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93화
다음 날.
[흘러가다] 팀이 칸에 도착했다. 마중을 나가기엔 사람들이 몰릴 것 같아 서준은 칸 영화제 측에서 구해준 숙소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서준이 형!”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김한석이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팔팔한 김한석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조금 지쳐 보였다.
“일정은 모레부터 시작이니 오늘 푹 쉬고 내일 관광하시면 됩니다. 아, 배우분들하고 민 감독님은 내일 저녁에 한판 상영이 있어서 레드카펫 행사에 참여해야 되니 시간까지 꼭 돌아오세요.”
이틀 전, 먼저 도착한 단홍의 직원이 숙소를 배정하며 간단히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했다. 거의 반쯤 졸린 눈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던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녁 먹고 바로 방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프랑스에도 한식집이 있어 [흘러가다] 팀은 따뜻한 국물에 흰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든든하게 먹은 사람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가고 아직 쌩쌩한 김한석이 서준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다음 날.
저녁이 되자 뤼미에르 극장 앞에 턱시도를 입은 기자들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다리를 바닥에 설치한 다음 카메라를 체크하고 바로 기사를 올릴 수 있게 준비도 했다.
“30분도 안 될 텐데 라이브를 한다고?”
“너튜브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조회 수도 많이 나와.”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렸다.
이지석, 김종호 주연의 [한판] 상영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 영화인데 많이 오려나?”
“감독이나 배우들 인맥이 있으면 좀 오겠지만…….”
한국 기자 하나가 턱을 긁적였다.
[한판]의 김주형 감독은 칸 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건 단편 부문이었다.
“일단 이서준은 오고.”
“에반 블록하고 리첼 힐도 올 가능성이 있긴 하지. 이스케이프도 같이 찍었으니까.”
에반 블록과 리첼 힐도 이지석과 김종호도 이서준의 인맥으로 연결된 카메오였지만 말이다.
“생존자들 배우들은 안 오려나?”
“입국 소식은 없던데…… 오면 대박이지.”
경쟁 부문이라서 그런지 꽤 많은 외국 기자들도 레드카펫 옆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하나둘 레드카펫을 구경하러 왔다.
잠시 후.
[한판]의 레드카펫 행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한판]의 감독과 배우들이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플래시에 익숙한 배우들과 조금 어색해 보이는 감독의 모습이 보였다.
“다 같이 서주세요!”
“이지석 배우! 김종호 배우! 투 샷 찍을게요!”
가장 목소리가 높은 건 역시 한국 기자들이었다.
[한판]의 김주형 감독과 배우들은 아래에서 한바탕 사진을 찍고 계단 위에 올라 다시 사진을 찍었다.
셔터 소리가 좀 수그러들려는 찰나, 새로운 배우들이 등장했다.
꼭 올 거라고 생각했던 이서준과 [흘러가다] 팀이었다.
서준이나 다른 영화제에도 제법 참석했던 김호영, 최현희는 웃으며 사진을 찍혔지만, 정장이 아직 어색한 듯한 김한석은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에 엉거주춤 섰다. 민희경 감독도 어색한 듯 입꼬리를 떨며 웃고 있었다.
“허리 펴. 여기서 찍히면 바로 한국에 기사로 뜬다?”
“앗!”
웃으며 속삭이는 서준에 김한석이 얼른 허리를 쫙 폈다. 너무 힘이 들어간 모양인지 삐걱거리는 김한석 모습에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연신 찍어대는 카메라들에 어쩐지 어떤 기사가 뜰지 상상이 갔다.
“민희경 감독님!”
“김호영 배우! 이쪽 좀 봐주세요!”
“최현희 배우! 김한석 배우!”
“/준! 여기요!/”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셔터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 위에 서 있던 [한판] 팀이 반갑게 [흘러가다] 팀을 반겼다.
“와 줘서 고마워.”
“내일 안 오실 거예요?”
“가야지!”
서준의 말에 이지석과 김종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직 덜 왔어요.”
“응?”
서준의 말과 함께 레드카펫 끝에 새로운 차가 멈춰 섰다.
어쩌면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차에서 내리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두 분 다 오랜만입니다.”
에반 블록이 웃으며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오실 줄 몰랐는데…….”
“같은 작품에 출연한 인연이 있잖아요. 어떤 영화인지 기대도 되고요.”
놀라는 이지석과 김종호에 리첼 힐이 웃으며, 역시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한판] 팀도 [흘러가다] 팀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기는 들었는데, 상상보다 더 잘했다.
“아, 이쪽은 저희 영화 감독님이십니다.”
얼떨떨한 얼굴로 할리우드 스타들을 보고 있던 김주형 감독이 이지석의 소개에 얼른 손을 내밀었다. 에반 블록이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좋은 장면이었다.
카메라가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는데, 놀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두 대의 차가 나란히 멈추고 차에서 네 사람이 내렸다.
네 사람의 얼굴을 본 모두 깜짝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미리 알고 있었던 서준만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데이비스 가렛?!”
“밀란 첼런도 있어!”
“/제프리 로덕스 감독! 칸에 왔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바네사 올슨까지!/”
작년 여름을 단맵단맵으로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생존자들] 팀이 도착했다.
잠시 주춤하던 플래시가 번개라도 치는 것처럼 번쩍번쩍 터졌다. 여기저기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판]의 배급사와 칸 영화제 측이 다급히 움직였다.
“/여긴 어쩐 일로……?/”
“/영화 보러 왔죠./”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제프리 감독과 밀란 첼런이 웃으며 김종호와 인사를 하고 데이비스 가렛과 바네사 올슨이 서준과 인사했다.
“/이분은 종호 삼촌 영화 감독님이고요. 이분은 제 영화 감독님이세요./”
“/반갑습니다. 제프리 로덕스입니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서준의 소개에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나누었다.
김주형 감독도, 민희경 감독도 너무 놀라 자신이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서준의 뒤에 찰싹 달라붙은 김한석이 입을 열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준이 형. 다들 어떻게 오셨대요? 기사는 못 봤는데!”
“데이비스는 근처에서 휴가 중이었대. 칸에 시선이 쏠리면 다른 곳은 나름 한산하다던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원래 이쯤 올 예정이었대.”
“그럼 내일 우리 상영 때도 오세요?”
“응. 다들 오신다던데? 다른 분들도 오신대.”
“……누구요?”
“라이언 감독님이랑 사라 감독님이랑 스왈린이랑 캐서린, 폴이랑……몇몇 더 올지도 모르겠어.”
“……워…….”
서준의 말에 김한석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무섭다. 무서워. 서준이 형의 인맥……!’
“/이쪽은 저랑 같이 출연한 배우예요. 이름은 김한석이고 같은 학교 후배고요./”
“/알아. 한 걸음에 나왔지?/”
“/오. 나도 봤어. 연기 잘하던데?/”
바네사 올슨과 데이비스 가렛의 말에 김한석이 식은땀을 흘렸다. 말을 걸어줘서 기쁘긴 한데 영어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둘 다 한 걸음 봤대. 데이비스가 너한테 연기 잘한대.”
“땡, 땡큐……!”
김한석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말하자 바네사 올슨과 데이비스 가렛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대화할 용기가 없어 도움을 청하는 김한석의 눈빛에 서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어떻게 봤어요?/”
“/앤드류가 가르쳐 주더라고./”
“/앤드류는 학교 가서 못 온다면서요?/”
“/그러게. 얼마나 찡찡대는지……귀여워 죽겠다니까!/”
그사이 한국에도 기사가 전해졌다.
해도 안 뜬 새벽이었지만 조회수는 순식간에 올라갔다.
[‘한판’ 레드카펫에 데이비스 가렛 깜짝 등장!]
[‘한판’ 레드카펫 위에 모인 생존자들!]
-아니, 여기서 왜 나와???
-흘러가다면 몰라도 한판에서 만날 줄이야.
=내일이 흘러가다 상영일이라 오늘 와서 겸사겸사 보는 거 아님?
=그럴지도.
=그래도 사진 보면 분위기는 좋은 듯.
-이러다 저기 있는 배우들 할리우드 영화 나가는 거 아니야?
=ㅋㅋ그러게ㅋㅋ
레드카펫 행사가 끝나고 모두 관람을 위해 극장 안으로 이동했다.
스타들이 사라지고 조용해지려던 레드카펫 주위가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졌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너덜거리는 종이를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티켓 구함!]
[한판!]
* * *
뤼미에르 극장 안.
초대장과 티켓을 구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서준에게서 초대장을 받은 찰리도 서준의 근처에, [한판]의 배급사에서 초대장을 받은 영화객도 자리에 앉았다.
한 자리도 남지 않았다.
잠시 후.
극장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이 밝아졌다.
[한판]의 시작은 작은 도박장이었다.
이지석이 연기한 김영호는 도박꾼이었고 김종호가 연기한 박만석은 한 조직의 행동대장이었다.
작게 시작한 도박판은 목숨이 걸린 ‘도박 한판’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규모는 점점 커졌다. 김영호는 이 ‘한판’에 모든 걸 걸기로 했다. 완벽하게 이길 방법이 있었다.
“여기서 사기라니! 박만석한테 걸리면 죽어!”
“새X. 쫄긴. 절대 안 들켜!”
동료 도박꾼의 말에 김영호가 킬킬 웃었다. 하지만 그런 장담과 달리 박만석에게 들켜 버린 김영호는 돈을 들고 도망쳤다.
부산에서 촬영했던 장면이 나왔다.
모니터링했을 때도 느꼈지만, 음악과 편집까지 더해지니 죽일 듯이 쫓아가는 박만석의 부하들과 있는 힘껏 도망가는 김영호의 추격전이 정말 살벌해 보였다.
숨도 쉬지 않고 모두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낯설어 보일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들과 회색빛 시멘트 담벼락 사이로 김영호와 검은 정장을 입은 조폭들이 쫓고 쫓기고 있었다.
연신 뒤를 돌아보는, 초조함이 가득한 김영호의 눈동자와 차분하지만, 분노가 담긴 박만석의 눈빛이 교차되었다. 저절로 손에 땀이 차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결국, 잡힌 김영호의 앞에 박만석이 나타났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박만석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김영호의 눈빛이 살벌했다. 박만석이 주먹을 쥐고 김영호의 얼굴을 내려쳤다.
윽!
인정사정없이 내려치는 주먹에 관객석 어디선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만석은 오른쪽 눈과 왼쪽 손이 망가진 김영호를 다른 조직의 도박판에 밀어 넣었다.
박만석 때문에 오른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김영호는 그곳에서 분노와 증오를 불태우며 숨을 죽이고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돈을 벌고 도망치면서 박만석의 탓으로 돌린다. 행동대장인 박만석을 어찌하려면 적대 조직과 커넥션이 있다고 모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일개 도박꾼인 김영호의 계획은 잘 맞아갔고 결국 박만석의 조직과 적대 조직이 한바탕 붙게 되었다. 하지만 김영호가 박만석이 보낸 사실도 드러나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김영호가 끌려와 박만석의 앞에 내던져졌다. 적대 조직원이 뭐라 뭐라 말했지만, 김영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숨겨 놓았던 칼을 꺼내 박만석을 노렸다. 심장과 가까운 쪽, 왼쪽 옆구리에 푹! 칼이 찔렸다. 박만석이 비틀거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 조직 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난전이었다.
김영호는 살기 위해 난전 속에서 몸을 피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땅을 구르고 기어나가면서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박만석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싸워댔다. 적이 쓰러지는 만큼 부하들도 쓰러져나갔다. 더 이상 불러올 부하들도 없었다. 아파오는 옆구리에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결국, 이긴 것은 박만석이었다.
몇몇 부하들과 숨을 몰아쉬는 박만석이 보였다. 누군가의 발에 차인 김영호가 땅에 드러누워 숨을 헉헉 내쉬었다. 박만석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새하얀 담배에 피가 묻었다.
“택시 불러.”
“택시 타고 가시…… 예!”
부하가 다리를 절며 밖으로 나갔다.
담배 연기를 후우 내뱉은 박만석이 걸음을 옮겼다.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김영호에게로 다가갈수록 관객들의 숨도 잦아들었다.
‘……죽이나?’
주인공이 죽는 건 드문 일이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앞에 [생존자들]도 있지 않나.
입을 꾹 닫은 관객들은 김종호의 걸음 하나하나, 이지석의 꿈틀거림 하나하나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박만석이 김영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김영호는 그 손목을 두 손으로 잡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끌려갔다. 바닥에 핏자국이 쓸렸다.
‘뭔데, 뭐야?’
김한석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택시가 도착했다.
택시기사는 상황을 보고 기겁하다가 부하가 내미는 많은 돈에 택시 문을 활짝 열었다.
박만석이 김영호를 택시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손짓하고 자신도 그 옆자리에 올라탔다.
‘……???’
김영호가 택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창문을 연 박만석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다가 아려오는 옆구리에 절로 인상을 썼다.
“……존나 깊게 찔렀나 본데…….”
“심장은 잘 피했습니다.”
???
관객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가득 떴다.
‘김영호 말투가……?’
영어 자막으로도 그 차이가 드러나고 있었다.
“눈은?”
“원래도 잘 안 보여서 괜찮습니다.”
“쯧.”
“이게 제일 확실했습니다.”
험악한 분위기에 백미러로 눈치만 보고 있던, 배짱 좋은 택시기사가 생각보다 괜찮은 분위기에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고. 두 분 다 많이 다치셨네. 근데 서로 아는 사이신가?”
박만석이 김영호에게 찔린 옆구리를 누르며 말했다.
“사위입니다.”
김영호가 박만석에게 당한 오른쪽 눈가를 휴지로 닦으며 말했다.
“장인어른이시죠.”
장인, 박만석과 사위, 김영호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희미한 미소가 두 사람의 입가에 머물렀다.
딸을 위한,
아내를 위한,
목숨과 인생을 건 ‘복수 한판’이 드디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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