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83화
두 시간 전.
[가제 : 여행]의 촬영팀이 촬영하고 있는 달동네에 새로운 차들이 도착했다.
“여기 누가 먼저 왔나 본데?”
창밖을 내다본 이지석의 눈에 스태프들이 타고 있는 차량과 비슷한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지석의 말에 운전하고 있던 매니저 윤성오가 대답했다.
“다른 영화 촬영팀이랑 겹친다더라고요. 그래도 조절해서 저녁 촬영은 문제없대요.”
“그래? 무슨 영환데?”
“그건 모르는데…… 알아볼까요, 형?”
윤성오가 차를 한쪽에 주차하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 좀 이따 구경하러 가지 뭐. 종호 형. 다 왔어.”
이지석이 고개를 저으며 수면안대를 끼고 있는 김종호를 깨웠다.
“으음. 그래?”
잠시 뒤척거리던 김종호가 일어나 수면안대를 벗었다. 부스스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형도 이제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봐. 그래서 촬영하겠어?”
“너도 밤새 촬영하고 와봐라. 피곤한가 안 피곤한가.”
걱정하는 듯 놀리는 이지석의 말에 김종호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대답했다.
김종호와 밤새 있었던 김종호의 매니저는 졸음운전이라도 할까 싶어 나중에 부산으로 내려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다른 매니저를 부르기보다는 이지석의 차를 얻어탔는데 괜히 같이 온 것 같았다.
킬킬거리는 이지석과 투덜거리는 김종호가 차에서 내려 촬영장으로 향했다.
김종호, 이지석 주연의 영화 [한판]의 촬영이 준비되는 동안 김종호는 검은색 정장으로, 이지석은 후줄근한 야구점퍼로 갈아입고 분장을 시작했다.
“추격씬은 내일 저녁에 찍을 예정인 거 아시죠? 내일 얼마나 달려야 할지 모르니까 오늘은 짧게 찍고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한판]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매니저 윤성오는 잠시 촬영하고 있는 두 배우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괜찮다고는 말했지만 무슨 촬영인지 궁금해할 게 뻔했다.
거기다 다른 배우들이라면 몰라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배우라도 만났다가는 컨디션이 나빠질 수도 있으니 미리 알아보는 게 나았다.
‘그러고 보니 서준이도 부산이라던데. 서준이 있는 거 아니야?’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한 윤성오가 픽 웃고 말았다.
서준이 부산에서 영화 촬영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느 곳에서 찍는지는 윤성오도 듣지 못했다.
이 넓은 부산에서, 물론 촬영할 만한 곳은 정해져 있긴 하지만, 서준의 촬영 장소와 겹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윤성오였다.
“이쪽에서 촬영하나?”
조용한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었다.
윤성오가 걸음을 옮겼다. 촬영장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슬쩍 보고 오기만 하려고 했다. 배우가 누군지만 안다면 무슨 영화를 찍는지, 누가 함께 출연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안 팀장님?”
“어, 윤 실장님.”
배우 이서준의 매니저 안다호가 있었다.
윤성오가 놀라 안다호에게 다가갔다. 안다호도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촬영장에서 조금 물러났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지석이 형이 저쪽에서 촬영 중이거든요.”
윤성오의 말에 안다호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촬영팀 하나가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게 이지석의 영화였나 보다.
“혹시 김종호 배우도?”
“네. 같이 촬영 중입니다. 서준이는 지금 촬영 중인가요?”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웃었다.
“이렇게 만나기도 쉽지는 않을 텐데 말이죠.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윤성오도 웃고 말았다.
“지석이 형에게 알려주면 바로 오겠네요. 오늘 촬영은 짧게 끝날 예정이라 시간도 많아서요.”
“서준이 촬영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윤성오가 얼른 [한판]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김종호가 촬영하는 사이 이지석은 쉬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바로 다음에 찍을 내용을 보고 있던 이지석에게 윤성오가 다가왔다.
“어디 갔다 왔냐?”
“저쪽 촬영장에요.”
“그래? 뭐 찍던데?”
이지석이 대본에서 눈을 떼고 윤성오를 바라보았다. 윤성오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준이래요.”
“……서준이?”
“네. 부산에서 영화 찍는다더니 여기서 찍는가 봐요.”
그 말에 이지석의 눈이 커지다 히죽 웃었다. 얼굴이 활짝 편 느낌이었다. 배우의 컨디션을 망치는 상대가 있다면 평소보다 더 좋은 상태로 만드는 상대도 있었다.
“촬영 끝나면 가 보자.”
“네. 근데 종호 형한테는 말 안 해요?”
“어.”
너무 빠른 대답이라 윤성오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장난칠 마음이 가득한 이지석의 표정을 보고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흐흐흐.
이지석이 악당처럼 웃었다.
* * *
잘못 본 줄 알았다.
“어? 지석이 형?”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처럼 주머니에 한 손을 꽂고 다른 한 손을 휘휘 흔들고 있던 이지석이 보였다.
스태프들이 슬그머니 옆으로 피하는 걸 보니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늘어져 있던 김한석도 이지석의 등장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이지석에게 다가왔다.
“형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근처에서 촬영하고 있었거든.”
“아. 그래서 옷이 이랬구나.”
어쩐지.
평소랑 옷차림이 너무 다르다 했다.
“이야. 이 배우가 둘이나 있네.”
촬영 감독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역]을 함께 찍었던 촬영 감독이라 이지석과도 아는 사이였다. 이지석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그러게 말이야. 오늘 여기서 촬영한다는 게 이 배우 팀이야?”
“네. 종호 선배님이랑 촬영 중입니다.”
촬영 감독과 이지석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모니터 앞에 있던 민희경 감독은 갑작스러운 탑배우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한판] 촬영팀이 오늘내일 촬영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지석 배우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민희경 감독이 서준과 이지석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저런 기사로 친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친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서준 사단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까.’
촬영 감독과 인사를 나눈 이지석이 민희경 감독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서준이야 이런저런 사건이 있어서(반쯤 해탈한 느낌으로) 편했지만, 이지석은 조금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종호 삼촌도 오셨어요?”
근데 왜 안 보이지?
주변을 살피는 서준의 모습에 이지석이 킬킬 웃었다.
“지금 촬영 중이거든. 너 촬영 끝나면 가서 놀라게 해주자.”
“하하. 그럴까요?”
여전한 두 사람에 즐겁게 웃던 서준은 뒤에서 꼼지락대는 인기척을 느꼈다. 김한석이었다.
“형. 이쪽은 저랑 같이 이번에 촬영하는 김한석 배우예요.”
배우!
서준의 말에 김한석이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서준과 이지석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귀여운 후배 배우를 보며 미소를 지은 이지석이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파랑새’ 잘 봤어요.”
[파랑새]는 김한석이 작년에 출연했던 독립 영화의 제목이었다.
누구나 김한석의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한 걸음]의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지석은 그러지 않았다.
‘역시 우리 형.’
알아봐 주는 건 좋지만 그게 초등학생 때의 작품이면 전혀 발전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배우로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었다.
기뻐하는 김한석의 얼굴에 서준이 작게 웃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선배님!”
“그럼 그럴까? 파랑새 잘 봤어.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이지석이 김한석을 보며 웃다가 서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서준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서준아.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완전 반쪽이 다됐네.”
서준이 제 볼을 만졌다. 김한석도 고개를 갸웃했다. 살이 빠지긴 했지만, 반쪽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지석의 눈에는 엄청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서준을 만나지 못했다가 살 빠진 서준을 본 터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조금만 뺐어요. 반쪽까진 아니에요.”
“시한부라는 이야기 듣고 걱정했는데…… 으음. 안 팀장님이 있으니 괜찮겠지.”
이지석의 말에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 * *
“컷, 오케이!”
감독의 말에 김종호가 피곤한 듯 두 눈을 꾸욱 눌렀다.
‘내일 촬영 때까지는 푹 쉬어야 할 것 같군.’
박도훈의 부탁에 카메오로 출연했는데 이렇게 영향을 줄 줄은 몰랐다. 뻐근한 고개를 돌리는데 스태프들 사이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서준이가 보였다.
‘응? 서준이?’
그런데 평소의 서준보다 살이 빠져 보이는 데다가 혈색 좋던 평소와 달리 얼굴도 하얘서 꼭 환상처럼 보였다. 순간 아찔해졌다.
“진짜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자느라고 다른 영화 촬영팀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한 김종호가 마른세수를 했다.
“종호 삼촌!”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김종호의 귀에 꽂혔다. 평소와 다른 환상과 달리 평소처럼 씩씩한 목소리였다.
김종호가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서준을 보다가 뒤에서 킬킬 웃고 있는 이지석을 발견했다.
“……서준아? ……네가 왜 여기 있어?”
놀라는 김종호의 얼굴에 서준과 이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김종호의 촬영이 모두 끝나고 분장도 지우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배우들이 ‘권윤찬의 집’의 옆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잘못 본 줄 알았잖아.”
마치 비쩍 마른 손주를 걱정하는 할머니처럼 서준을 바라보던 김종호는 안다호가 사 온 귤을 까서 서준의 손에 넘겨주었다.
‘아까 지석이 형도 그 소리를 했는데.’
걱정하는 지인들에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서준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배역이 시한부라서 좀 뺐어요.”
“그 이야긴 들었는데……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네.”
“아, 이건 분장이요.”
서준의 말에 귤을 까먹고 있던 이지석이 빵 터졌다. 김종호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하긴 목소리만 들으면 평소의 서준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김한석은 조용히 대배우 김종호와 이지석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안 팀장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 이야기도 지석이 형이 했다. 방 한쪽에서 매니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다호 형이 쑥스러운 듯 크흠 헛기침을 했다.
“도대체 둘 다 제가 얼마나 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뭐.”
이지석과 김종호가 눈을 데굴 굴렸다. 서준은 그것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미라 같은 서준일 터였다.
‘도대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조금 흘겨보던 서준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저도 몸 상할 정도로는 안 빼요.”
‘앞으로 연기를 할 날이 얼마나 많은데…….’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했다.
“근데 서준이가 유난히 튼튼하잖아. 너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생각하기엔 아니라는 게 문제지.”
“그래. 그래.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으니까 더 걱정되는 거야.”
그건 그랬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그리고 두 배우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튼튼한 서준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원래는 지금보다 더 뺄 생각이기도 했다.
입술만 삐죽이는 서준에 이지석과 김종호가 씨익 웃었다. 이럴 땐 참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내일 쉰다며?”
“네. 지금까지 계속 촬영만 해서 하루 쉰대요.”
김종호와 이지석이 까주는 귤이 서준의 손에 가득 찼다. 귤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하는 서준에 이지석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촬영 보러 올래?”
그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도 다른 영화 촬영장이 궁금했다. 비슷한 장소에서 다르게 나올 영상도 보고 싶었다.
“저도 가도 돼요?”
“그럼.”
김한석의 물음에 김종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 * *
다음 날.
서준과 김한석이 [한판]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완전히 어두운 밤은 아니었고 해가 질 때쯤의 저녁이었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스태프들이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종호의 부하 역으로 나올 검은 정장을 입은 엑스트라들도 있었는데 모두 서준을 보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왜 이서준이 나와?
“종호 삼촌이 계속 먹이려고 해서 살찐 것 같아.”
“그대로인 것 같은데요?”
“그래?”
이지석과 김종호는 분장을 하러 갔고 서준과 김한석은 마련된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서준과 김한석을 [한판]의 감독이 안타까운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우리 대본 수정 못 하지?”
“못하죠. 조폭들이 등장하는 씬에 고등학생들을 넣으려고요?”
“지나가는 동네 주민 1이나 2로 넣으면 안 될까?”
“될 리가 있겠어요?”
냉정한 조감독의 말에 감독이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뱉었다.
“카메오로 이서준을 넣으면 좋을 텐데…….”
“카메오는 못 넣지만 홍보할 건 있어요.”
“응?”
“아까 사진 찍었거든요.”
조감독이 웃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가제 : 여행]의 두 캐릭터와 [한판]의 두 캐릭터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야구점퍼와 정장을 입고 있는 두 남자와 일상복을 입은 두 소년.
분장도 지우지 않은 상태라 마치 다른 그림체의 캐릭터들이 만난 것 같았다.
“나중에 매니저분들한테 말해서 쓸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믿음직한 조감독의 말에 감독의 얼굴이 활짝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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