉬울 터였다.
2학년 중 하나가 휴대폰으로 찍어온 공고문을 살폈다.
“이거 세 개는 조금 가능성 있지 않겠어?”
역시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건, 독특하다면 독특할 세 캐릭터였다. 다른 2학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오는 분량이 적어 보이기는 하는데…….”
“근데 이런 게 의외로 씬스틸러가 될 수도 있지.”
으으음.
2학년 아이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원래 등장인물을 고르는 것부터가 오디션의 시작이긴 했다. 보통, 대부분의 작품들이 성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두 가지 캐릭터의 아역에서 고르면 되었지만, 학교 공연은 달랐다.
모든 역할이 학생들에게 열려 있었고 모든 역할에 지원할 수 있었다. 다른 연극보다 합격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학교가 ‘미리내 예고’인 데다가 현 3학년들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안다면, 누구든지 저절로 눈앞이 막막해질 터였다.
“경쟁자들이 어마무시하겠어.”
2학년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주인공 다음으로 분량이 많을 것 같은 캐릭터는 성별도 안 정해졌네.”
그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가장 첫 번째에 나오는 등장인물에게로 향했다.
[과학자]
다른 캐릭터들이 성별이 적혀져 있는 것과 달리 이 배역은 아예 처음부터 성별이 따로 없었다.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된다는 거겠지?”
“응. 연기하는 데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일 거야.”
“뭐, 줄거리를 보면 이해도 되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 하나를 입에 물고 아그작아그작 씹어대던 김한석도 등장인물들을 보며 고심했다.
“줄거리를 보면 서준이 형이 연기할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중심이고 그다음으로 인상 깊은 게 과학자네.”
“그럼 과학자에 지원자 많겠지?”
“그렇지 않을까? 성별도 안 정해져서 더 몰릴 것 같고.”
“이 캐릭터도 많을 것 같지 않아?”
1번 캐릭터인 [과학자] 다음으로 비중이 많은 2번 캐릭터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3학년들은 대부분 1번 캐릭터와 2번 캐릭터에 몰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다음으로는 4번?”
“4번도 꽤 나올 듯.”
“그럼 3번하고 5번을 노려야 하나.”
확실한 대본은 아직 못 봤지만, 줄거리만 보면 3번 캐릭터와 5번 캐릭터가 가장 분량이 적었다.
분량이 많지만, 경쟁자가 어마어마한 1번, 2번 역이냐.
분량이 제법 있지만, 경쟁자도 제법 있을 법한 4번 역이냐.
분량은 거의 없지만 무난한 경쟁자들만 있을 것 같은 3번, 5번 역이냐.
“으아. 이거 고민되네!”
2학년은 물론이고 3학년과 1학년들까지 서준이 붙여놓은 졸업 공연 공고문을 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이러지 말자. 우리.”
언제 수업 종이 쳤는지.
2학년 2반 교실 문 앞에 선 영어 선생님이 익숙한 풍경에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 * *
연기과만 고민에 빠진 게 아니었다.
미술과와 음악과도 제법 고심했다. 물론 수시와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3학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이거 이력에 들어갈까?”
이서준이 등장하는 연극의 음악과 배경을 맡았다고 하면 다른 이력보다 많은 관심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거울]의 음악팀 팀장이었던 피아노 전공 김채연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력서에 써넣기엔 좋아. 근데 수시가 연극 전이라서 문제지. 미리내 예고 입시 때도 이건 이력서에 못 넣었거든.”
문제는 그 많은 관심이 쏟아진 것이 미리내 예고 입시 이후였다는 것이었다.
“아, 그러네.”
김채연의 말에 친구들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떴다. 자기소개서에 써넣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못 쓰게 된다.
“이건 확실히 정하는 수밖에 없겠어.”
대학이냐, 그 이후의 이력이냐.
수시에 실패할 수도 있었고 이서준의 연극이 그렇게 관심을 못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럴 리는 없으려나?’
[거울] 때 서준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아는 김채원이 피식 웃고는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여유가 된다면 참가해도 나쁘진 않겠지만, 여유가 없다면 생각보다 바빠서 큰일일 거야.”
그렇게 3학년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3학년들보다 시간이 많은 음악과 2학년들과 1학년들은 앞으로 남은 일정을 살펴보고 단번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SF라고 해서 아예 기계음만 사용할 건 아닐 것 같지?”
“배경음악은 따로 깔아야지.”
“이번에도 레슨 같은 거 해주려나?”
약간의 사심을 담아 서준에게 지원서를 낸 음악과 학생들도 들뜬 얼굴로 SF 작품들의 배경음악을 살펴보았다. 어떤 음악을 사용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울]의 주목도를 보면 이번 연극도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미술과도 대학 입시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 3학년들과 달리 1, 2학년들은 제법 여유롭게 공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배경이 두 가지라…….”
“근데 이거 공연 중에 바꿀 수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미르홀 무대는 회전무대라서 괜찮아.”
“회전무대?”
미술과 1학년 1반 박민형이 되묻는 친구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세트를 다 무대 위에 세워두고 무대를 회전시키는 거야. 그러면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아.”
박민형의 말에 친구들이 눈을 끔벅였다.
“……미르홀에 그런 게 있었어?”
“아, 거기 일반 공연도 종종 하지? 나 거기서 연극 본 적 있어.”
“그랬어? 난 우리 학교 행사만 거기서 하는 줄 알았는데!”
“나도. 우리 학교 강당인 줄.”
“그러기엔 너무 낭비지.”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내 예고 옆에 자리 잡은, 커다란 미르홀을 학교 강당으로 쓰기엔 너무 시설이 좋았다.
“회전 무대가 있었구나. 그러면 준비하긴 편하겠다.”
“근데 민형이 넌 어떻게 회전 무대가 있는 걸 알았어?”
“으음. 그게…….”
박민형이 헤헤 웃었다.
“이서준 선배님이 졸업 공연하면 한 번 더 같이하고 싶었거든.”
“아, 민형이 너 중학생 때 이서준 선배님이랑 같이 졸업 공연 준비했다고 했지.”
오오.
그 말에 다들 놀란 눈으로 여울 예중 출신 박민형을 바라보았다.
연극 [거울] 때, 서준이 연기했던 ‘김진우’의 의상을 준비했던 박민형이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서 만약에 합격한다면 나는 미술팀일 테니까 무대부터 알아놔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여울 예중 여울홀이랑은 많이 다르더라. 더 넓고 더 좋아!”
무대 위에 설치된 조명이며, 관객석에서 바라볼 때 무대 위의 풍경, 이쪽은 조명이 잘 비치니 좀 더 무광의 소재가 좋겠다, 저쪽은 잘 안 보이니 조금 세트를 왼쪽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하고 떠드는 박민형의 모습에 다들 입을 쩌억 벌렸다.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하루 이틀 둘러본 게 아닌 것 같았다.
“너 진짜 대단하다…….”
미술 작품을 낼 때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서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나가는 대회마다 대상을 타 와서 천재라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역시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이 정도는 돼야 천재인 건가?’
친구들의 진심 어린 감탄에 박민형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문득, 친구들의 얼굴에 장난기가 샘솟았다.
“이거 이서준 선배님께 알려드리자!”
“그래! 당장 가자!”
“민형이 뽑아달라고 해야지!”
“아니! 잠깐만!”
기겁한 박민형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달려나가는 친구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낑낑댔다. 밖으로 나가는 시늉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킬킬 웃고 있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걸 보고 있던 아이들이 빵 터져 버렸다.
* * *
“역시.”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책상 위에 올려진 지원서들을 보며 서준은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변함없이 먼저 들어오는 건 음악과와 미술과의 지원서였다.
서준은 지원서를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익숙한 이름들도 보이고 처음 보는 이름도 보였다.
다시 살펴보아도 연기과 지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중학생 때라면 몰라도 한 번 겪어봤으니 이제는 마음 편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서준이 조금 흐릿하게 웃었다.
열심히 각색한 연극 [거울]이 무대에 올라가지 못할까 봐 어림짐작하고 기운 없이 시무룩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 조금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다.
크흠.
스멀스멀 올라오는 옛 기억에 헛기침을 한 서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휴대폰으로 서준이 오디션용으로 준비한 대본들을 보며 캐릭터들을 살펴보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이번에는 원작도 없으니까.’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역을 찾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서준이 지원서를 읽어 내려갔다.
‘원서 제출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이번 졸업 공연도 즐겁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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