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417화
“다음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최재원 다음은 박이든의 차례였다.
박이든이 올라갈 세트장은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TV가 있는 평범한 가정집 거실처럼 보였지만 블랙, 화이트 같은 보통의 색과는 달리 통통 튀는 색감의 거실이었다.
“오! 생각보다 폭신한데?”
박이든이 세트장의 소파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는 사이, 서준은 이제는 전부 외워 버린 콘티를 바라보았다.
[소파에 늘어져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박이든이 화면에 나오는 브라운블랙의 모습을 보고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눈을 빛낸다.]
“이든이가 브라운블랙 좋아한다는 건 알았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
“너한테 이야기하면 브블 선배님들한테도 전해질까 봐 부끄럽대.”
정은성의 말에 서준이 하하 웃고 말았다.
“어떻게 뮤비에는 넣을 생각을 했대? 형들에게만 알려지는 것보다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게 더 부끄럽지 않아?”
“그건 좀 다르지. 브블 선배님들은 당사자잖아.”
정은성의 말에 백이현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원래 동네방네 팬이라고 알릴 수는 있어도 당사자한테 말하기는 굉장히 부끄럽거든.”
“안 그런 사람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이제 브블 형들도 알게 됐네요.”
서준의 말에 모두 키득키득 웃었다.
브라운블랙의 황예준이 만든 곡인 데다가 서준까지 출연하니 브라운블랙이 뮤직비디오를 안 볼 리가 없었다.
“뭐, 다른 가수를 넣어도 된다고 했는데…… 다른 가수를 넣기에는 브블 선배님들이 너무 좋다더라고.”
최재원의 말에 서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브라운블랙에게 전해주면 정말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였다.
“컷! 한 번 더 갈게요! 이든 씨! 좀 불편해 보이는데, 편하게 누워요.”
그사이, 박이든은 세트장 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숙소에서는 백수처럼 잘 늘어져 있었는데 세트장에서는 조금 어색한 듯 카메라에 계속 걸렸다.
‘……소파라서 그런가?’
원래 소파라는 건 비싼 등받이가 아닌가.
바닥에 뒹굴뒹굴거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박이든은 잠시 소파 아래 바닥에서 찍는 건 어떨까, 고민했지만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소파 위에 지루하다는 듯이 늘어졌다.
그렇게 몇 번의 촬영 끝에 오케이가 나왔다.
같은 자세를 몇 번이고 반복한 박이든이 목을 옆으로 기울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으득으득, 시원하지만 관절 건강에는 안 좋은 소리가 났다.
“촬영도 쉬운 일이 아니네. 넌 이걸 어떻게 몇 달이나 해?”
“재미있으니까. 너도 무대 많이 서잖아. 연습도 열심히 하고.”
“그건 재미있…… 그러네.”
서준이 웃으며 말하자 무의식중에 대답하려던 박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겐 지루한 촬영도 누군가에게는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박이든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소파에 앉았다. 서준은 박이든이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의 가운데에 투명한 벽이 있는 듯했다.
“레디, 액션!”
블루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카메라가 브라운블랙의 모습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비추고 빙글 돌아 박이든을 비추었다. 지루하다는 듯이 늘어져 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상체를 앞으로 당기고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박이든의 설렘과 들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엔 연기할 것도 없었다.
그저 평소 브라운블랙을 볼 때의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가볍게 박자를 타던 박이든이 입을 열었다.
[저 높은 밤하늘에서]
[빛나던 별이 보였어]
마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브라운블랙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듯한 박이든의 모습을 비추고 있던 카메라가 옆으로 이동해 그 옆자리에 앉은 서준을 비추었다.
장 감독과 1팀장, 안다호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한 화면에 소파 오른쪽에 앉은 박이든과 소파 왼쪽에 앉은 서준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재원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던 서준이 이번에는 박이든과 같은 자세로 앉아 박이든을 그대로 복사한 듯 연기하고 있었다.
‘아까랑 바뀐 점은 하나도 없는데…….’
옷이며 머리며 화장까지.
짧은 촬영 때문에 수정 화장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차분하던 최재원과는 달리 동경하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 박이든을 그대로 연기하고 있는 서준의 모습에 장 감독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이거 나가면 난리겠네.’
이서준이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것도 떠들썩하겠지만, 감독이나 관계자들도 이서준의 연기력을 보고 다들 할 말을 잃을 터였다. 어쩌면 이 뮤비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작품이 나올지도 몰랐다.
‘어떤 작품일지는 모르겠지만.’
턱을 긁적거리던 장 감독이 모니터를 바라보다 외쳤다.
“컷! 오케이!”
조용하던 촬영장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 * *
박이든의 촬영이 끝나고 정은성의 차례가 되었다.
정은성은 영화 상영관처럼 꾸며진 세트장을 둘러보았다.
보통의 영화관처럼 수백 개의 자리가 만들어진 건 아니었고 앞뒤 양옆으로 제법 간격을 넓혀서 가로로 석 줄, 세로로 다섯 줄, 총 열 다섯 개의 의자가 계단식으로 놓여 있었다. 역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검은색이 아니라 파스텔 톤의 알록달록한 색들이라 장난감처럼 보이기는 했다.
의자의 맞은편에는 적당한 크기의 스크린이 있었는데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는 영화는 정은성의 인생 영화이기도 했다.
“나도 이거 영화관에서 봤어.”
서준의 말에 정은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 이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으면 래퍼는 못 됐을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이르게 찾아왔던 사춘기에 만난, 한 래퍼의 일생을 다룬 영화는 정은성에게 래퍼라는 꿈을 심어주었다.
그건 배우인 서준에게 참 신기하고 재미있으며, 어깨가 으쓱해지는 일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직업을 보고 꿈을 가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종 들었고 동생, 수빈이도 [오버 더 레인보우]를 보고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영화를 계기로 꿈을 이룬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출연도 안 한 서준이 뿌듯해하는 사이, 블루문 멤버들은 질린 눈빛으로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바라보았다.
“난 이제 대사까지 외울 듯.”
“저도요.”
정은성과 같이 숙소 생활을 하면서 저 영화를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그 외침에 정은성은 스태프가 건네준 팝콘과 음료수를 가지고 스태프가 미리 알려준 자리에 앉았다.
5개씩 3줄로 놓여 있는 관람석에서 한가운데 자리의 오른쪽 자리.
데칼코마니를 하듯 한가운데 자리의 왼쪽에 서준이 앉을 예정이었다.
카메라 밖에 앉아 있던 서준과 블루문 멤버들은 남은 팝콘을 냠냠 집어 먹었다.
“레디, 액션!”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정은성의 얼굴 위에서 반짝인다. 팝콘과 음료수를 먹으며 정은성이 뚱한 표정을 짓는다.
“어쩐지 은성이 사춘기 때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지 않아?”
“그러게. 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팝콘을 집어 먹던 백이현과 김시훈이 키득키득 웃으며 속삭였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서준과 박이든, 최재원도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작게 웃었다.
뚱한 표정을 지으며 영화를 보고 있던 정은성이 어느 순간부터 팝콘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었다. 지금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장면은 정은성이 그 옛날 멍하니 바라보았던 장면이었다.
1팀장님께 부탁해 일부러 타이밍을 맞춰서 그런지, 그때의 감동과 울렁임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오케이 소리가 들렸다.
박이든보다 빠른 오케이에 김시훈과 백이현이 박이든을 놀려댔다. 서준과 최재원, 그리고 세트장에 있던 정은성까지 웃었다.
“여기 팝콘이랑 음료수예요.”
“감사합니다.”
스태프에게서 소품으로 쓸 팝콘과 음료수를 받은 서준이 세트장 위에 올랐다.
서준은 지정된 자리, 정은성의 옆 옆자리에 앉아 왼쪽 손에 팝콘 통을 들고 의자 손잡이에 음료수를 놓아두었다.
“레디, 액션!”
스피커에서 블루문의 음악과 함께 랩이 흘러나왔다. 메인래퍼 정은성의 목소리였다.
촬영을 위해 꺼놓은 영화의 소리 대신 블루문의 음악이 들려왔다. 꼭 블루문의 음악이 영화의 OST로 삽입된 것 같았다.
카메라가 영화 속 래퍼를 아주 잠깐, 그리고 정은성의 모습을 비쳤다. 이어지는 화면에 끊임없는 랩은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관객석에 앉아있는 정은성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동시에 서준도 정은성의 모습을 떠올리고 살피며 그 모습 그대로 연기해 나갔다.
* * *
점심을 먹고 촬영을 위해 다시 움직이려던 찰나, 촬영장이 시끌벅적해졌다.
양치를 하고 나온 서준과 블루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호 형. 무슨 일이에요?”
“조명에 조금 문제가 있대. 예비용도 있으니까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네.”
안다호의 말에 서준과 블루문이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준과 블루문이 촬영장 한쪽에 마련된 대기 의자에 앉아 촬영이 다시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길어지는데?”
1팀장과 안다호가 별말이 없는 걸 보면 큰 문제는 아는 것 같았지만, 서준과 블루문의 예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스태프들을 보고 있던 백이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올까?”
“그래. 그러자.”
날도 더우니 아이스크림만 한 간식도 없으리라.
박이든과 김시훈이 재빠르게 스태프들의 인원수를 세는 사이, 서준과 정은성은 얼굴을 가릴 만한 것들을 하나둘 챙겼다.
최재원과 백이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안다호와 1팀장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에만 있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1팀장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최재원에게 건네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네!”
블루문의 매니저를 보호자로 벙거지모자와 마스크를 쓴 서준과 블루문이 촬영장 밖으로 향했다.
* * *
딸랑.
휴대폰으로 저번 주 레드크라운의 무대를 보고 있던 알바생이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길쭉길쭉한 사람들이 우르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알바생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냈다.
‘촬영 왔나 보네.’
이곳은 근처에 있는 촬영장과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평소에는 스태프들만 들락날락하지만 가끔은 연예인들이 직접 올 때가 있었다.
그렇게 몇몇 연예인들을 봤던 알바생이 눈을 데굴 굴리며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을 제외하고 멤버가 여섯 명인 남자 아이돌이 누구일까, 생각했다.
“음료수도 사 갈까요?”
“그래. 그러자.”
두 팀으로 나눠져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사는 모습을 보니, 멤버들 것만 사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회색 모자가 검은색 벙거지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 오렌지 주스?”
이름이 ‘서’라니 특이하다.
벙거지모자 아래로 빼꼼 보이는 파란색 머리카락 색도 아이돌인 걸 보여주는 듯 화려했다. 다들 검은 머린데 혼자 파란색이라 눈에 띄기도 했다.
‘역시 아이돌.’
사이가 안 좋은 그룹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 아이돌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벙거지모자의 옆에 다른 멤버들이 붙어서 떠들어댔다.
“형들은 뭐 마실래요?”
“난 이거. 근데 조명 못 고치면 뮤비 촬영 늦어지겠지?”
“형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대부분 여기 오는 아이돌들이 그렇듯, 이 그룹도 뮤비를 촬영하는 모양이었다.
벙거지모자와 멤버들이 냉장고의 주스들을 와르르 가져와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역시 삐죽 튀어나온 파란색 머리칼에 시선이 갔다.
“아이스크림부터 계산해 주세요.”
그 위에 아이스크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계산하기 위해 알바생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돌 멤버들도 바코드를 찍은 아이스크림을 봉지에 챙겨 넣느라 바빴다.
“형. 아이스팩 있어요?”
“여기 얼음 있는데. 얼음이랑 같이 넣어가도 되지 않을까?”
“괜찮을 것 같아요. 음료수에도 넣어도 되고.”
들려오는 아이돌들의 목소리가 왠지 익숙했다. 하지만 누구인지 생각하기에는 계산대에 올라온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삑삑삑-
빠르게 바코드가 찍혀나갔다.
“계산은 카드로 할게요.”
아이돌이 내미는 카드를 받은 알바생이 계산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아이돌이 빙그레 웃었다. 알바생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낯익은 얼굴인데 누군지 잘 떠오르지는 않았다.
아이돌들과 매니저가 편의점 밖으로 나가고 물건들을 정리한 알바생이 한숨을 돌리며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흠칫 몸을 떨었다.
레드크라운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어디 가고 남자 목소리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영상이 계속 재생되고 있던 모양인지 레드크라운의 영상이 끝나고 알고리즘으로 다음 동영상이 재생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
바로 이어 들으니까 알 것 같았다.
알바생이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제목에 아이돌 이름이 적혀 있었다.
“블루문이었구나.”
작년 하반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흥했던 노래의 주인공들이었다.
올해 예능에도 몇 번 나오고 자료 화면으로도 몇 번 나와 익숙해지기도 했다. 영상을 보니 아까 계산한 멤버는 최재원인 듯했다.
알바생은 평소에는 알 수 없었던 알고리즘을 이번에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같은 소속사라서 재생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화면 속, 음악 방송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여섯 명이던데?”
고개를 갸웃하던 알바생이 자주 가던 사이트에 짧은 글을 올렸다. 알바생은 그저 레드크라운 이전에 좋아했던 걸그룹의 일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블루문 멤버 한 명 추가됨?]
폭풍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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