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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81화 (381/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81화

[가제: 여행]의 부산 촬영장은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시끌벅적했다.

정가람과 권윤찬이 해가 뜰 시간쯤 바다에서 만나 걸어서 권윤찬의 집으로 오는 만큼, 바다와 권윤찬의 집이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간도 그때와 이어져야 했다.

그래서 촬영은 해는 떴지만 아침보다는 조용하고 차가운 새벽쯤 시작할 예정이었다.

“조명! 화면에 걸린다!”

“여기 선 정리!”

첫 촬영 때와 같은 옷을 입고 나온 서준과 김한석이 시끌벅적한 촬영현장을 바라보았다.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건 아니었지만, 발소리와 촬영 장비가 움직이는 소리, 대화 소리도 잘 들리는 적막한 새벽이라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게요.”

서준의 말에 대답하던 김한석이 크게 하품을 했다.

“잠 못 잤어?”

“조금 긴장돼서요.”

서준의 질문에 김한석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바닷가 장면은 형이랑 계속 연습했는데 오늘 앞부분 빼고는 간단하게 리딩해 본 게 다잖아요. 대본이 손에서 안 떨어지더라고요.”

“편하게 해. NG 내도 되니까.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NG 내도 바로 다시 할 수 있잖아.”

김하운과 함께 찍었던 병원 씬은 엑스트라가 많이 나와서 다시 찍을 때마다 NG를 내는 배우가 느끼는 부담이 많았지만 지금 배우가 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번에 오케이 나오면 좋잖아요. 스태프분들도 고생 덜하시고.”

김한석의 말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배우분들! 이쪽으로 와주세요!”

스태프의 부름에 서준과 김한석이 옆집으로 향했다.

“김한석 배우부터 들어갈게요.”

김한석이 먼저 ‘권윤찬의 집’ 화장실과는 달리 깨끗한 옆집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분장팀, 의상팀 스태프가 서 있었다.

의상팀 스태프가 샤워기를 들고 김한석의 주위를 맴돌았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에 김한석은 금세 흠뻑 젖었다.

김한석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스태프가 수건을 건넸다.

김한석이 물기를 닦아내는 사이 서준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신발까지 흠뻑 젖어 나왔다. 서준에게 수건을 건네준 스태프가 김한석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바닷가 장면과 비슷한 정도로 젖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서준의 모습까지 지난 바닷가 장면과 최대한 똑같이 만든 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레디, 액션!”

젖은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대충 닦은 정가람이 권윤찬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이리저리 골목을 지나니 가파른 오르막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 올라가야 해?”

“어.”

권윤찬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정가람도 뒤를 따랐다. 돌계단을 오르고 골목을 지나고 다시 오르니 집들이 보였다. 권윤찬이 그중 한 집 앞에 섰다.

벌써 도착했나 보다.

오르막길이 힘들긴 했어도 바닷가와 엄청 가까웠다.

‘진짜 금방 왔…….’

“에취!”

정가람의 재채기 소리에 막 녹이 슨 대문을 열려던 권윤찬이 뒤를 돌아보았다. 버스비만 주고 보낼 생각이었는데 저런 차림으로 돌아갔다가는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끼이익.

녹슨 대문이 열리고 권윤찬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새벽바람에 잘게 몸을 떨던 정가람도 안으로 발을 디뎠다.

낡은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과 관리되지 않은 것 같은 집. 낯선 풍경에 정가람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권윤찬은 빨랫줄에 걸려 있는 바짝 마른 수건 두 개를 낚아채고 하나는 자신이 들고 나머지 하나는 정가람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맨 끝의 문을 가리켰다.

“여기 화장실이니까 씻으려면 씻어.”

“아, 고마워.”

정가람은 사양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떨림이 눈에 보일 정도인 정가람의 모습에 권윤찬이 입을 열었다.

“뜨거운 물 안 나오니까 기다려 봐. 물 끓여서 줄게.”

“으응.”

드르륵.

부엌의 미닫이를 열고 들어간 권윤찬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가스를 켜고 익숙하게 바닷물에 축축해진 양말을 벗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짝 마른 수건을 손에 쥔 정가람이 멀뚱히 서 있었다.

“들어와. 밖에 있으면 춥잖아.”

“물에 젖었는데?”

정가람의 발밑으로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보였다. 버스비를 빌려달라고 하던 뻔뻔함은 어디 가고 사소한 걸 신경 쓰는 정가람의 모습에 권윤찬은 어이가 없었다.

“닦으면 돼.”

권윤찬의 말에 내심 반색한 정가람이 축축하게 젖은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으니 찬바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확실히 문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굉장했다.

정가람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양말을 벗었다. 축축한 양말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양말을 손에 쥔 정가람이 부엌을 둘러보았다.

한쪽에는 싱크대와 냉장고가 있었고 그 옆에는 밥상이 세워져 있었다. 부엌은 두 사람이 앉아 밥을 먹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문 좀 열어봐.”

“응!”

냄비의 물이 끓자 권윤찬이 냄비를 들고 말했다.

정가람이 얼른 부엌의 미닫이를 열었다. 냄비를 든 권윤찬이 화장실로 향하고 정가람이 그 뒤를 따라갔다.

물때와 곰팡이로 군데군데 더러운 화장실은 세면대와 샤워기 대신 큰 플라스틱 통과 바가지, 세숫대야가 놓여 있었다.

청소를 한 적이 있을까 싶은, 더러운 화장실에 정가람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지만, 플라스틱 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던 권윤찬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뜨거운 물이 반쯤 담긴 플라스틱 통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찬물 틀어서 온도 맞춰서 써.”

“응. 고마워.”

정가람이 씻는 동안 권윤찬은 정가람에게 줄 버스비를 가지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열고 그 바닥에서 돈이 든 봉투를 꺼내던 권윤찬은 아차 싶었다.

“……쟤 입을 옷이 없지.”

기껏 씻었는데 바닷물에 젖은 옷을 입으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게 뻔했다. 한숨을 내쉰 권윤찬이 제 옷 중 제법 깨끗한 옷을 골라 화장실 앞에 놓아두었다.

“문 앞에 옷 있어.”

“아, 고마워.”

문 건너에서 안도한 정가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쟤도 내심 걱정한 모양이었다.

부엌으로 돌아온 권윤찬은 다시 물을 끓였다. 냄비 위에 보글보글 물거품이 생겨났다.

덜컹.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정가람이 나왔다. 낡은 자신의 옷을 다른 사람이 입고 있는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잠시 후.

권윤찬까지 씻고 밖으로 나왔다.

부엌에서 휴대폰을 두드리며 숙소까지 갈 버스를 찾고 있던 정가람이 고개를 들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권윤찬이 방으로 가 정가람에게 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넸다.

“여기 버스비.”

“고마워. 바로 숙소 가서 돈 가지고 올게! 진짜 금방 올게!”

활짝 웃은 정가람이 휴대폰과 셀카봉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가려는 정가람의 모습에 권윤찬이 화장실 앞, 마루에 놓인 정가람의 옷을 가리켰다.

“옷은 안 가져가?”

“나중에 가져가려고. 좀 말려줘!”

팔을 휘휘 저은 정가람이 해맑은 얼굴로 대문을 나섰다.

정가람이 떠나고 수건을 목에 건 권윤찬은 자신의 옷과 정가람의 옷들을 빨랫줄에 널기 시작했다.

“뭐, 안 와도 되겠네.”

이천 원과 낡은 옷보다는 메이커 옷이 이득이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바지를 널고 있는데 끼이익, 소리가 들렸다. 권윤찬은 바지를 옆으로 치우고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열린 대문 사이로 누군가 얼굴을 드러냈다. 정가람이었다.

권윤찬의 의문이 담긴 시선에 정가람이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저기…… 버스정류장 어디로 가면 돼?”

권윤찬은 한숨을 내쉬며 대문으로 향했다.

* * *

숙소로 돌아온 정가람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권윤찬의 옷을 잘 개어 봉지 안에 넣고 휴대폰으로 부모님께 연락했다.

“그때 잃어버렸나 봐.”

-바로 정지시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응.”

-옷 다 젖었을 텐데…… 숙소에는 어떻게 왔어?

“누가 빌려줬어. 좀 있다 갚으러 가려고.”

-그래.

조금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몸은 괜찮고?

“응. 괜찮아.”

조심스러운 엄마의 물음에 정가람은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날 이후, 엄마 아빠와 자신의 사이에 큰 벽이 생긴 것 같아 정가람은 속이 답답해졌다. 걱정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면서도 그랬다.

-……가람아…… 이제…….

“엄마.”

-……그래.

“나 며칠만 더 있다가 갈게.”

정가람은 누구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 * *

점심시간.

‘권윤찬의 집’의 옆집에 마련된 간이 식당에 스태프들이 모였다. 밥차를 끌고 올 수가 없어 마련된 곳이었다.

스태프들은 마당에 놓인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거나 집 안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서준이 형. 그것만 먹어요?”

소불고기를 가득 담은 접시를 든 김한석이 서준의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며 물었다.

아삭아삭. 서준이 젓가락으로 양배추를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호가 준비해 준 다이어트 식단이었다.

“완전 풀밭이네요. 어제저녁도 적게 먹지 않았어요?”

“이제 살 빼야 해서.”

서준의 말에 김한석이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뭐 하나 허술하게 연기할 형이 아니지.’

외면이 확실하게 표현되는 시한부 연기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얼마나 뺄 거에요?”

“적당히?”

‘서준이 형은 적당히가 더 무서운데 말이야.’

전혀 예상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려던 김한석이 아차 싶어 엉거주춤 멈춰 섰다. 제 접시에 가득 담긴 맛 난 소불고기가 보였다.

“어, 그럼 저 다른 곳에서 먹을까요?”

다이어트하는 사람 앞에서 혼자 맛있는 걸 먹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서준의 상황이라면 정말 괴로울 것 같았다.

김한석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괜찮아. 먹어도 돼. 나 채소도 좋아하거든.”

고기가 더 좋긴 하지만 채소도 좋아했다.

‘이스케이프를 찍을 때의 영향인가.’

그전에도 잘 먹긴 했지만, 엘프의 능력을 사용한 후에는 채소의 맛도 좋아하게 되었다.

안다호도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 서준의 식단에 그렇게 고민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채소를 싫어했다면 서준도 안다호도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요?”

서준의 말에 김한석은 ‘어떻게 채소를 좋아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서준의 접시를 가득 채운 푸르른 채소들에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채소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여기 닭가슴살도 있어. 먹어볼래?”

“아뇨. 괜찮아요. 유일한 고기를 뺏어 먹을 순 없죠.”

단호한 김한석의 말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점심 식사가 끝나고 오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바뀐 해의 방향에 조명의 위치를 옮기고 카메라에 미리 생각해 두었던 앵글을 담았다. 소리를 녹음할 마이크가 우뚝 솟았다.

간이 테이블 위에 마련된 모니터에 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의상팀이 마지막으로 서준의 옷차림을 점검하고 화면에서 사라지자 민희경 감독이 외쳤다.

“레디, 액션!”

끼이익.

마치 초인종처럼 사람이 왔음을 알리는 녹슨 대문의 소리에 자신의 방에 있던 권윤찬이 방문을 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대문 앞에 정가람이 서 있었다.

“나 왔어! 빨리 온다고 왔는데 마을버스가 너무 늦게 오더라!”

권윤찬이 밖으로 나오자 정가람이 웃으며 권윤찬의 옷이 든 봉지와 천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여기. 옷이랑 버스비! 진짜 고마웠어!”

“그래.”

정가람에게서 버스비와 옷을 받은 권윤찬이 정가람의 옆에 세워진 캐리어를 보았다.

이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순간 권윤찬의 머릿속에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고민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던 정가람이 떠올랐다.

달싹거리던 권윤찬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정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여기서 지내도 돼?”

“……뭐?”

머릿속에 떠오른 말도 잊어버리게 만들 만큼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권윤찬의 의아한 표정에 정가람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부산에 있는 동안 여기서 지내고 싶다고. 아직 일출 제대로 못 봤거든. 여긴 바다도 가깝잖아.”

정가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권윤찬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혼자 지내기도 버거운데 한 사람 더 는다니.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안 돼.”

“숙박비 낼게.”

당장에라도 욕을 내뱉을 것 같았던 권윤찬이 정가람의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모습에 정가람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보였다. 마치 V처럼 보였다.

“하루에 이만 원.”

“…….”

“식비 별도.”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권윤찬의 모습에 정가람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안 되나?’

하긴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묵게 해달라는데 쉽게 허락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는구나.’

정가람이 데굴데굴 눈만 굴리며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권윤찬의 입이 열렸다.

“……얼마나 있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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