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91화
칸 영화제 개막식 다음 날부터 서준과 에반 블록은 점 찍어 놓은 영화를 보기 위해 움직였다. 하루에 3, 4편이나 볼 자신은 없는 리첼 힐은 간간이 함께했다.
“오늘은 이렇게 3개지?”
“네. 맞아요. 극장끼리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하긴. 어젠 제시간에 도착한다고 고생 좀 했지. 점심도 여기서 먹으면 되겠다.”
“여기 맛있었죠!”
에반 블록이 휴대폰 지도에서 한 식당을 가리키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근처에서 영화를 보고 들렀는데 꽤 맛있는 식당이었다.
그런 서준과 에반 블록에 리첼 힐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다가는 극장마다 단골 식당이 생길 것 같았다.
“리첼은 안 가요?”
“오늘은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리첼 힐의 말에 서준과 에반 블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취향은 다 다르니까 말이다.
“그럼 나중에 보자!”
리첼 힐의 배웅을 받으며 서준과 에반 블록이 호텔 밖으로 나왔다.
두 배우 모두 레드카펫에서의 화려한 모습은 사라지고 편안한 옷차림에 뜨거운 햇빛을 막을 수 있는 모자에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 거기에 텅 빈 가방을 메고 팸플릿까지 들고 있으니 정말 관광객 1, 2처럼 보였다.
“그럼 갈까?”
“네!”
오늘도 만족스러운 영화 관람을 위해 두 배우가 걸음을 옮겼다.
* * *
칸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흘러가다]의 제작사, 단홍의 홍보기자가 된 영화객이 카메라로 주변을 비추었다.
그 모습이 별로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길거리에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벌써 3일째네!
-개막식부터 참석할 줄은 몰랐다.
-새벽이었지만 나는 봤지! 레드카펫 서준이 멋있더라!
“모두 단홍에서 체류비를 지원해 준 덕분입니다! 모두 흘러가다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이러다 귀에 딱지 생기겠다ㅎ
-222 어차피 볼 거니까 홍보 그만.
-홍보기자한테 홍보 그만하라는 건갘ㅋㅋㅋ
시청자들의 타박에 영화객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 영화는 다 봤네요. 저녁 때 뤼미에르 극장에서 비경쟁 부문 중 미드나잇 스크리닝으로 초청된 박중우 감독님의 수려를 볼 예정입니다.”
-오. 수려!
-재미있겠던데.
-근데 난 이런 장르 영화는 칸 영화제에 초청 못 받는 줄 알았음.
-칸 영화제가 그런 이미지긴 하지.
“미드나잇 스크리닝이 그런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부문입니다. 주제의식이 강렬한 영화도 좋지만, 재미도 놓칠 수 없으니까요.”
-수려 감독이 한 걸음 감독이라서 더 기대 중.
-그랬어?! 지금도 한 걸음 보고 있는데!
-어쩐지. 방송국에서 계속 방송하더라ㅎ
-배우들도 괜찮음.
-특수분장팀 실력도 기대할 만함.
-수려 레드카펫에 서준이가 올까요?
-??? 레드카펫을 또 함???
시청자의 의문에 영화객이 대답했다.
“칸 영화제는 레드카펫 행사가 정말 많습니다. 일단 우리가 봤던 개막식 레드카펫과 25일에 진행될 폐회식 레드카펫, 그리고 작품별로 상영하기 바로 직전의 레드카펫 행사가 있죠. 경쟁 부문에 오른 20개 작품은 물론이고 비경쟁 작품까지 레드카펫 행사를 엽니다. 수려도 당연히 레드카펫 행사를 열 예정입니다.”
-배우들도 영화 볼 때마다 레드카펫 지나려면 피곤하겠다;;;
-왜 그렇게 많음?
-홍보임.
“네. 홍보를 위해서입니다. 스타들이 모이면 관심이 쏠리고, 관심이 쏠리면 한 명이라도 더 영화를 보게 되잖습니까. 입소문이 나면 영화 수입사들도 관심을 가질 테고요. 여기가 엄청 큰 필름마켓이라서 입소문만 잘 나도 세계 각국으로 엄청 팔리거든요. 자, 그럼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칸 구경이나 해볼까요?”
영화객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댓글 하나가 올라왔다.
-근데 저 사람 에반 블록 아님?
“……네?”
뜬금없는 이름에 영화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는 영화객과는 달리 시청자들의 댓글이 와르르 올라왔다.
-22 나도 긴가민가하긴 했음.
-333 왜 첫날 라이브 볼 때부터 계속 보는 것 같지?
-신기하게 장소는 계속 바뀌는데 같은 사람이 계속 보여ㅋㅋㅋ
-영화 취향이 같은가?ㅋㅋ
눈을 몇 번 깜빡인 영화객이 슬쩍 댓글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모습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칸은 휴양지고 바로 옆에 해변이 있어 관광 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칸 영화제 때는 더욱 그랬다.
배우나 가수는 아니지만, 영화제의 일원이 된 것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고 독특한 패턴의 옷을 입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도 많았지만 시원한 옷차림인 사람들도 많았다.
그저 관광객처럼 보이는 남자의 모습이지만 영화객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진짜 에반 블록이다…….”
-잠깐! 옆에……!!
-그치?!!
-나도 아까부터 시선이 감ㅋㅋㅋ
-아ㅋㅋ 이렇게 보네ㅋㅋ
-에반 블록이랑 같이 있는 동양인이라면 뭐ㅋㅋㅋ
-한 사람뿐이지ㅋㅋㅋ
영화객의 시선이 에반 블록의 옆으로 향했다. 무어라무어라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는 얼굴이, 선글라스에 눈 쪽이 가려졌지만, 저절로 눈길이 갔다.
-서준이!
-이서준!! 이서준이다!
-카메라!! 카메라 돌려!!
이서준이었다.
“헉! 잠깐만요!”
이대로 촬영해도 되는가 싶어, 영화객이 얼른 하늘 쪽으로 카메라를 돌리고 휴대폰을 꺼냈다.
-……꼭 프랑스에 오면 하늘을 보는 기분인데…… 나만 그럼?
-오늘은 셀 별도 없어ㅠ
-……얼마나 오래된 고인물들이냐ㅋㅋ
허둥지둥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영화객을 바라보던 서준이 에반 블록에게 속삭였다.
“에반. 우리 들켰나 본데요?”
“그렇지?”
“첫날부터 극장마다 자주 보여서 들킬 것 같긴 했어요.”
“그러게. 우리랑 영화 취향이 비슷한가 봐.”
리첼 힐이 알았다면 영화 취향이라기보다는 너희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계속 만나는 거라고 말했겠지만, 여기엔 리첼 힐이 없었다.
“근데 촬영 중인가?”
“으음. 영화객 님은 라이브를 자주 하시거든요.”
“라이브면 벌써 기사 났겠네. 뭐, 장소가 장소라 사진 찍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
그래도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수려만 보면 끝이니까.”
“내일부턴 옷차림을 바꿔야겠어요.”
오늘과 비슷한 옷이면 금세 들킬지도 몰랐다. 서준의 말에 에반 블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서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단홍이었다.
“네. 여보세요.”
-이 배우님. 방금 영화객 님한테서 전화 받았는데 영화객 님이 근처에 계세요?
“네. 여기서도 보여요.”
서준이 바라보자 눈이 마주칠 듯 마주치지 않는다. 저쪽도 이런 곳에서 만날 거라는 생각도 못 해 놀란 눈치였다.
-인터뷰 잠시 가능하냐는데, 라이브 방송 중이시래요.
“전 괜찮아요. 에반. 잠깐 인터뷰하고 가도 될까요?”
“나도 괜찮아. 수려 상영 시간까지 아직 멀었고.”
에반 블록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준이 인터뷰를 수락했다.
-그럼 곧바로 장소를 구해볼게요. 밖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전화가 끊어지고 영화객이 전화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객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잠시 후.
단홍의 지휘 아래 인터뷰 장소가 마련되었다. 해변이 보이는 한 카페였다.
댓글을 보기 위해 커다란 모니터가 설치되고 카메라는 영화객의 카메라를 쓰기로 했다. 그 모습도 전부 생생하게 라이브로 방송되는 중이었다.
-서준이랑 에반이라니! 내가 다 떨리네.
-에반 블록도 인터뷰하나? 영화객 님 영어 잘하시잖아.
-에반 블록도 한국어 잘하고.
-!! 그랬지!!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며 서준와 에반 블록이 웃었다.
기대하는 한국인 팬들을 위해 에반 블록도 인터뷰에 참여하기로 했다.
모니터가 설치되는 동안 분위기를 풀기 위해 서준과 에반 블록, 영화객이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 그거 봤어요.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가 연기를 잘했죠.”
“감독 연출 실력도 좋았습니다. 다음 차기작도 꼭 보고 싶던데요.”
“그렇죠? 전작에서 많이 발전한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한 대화가 어느새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화에 푹 빠진 리뷰 전문 너튜버와 두 배우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끼어들기엔 다들 즐거워 보였고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인터뷰가 아니라 감상회야?
-어쩐지…… 영화객이 본 영화를 두 배우 다 본 것 같은데.
-영화객이야 리뷰가 직업이지만…… 배우는 촬영하기도 바쁘지 않나?
-서준인 학교까지 다니고.
-성적도 좋다던데;;;;
-인간이 아닌가.
마지막 댓글에 서준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뜻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금은 인간이지만 수천 수백의 삶을 몬스터로 살아온 터라 찔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준의 시선에 고개를 돌린 영화객이 댓글들을 읽고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요?”
-벌써 20분 지났어요.
-ㅋㅋㅋㅋ
“질문 있으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영화객의 말에 ㅋㅋㅋ과 함께 질문들이 올라왔다.
예전 영화들의 이야기부터 두 배우와 뗄 수 없는 쉐도우맨 이야기까지.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고 모르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재미있었다.
-올해 마지막인데 졸업 공연하나요?
“그렇네요. 이서준 배우의 졸업이 올해잖아요? 그동안 연말 공연이 없었는데 졸업 공연은 하나요?”
영화객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 블록도 흥미를 가졌다.
“졸업 공연이라는 게 플러스에 올라온 거울 같은 작품 말하는 거지?”
-이야…… 너무 자연스러운 한국어.
-눈 감으면 한국인인 줄.
-아까 감상회할 때는 나보다 한국어 잘하던데ㅎ
에반 블록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댓글들이 폭발하고 있었다.
“네. 맞아요.”
에반 블록에게 대답해 준 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올해는 졸업 공연을 할 거예요. 저희 학교에서는 연극이랑 영화를 올릴 수 있는데 아마 연극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오. 그렇군요. 어떤 연극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거울처럼 소설을 각색한 이야기인가요?”
“아직 어떤 작품을 할지 정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기존에 있는 작품보다는 새로운 작품을 하고 싶어요.”
-아쉽. 연극은 직접 가서 봐야 재미있는데.
-22 플러스도 좋긴 하지만 이서준 연극 직접 보고 싶다!
“직접 보고 싶다는 분들이 많은데 이번에도 내부 공연으로만 진행되나요?”
“내부 공연?”
에반 블록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준이 대답했다.
“졸업 공연은 학교 학생들하고 관계자들만 볼 수 있거든요. 예외가 있긴 하지만요.”
-근데 미리내 예고는 그것도 있잖아. 정식 공연!
-22 작년에 음악 공연 같은!
영화객이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정식 공연이라는 게 있다는데…… 정식 공연은 뭔가요?”
“12월에 졸업 공연을 진행하는데 선생님들의 평가가 좋으면 은하수 센터에서 정식으로 공연하거든요. 1월, 2월 겨울 방학 동안요.”
-오오오! 보러 갈 수 있는 건가?
-은하수 센터에서 하는 거면 무료야, 유료야?
-유료임.
“꼭 이서준 배우 연극이 정식 공연이 됐으면 좋겠네요.”
“저도요. 아직 뭘 할진 정해지진 않았지만요.”
진심으로 바라는 듯한 영화객의 말에 서준이 방긋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표를 살 수 있을까?
-그러네. 라이브 방송에서 이렇게 말하면 홍보는 너무! 확실하게! 잘된 거 아님?
-와…… 새벽 1시가 넘었는데 시청자가 왜 이렇게 많아?
-기사도 엄청 뜸;;;
-정식 공연하면 경쟁률 장난 아닐듯ㅠㅠ
* * *
그날 저녁. 뤼미에르 극장 앞.
레드카펫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서준이 반가운 얼굴에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박 감독님. 조감독님.”
“오랜만이네. 서준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박중우 감독과 김수한도 활짝 편 얼굴로 서준을 반겼다.
오오.
친해 보이는 배우와 감독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눈을 빛내고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졌다.
배급사 직원들의 입꼬리가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이서준이 올 거라고는 기대했지만, 저 배우들도 올 줄은 몰랐다.
“한 걸음, 잘 봤습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서준의 옆에 서 있던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웃으며 말했다.
두 할리우드 스타의 한국어 실력에 박중우 감독도 김수한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나누었다.
“감독님! 이쪽 좀 봐주세요!”
“배우분들도 같이요!”
“/에반! 리첼! 준! 이쪽 좀 봐주세요!/”
악수를 하는 한국 감독과 할리우드 스타의 모습에 한국 기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별생각 없이 왔던 외국 기자들도 눈을 빛내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저기 에반이랑 리첼이 있다고!?/”
“/준도 있대!/”
누군가 유명한 스타가 오지 않을까, 하고 뤼미에르 극장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할리우드 스타들의 등장에 우르르 몰려왔다.
거기에 세 스타가 보려는 영화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수려]의 티켓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그 뜨거운 열기에, 빈자리를 걱정하던 배급사 직원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한국 기자들은 신이 나서 기사들을 써 내려갔다.
[‘수려’ 인기! 티켓을 구하는 사람들!]
[박중우 감독 ‘수려’ 레드카펫에 이 배우들이?!]
[‘수려’ 레드카펫, 이서준×에반 블록×리첼 힐 참석!]
[수려]의 배급사에서 보내준 초대장이 있어서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영화객과 라이브 영상으로 보고 있던 시청자들이 그 열기에 와아, 감탄을 내뱉었다.
* * *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찬 상영관이 어두워지며 영화가 시작됐다.
달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
서준 리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은 익숙할 옷차림의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웅크리고 있는 남자의 등이 들썩였다. 그러고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새하얗게 변한 눈동자, 얼굴 피부는 반쯤 썩어 있는 남자의 얼굴에 관객석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
오.
익숙하지만 한층 발전된 느낌의 분장과 실감 나는 연기에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박중우 감독의 [수려]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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