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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84화 (384/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84화

“서울에서 봐요. 종호 삼촌. 지석이 형.”

“안녕히 가세요!”

영화 [한판]의 촬영이 끝나고 떠나는 날.

서준과 김한석은 버스에 짐을 실는 스태프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김종호와 이지석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안다호와 매니저들은 [한판]의 조감독이 찍은 사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준이도 한석이도 촬영 잘하고. 촬영 끝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이지석의 말에 김한석이 눈을 반짝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서준에 김종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서준이는 건강 잘 챙기고.”

“걱정 마세요. 삼촌.”

그 말에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후, 모든 짐을 실은 [한판] 촬영팀의 버스가 움직이고 두 배우를 태운 두 대의 차도 따라 움직였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준이 이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석아. 올라가자.”

“네!”

두 배우를 배웅한 서준과 김한석이 ‘권윤찬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스태프들은 한창 촬영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도 옷 갈아입으러 가자.”

“네.”

서준과 김한석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촬영 준비에 방해되지 않게 적당한 곳에 앉아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특히 오늘은 김한석이 감정적으로 격해져야 하는 장면이라 평소보다 집중한 것 같았다.

그사이 살수차가 들어올 수 없어 준비해 온 살수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방향을 하늘로 하니 마치 비처럼 보였다.

모니터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던 민희경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김한석은 떠올린 감정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우산을 펼쳤다. 서준도 빙그레 웃으며 우산을 펼쳤다.

“레디, 액션!”

달동네 입구.

두 개의 우산이 사이좋게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 세일이라는 조금 먼 마트까지 다녀온 정가람과 권윤찬이었다. 계란 한 판과 음식 재료가 든 비닐봉지를 든 두 소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큰 마트가 싸긴 싸더라. 종류도 많고.”

“여기가 더 싸서 안 산 것도 있어. 내일 가서 사려고.”

“그래?”

올.

정가람의 감탄에 권윤찬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오늘 저녁 뭐 먹을 거야?”

“할 수 있는 게 거기서 거기라…….”

권윤찬과 정가람은 이런저런 메뉴를 나열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길에 무거운 짐이 발걸음을 무겁게 했지만, 얼굴만큼은 밝았다.

“마당에 불 피워서 요리하는 것도 괜찮…….”

이야기를 하던 정가람이 말을 멈추자 물웅덩이를 피해 걷던 권윤찬이 고개를 들었다. 정가람은 앞을 바라보며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권윤찬도 고개를 돌려 정가람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우리 대문 안 닫고 나갔었나?”

녹이 슬어 잘 열리지도 않는 대문이, 강한 바람에도 열리지 않은 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 확실히 닫고 나갔을 텐……!”

의아한 듯 대답하던 권윤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는 경악한 얼굴로 들고 있던 우산과 비닐봉지를 내팽개치고 집 쪽으로 달려나갔다.

“……권윤찬?”

권윤찬의 행동에 당황한 정가람은 열린 대문과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번갈아 보다가 주섬주섬 챙겼다. 반쯤 깨진 계란들에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문이란 문은 전부 활짝 열려 있었다. 잘 정리해 놓은 마당도, 조리기구가 늘어난 부엌도. 냉장고도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정가람은 황망한 얼굴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도둑이 든 모양이었다.

권윤찬이 정가람의 방에서 나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힘줄이 선 목.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모습이 여간 화가 난 모양이 아닌 모양이었다. 주먹 쥔 두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둑 든 거야?”

그 말에 어딘가 먼 곳을 노려보는 듯하던 권윤찬의 눈동자가 정가람에게로 향했다. 활활 타오르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입을 앙다문 권윤찬이 마루에 주저앉아 머리를 푹 숙였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손바닥에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잔뜩 굽었다.

권윤찬은 자책했다. 정가람을 볼 면목이 없었다.

온 지 한 달도 안 돼서…… 그래서 더 늦게 올 거라고 생각했다. 정가람이 돌아간 뒤에 올 거라고 생각해…… 방심해 버렸다.

“미안……노트북을……”

어쩔 줄 모르는 권윤찬을 보던 정가람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단 경찰에 신고하자.”

“미안…….”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네가 첫날에 도둑 들어온다고 말했는데 조심 못 한 내 잘못이지 뭐. 그래도 지갑은 챙겨 나가서 다행이다.”

“미안…….”

비에 젖은 권윤찬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괜찮다니까. 어차피 노트북은 정리해 둬서 중요한 것도 없고. 찍어놓은 영상은 휴대폰에도 있으니까.”

정가람의 말에 권윤찬이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 뭔가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이거부터 정리하자. 무거워.”

비닐봉지를 드는 정가람의 말에도 권윤찬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야.”

“응?”

“……우리 아버지야…….”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원망과 분노, 미안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권윤찬의 말에 정가람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컷, 오케이!”

컷 소리에 김한석의 숨소리가 천천히 진정되었다. 격해졌던 감정인 만큼 진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한석아. 물티슈 줘?”

“……네. 한 장만 주세요.”

김한석과 달리 서준은 벌써 멀쩡한 얼굴이었다. 그런 서준을 김한석은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 *

“레디, 액션!”

……!

으음?

가늘게 눈을 뜬 권윤찬은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희미한 소리라 고양이라도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생각을 이어가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내일은 고등어를 구울까.’

며칠 새 정가람이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아진 것 같았다.

하긴 할 수 있는 메뉴가 비슷비슷하니 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집에 살았던 할아버지 말로는 생선구이는 석쇠로 굽는 게 최고라니, 마당에서 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잠시 귀를 기울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역시.

고양이였나 보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소리에 권윤찬이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내일이 외롭지 않다는 것이라는 걸 권윤찬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일은…….’

내일을 기대하는 권윤찬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 * *

으으……!

정가람은 입술을 악물었다.

자는 도중 갑자기 찾아온 고통은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소리를 참지 못할 만큼 아픔에 몸을 웅크렸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1㎜ 1㎜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쑤시고 불타오르고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불을 잡고 있는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몸은 이미 식은땀으로 한가득 젖었고 눈앞은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 진통제…….’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아득해지는 머리에 정가람은 정신없이 손을 뻗어 휘저었다. 온몸이 마치 진득한 늪에 잠긴 것처럼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정가람의 몸이 휘청거렸다.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물통과 컵이 멀게만 느껴졌다.

“흐…… 흐윽…… 윽…….”

1초가 마치 1년같이 느껴지는 고통의 시간.

알 수 없는 한 곳에서 시작된 아픔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아프다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절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숨이 턱 막히고 제대로 쉬는 법을 까먹었다.

그 몇 센티가 얼마나 힘든지, 쟁반에 닿지 못해 달달 떨리는 손가락들이 애처롭게 보였다.

정가람이 몸을 꿈틀거렸다.

생명줄을 잡는 양, 처절하게 뻗은 손가락이 몇 번 스치더니 마침내 쟁반에 닿았다.

정가람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쟁반에 걸치고 잡아당겼다. 다급한 손길에 물통이 쓰러졌다. 커다란 소리가 났다. 금방이라도 권윤찬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 정가람은 아픈 중에도 숨을 죽였다.

아직 들키기는 싫었다.

‘아프지 않은’ 정가람을 대하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차가운 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찰박찰박한 물 위를 두 손으로 휘저으며 정가람은 약통을 찾았다. 눈에는 흐릿하게 보이지만 잘 잡히지 않았다.

마침내 새하얀 약통이 잡혔다.

정가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통을 열려고 했지만 조급한 손길에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힘겹게 고통을 억누르며 뚜껑을 열고는 뒤집었다. 하나씩 꺼낼 정신도 없었다.

와르르 나오는 알약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정가람은 급하게 물통에 남은 물과 함께 새하얀 약을 삼켰다.

약이 몸 안으로 들어와 약 효과가 나올 때까지 정가람은 고통에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그저 막히는 숨을 트기 위해 의식하며 숨을 내쉬고 들이쉬었고 아픔으로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즐거운 기억으로 채웠다. 신경을 고통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약을 먹었으니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잔뜩 찌푸려 있던 정가람의 얼굴이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고통이 잦아들면서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정가람은 눈물로 범벅된 눈을 힘겹게 떴다.

흐릿한 시야 속.

엉망이 된 이부자리와 바닥에 엎질러진 물, 그 물 안에서 녹고 있는 새하얀 알약들, 엎어진 물통과 컵이 보였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자신의 흔적이 방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밖으로 쏟아진 알약들만 봐도 약통 안에는 몇 개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가람은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이 빠져 움직일 힘도 없었다. 고통이 사라지니 절망이 정가람을 가득 채웠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소리 없이 방울방울 눈물이 흘렀다.

‘내일은…….’

몇 개 남지 않은 약들이 꼭 제 살날 같아,

정가람은 내일이 무서워졌다.

* * *

촬영인지 감상인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방안의 어둠에 서준이 더욱 가냘프고 연약해 보였다.

“……컷, 오케이!”

그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던 민희경 감독이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에 촬영장을 가득 내리누르고 있던 무거운 적막이 깨졌다.

바깥에서 모니터로 보고 있던 스태프들과 김한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대사 한 마디 없는 장면이었지만 말로 전해지는 것보다 더 인상 깊었던 장면이었다.

‘역시 이서준.’

게다가 이 대단한 배우는 언제 아프고 울었냐는 듯 멀쩡한, 그것도 웃는 얼굴로 매니저에게서 얼음주머니를 받아 들고는 모니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 앉아요. 서준이 형.”

“고마워.”

김한석이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서준이 촬영본을 돌려보자, 넉살 좋은 촬영 감독은 어쩐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배우가 있는 힘껏 저렇게 멋진 연기를 보여줬는데 잘못 찍었으면 어쩌나 괜스레 걱정이 됐다.

“잘 나왔지?”

민희경 감독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청 잘 나왔는데요. 클로즈업도 바로 가는 건 어때요?”

“그래, 그러자.”

만족스러워하는 배우에 촬영 감독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지 않았다.

서준이 얼음으로 눈가를 식히고 촬영장이 다시 준비되는 동안 민희경 감독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감독님. 큰일이에요.”

“응? 뭐 잘못 찍혔어? 옥에 티?”

민희경 감독의 말에 싱글벙글 웃던 촬영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앞으로 누구랑 찍어도 만족 못 할 것 같아요.”

저런 연기를 하는 배우를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 앞으로 배우에 대한 기준이 부쩍 높아질 것 같았다.

진심이 가득 담긴 민희경 감독의 말에 촬영 감독은 허, 하고 숨을 뱉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우 감독도 배우 고르는 거 엄청 힘들어하더라고.”

“우정한 감독님도요?”

“서준이는 옛날에도 잘했거든.”

바로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머지않아 촬영장이 준비되었다.

클로즈업 샷도 보기 위해 민희경 감독이 앉아 있는 모니터 위로 할 일 없는 스태프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배우라는 명분 덕분에 김한석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눈을 빛냈다.

방 안.

서준이 이불 속에 누워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에 입을 쩍 벌린 악어 무늬가 보였다.

[(악)안개늪 파수꾼의 수확-상급]

안개늪을 일정 시간 동안 실체화합니다.

[주의] 안개늪에 빠지면 나올 수 없습니다.

전생의 안개늪은 말 그대로 삶과 ‘맞닿은’ 곳에 있었다.

안개늪에서 나올 수 있으면 살고 그대로 안개늪에 잠긴다면 죽었다. 문제는 살아서 나오는 일이 아주아주 드문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세계에서 안개늪은 저승과 같은 말이었다.

서준의 전생, 악어 형태의 수인인 파수꾼은 안개늪을 관리하고 완전히 삭아버린 죽음들은 새롭게 태어날 곳으로 옮기는, 누군가에게는 저승의 신처럼 보이는 존재였다.

하지만 저승을 다스리는 신이라기보다 그저 저승에서 살아가는 관리자 중 하나였다.

“레디,”

[[(악)안개늪 파수꾼의 수확-상급]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낮아집니다.]

[(악)안개늪 파수꾼의 수확(하급)이 발동됩니다.]

[(악)안개늪 파수꾼의 수확-하급]

진득한 죽음의 안개가 희미하게 흘러나옵니다.

얕은 늪에 잠긴 것처럼 움직임이 무거워집니다.

서준은 그저 죽음만이 아니라 죽음과 삶 가운데의 치열한 느낌을 원했다.

마치 살기 위해 안개늪에서 발버둥 치는 존재들처럼.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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