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77화
“아, 잠깐만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연기에 반사적으로 오케이를 외치긴 했지만, 민희경 감독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아차 싶어 다시 돌려보니 역시 ‘형’의 움직임이 둔했다.
“김진철 배우, 이쪽으로 와볼래요?”
두 배우의 멋진 연기와 감독의 오케이에 다음 촬영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이 민희경 감독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뒤에 연기가 임팩트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김진철의 연기는 조금 이상하긴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김진철에게로 쏠렸다.
그 시선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느릿느릿했던 움직임을 떠올린 김진철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희경 감독에게로 향했다. 그 움직임도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다.
그런 김진철의 모습에 다들 의아해하는 사이 김진철이 모니터 앞으로 향했다. 민희경 감독이 보여주는 화면 속에 느릿느릿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으음. 일부러 느리게 움직인 건가요?”
민희경 감독은 이 연기가 배우의 해석이라면 이유를 들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진철은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럼 조금 더 속도를 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김진철의 대답에 민희경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김진철 배우, 이쪽으로 와볼래요?”
민희경 감독의 오케이 사인에 안심하고 있던 김하운이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묘한 걸음걸이의 김진철이 민희경 감독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촬영할 것 같지?”
“응.”
김하운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가 났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다시 한번 촬영할 것 같았다.
서준은 김하운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풀샷은 다시 찍어야 하고 바스트 샷과 클로즈업 샷은 아직 남아 있으니 김하운이 울 일은 아직 많이 남았다.
“수분 보충해.”
“고마워.”
물을 마신 김하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자신이 원인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번 NG의 원인이 김진철인 게 조금 고소하기도 했다.
김하운이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오디션 지원서와 우정한 감독의 시놉시스, 그리고 오케이 사인. 마음이 편하니 실수한 원인도 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네 연기를 신경 안 쓰려고 노력하니까 NG가 안 난 것 같아. 생각해 보니까 바로 옆에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안타깝다고 생각해 버렸나 봐.”
김하운이 연기하는 ‘소년’은 정가람의 불행과 절망을 더욱 뚜렷하게 비교하게 하는 역할이었다.
오로지 기쁨.
보는 사람마저 ‘정말 다행이다!’ 하고 생각할 만한 기쁨. 그것만을 드러내야 했다.
“네 연기에 휩쓸려 잠시 그 사실을 잊었어. 그걸 무마하기 위해 억지로 연기를 이어가다 보니까 NG가 났나 봐.”
기쁨을 연기하다가 ‘정가람’의 표정을 보고 안타깝다고 생각해 버렸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정가람’의 눈빛에 조금 흠칫하기도 했다.
움츠러들려는 순간, 김하운은 자신이 연기 중인 것을 생각해 냈다. 그제야 다시 연기에 집중했지만 잘될 리가 없었다. 거기에 이서준 배우의 친구니, 황금세대이니. 이런저런 말이 떠올라 흔들려 버렸다.
“그다음부터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너한테 시선이 갔고. 네 표정, 아니, 정가람 표정 볼 때마다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기뻐했나 싶어서 미안해지더라.”
김하운이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네가 너무 연기를 잘해.”
그 말에 서준이 웃고 말았다.
“누구라도 큰 병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못 쓸걸.”
자기 일에 안도하느라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잖아.”
기쁨과 절망이 확연히 비교되는 이 장면이 정가람의 마음을 더욱 잘 나타낼 터였다.
서준의 말에 김하운이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건 김한석, 걔가 잘할 것 같지 않아?”
“그렇긴 하지. 완전 생활 연기.”
큰 병이라는 말에 심각하게 걱정했는데 검사 결과 아니라고 판정받은 소년.
딱 김한석 이야기가 아닌가.
김하운과 서준이 키득키득 웃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조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서준과 김하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호영, 최현희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려던 서준이 김하운의 얼굴의 살폈다. 다른 배우들과 오른쪽 진료실로 들어가는 김하운은 편안해 보였다. 원인을 알았으니 실수할 것 같지 않았다.
서준의 시선이 이번에는 김진철에게로 향했다. 김진철의 온몸을 칭칭 감아 움직임을 방해하는 루문토스가 보였다.
으음.
오늘 촬영은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해 보였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준의 생각처럼 그렇게 험난하진 않았다. 김진철의 대사가 촬영의 초반부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대기실 대화 후 나와야 하는 ‘형’ 김진철의 움직임이 나아지지 않아, 촬영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멈추었다. 김진철의 목소리와 표정 연기는 예상했던 그대로였지만 몸의 움직임이 처음 촬영했을 때와는 달리 느렸다.
“리허설 한번 해보죠.”
김하운에게 했던 것처럼 김진철을 돕기 위해 민희경 감독은 촬영을 잠시 멈추고 김진철만 리허설을 진행해봤지만, 속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본인이 더 당황하고 이해가 안 된다는 김진철의 표정만 보면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아 민희경 감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김진철 배우.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그, 그게…….”
김진철도 무거운 자신의 몸에 덜컥 걱정이 들던 참이었다.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무언가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촬영보다 병원에 가 보는 게 낫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이서준의 작품에 출연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깝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더 촬영해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다.
한숨을 내쉰 김진철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촬영장 밖으로 향했다. 김진철과 친분이 있는 배우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오늘 일진 사납네.”
“그러게요.”
촬영 감독의 말에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철이 떠나고 조감독이 민희경 감독에게 물었다.
“그럼 형 역을 새로 뽑을까요?”
“아뇨.”
고개를 저은 민희경 감독은 김하운의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를 불렀다.
조금 긴장한 얼굴의 중년 배우가 김진철을 대신하라는 민희경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기 때문에 대사도, 움직임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김하운의 ‘아버지’ 역할을 맡은 배우가 여러 번 리허설을 한 후에 촬영이 재개되었다.
“레디, 액션!”
다행히, 그 이후 촬영은 별다른 NG 없이 마무리되었다.
* * *
“이쪽도 다듬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조금 동그란 모양이 좋겠죠?”
허리까지 오는 나무가 둥그런 모양으로 잘렸다.
수원이 떠들썩해졌다.
갑자기 가로수며 도로며 인도며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특히 수원화성과 화성행궁 쪽은 급하게 시작한 보수공사로 시끌벅적했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나무들의 가지를 치고 바닥에 깔린 돌들을 살피고 좀 더 좋은 풍경을 만들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색이 바랜 단청은 전문가를 고용해 깔끔하게 덧칠했다.
당일치기 관광객도, 산책 나온 수원 시민들도 뜻밖의 난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데 화면 보정하면 되지 꼭 보수를 해야 될까요?”
며칠째 수원화성에 올라 주변을 점검하고 있는 한 공무원의 물음에 관광마케팅 팀장이 대답했다.
“몇 년은 이 상태로 놔둬야 하니까 지금 완벽하게 만들어놔야지.”
“네?”
“생각해 봐. 영화에 어떤 관광지가 나왔어. 근데 영화로는 괜찮았는데 실제로 가 보니까 다 보정발이라는 후기가 수두룩해. 너라면 가겠어?”
“……안 가죠.”
“그것 봐. 관광객들이 원하는 건 영화와 똑같은 관광지야. 영화 개봉하고 관광객들이 온다고 뒤늦게 보수했는데 그게 또 영화에 나왔던 거 하고는 달라. 그러면 가겠어?”
깨끗하지만 영화에 나왔던 것과 다른 관광지라.
그러면 갈 필요가 없지 않나?
“……안 가겠죠?”
“그래! 안 가지!”
어디 보수할 곳이 없나 매의 눈으로 살피던 팀장이 말했다.
“영화 촬영 전에 보수하고 보수한 모습이 그대로 영화에 담겨야 홍보가 되지. 그리고 몇 년 동안은 그 모습 그대로, 1센치도 다르지 않게 유지해야 관광객들이 계속 올 거라더라.”
“……라더라?”
크흠.
헛기침하는 팀장의 모습에 다들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했다. 누군가한테 들은 이야기가 분명했다. 아마 이서준의 팬이라던 팀장의 딸이 아닐까 싶었다.
“촬영 온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니. 사인받아야 할 것 같아.”
나중을 대비해 뇌물, 아니, 선물이 필요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하여튼, 촬영 전에 싹 바꿔야 한다고.”
딸의 말을 납득한 팀장이 위로, 위로 전달했고 단번에 홍보마케팅팀뿐만 아니라 관광과가 있는 문화체육교육국, 경제정책국, 안전교통국, 아니, 수원이 떠들썩해졌다.
“관광객들이 오면 하루라도 더 잡아야 하니까 이런저런 행사도 많이 만들어야 하고 돈 많이 쓰면 일자리도 늘 거고, 여기까지 오려면 교통시설도 잘 되어야 하니까 다들 난리지.”
“하긴 이서…….”
앞을 스쳐 지나가는 한 수원 시민의 모습에 모두 입을 다물고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앗, 저기 잔디가 파였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딴청을 부리던 공무원들이 입을 열었다.
“……그 배우 영화면 외국에서도 관광객들이 올 테니까요.”
“거기에 버스나 기차로도 올 수 있는 국내랑 달리 해외여행은 바로 오지는 못할 테니까 내후년까지 넉넉하게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영화에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지만요.”
“통편집만 안 됐으면……!”
어쩌면 경복궁과 강릉을 이은 ‘서준 리 투어’의 한 장소가 될지도 몰랐다.
“공방 거리에 있는 제 친구는 무슨 김칫국 마시냐, 영화 촬영 이래 봤자 관광객이 얼마나 오겠냐던데요. 마린사 영화 정도면 몰라도, 라고요.”
그 말에 다들 키득키득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럴 만도 했다. 마린사 정도는 아니지만, 거기에 나오는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였다.
“일단 촬영할 때까지는 비밀로 하고 그 이후엔 제작사랑 의논해서 홍보 시작해도 될 거야.”
“그러면 여기저기 관련된 상품들이 생길 것 같네요.”
화성행궁 옆 공방거리가 이서준과 관련된 물건으로 가득 차지 않을까 싶었다. 이서준이 들른 숙소나 음식점도 떠들썩해질 터였다.
답사 나온 스태프에게 맛집을 추천해 준 팀장이 입맛을 다셨다.
‘거기 진짜 맛있는데 이제 사람 많아지겠지.’
자신만 알고 싶은 맛집이었지만 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 * *
수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버스 안’ 촬영을 끝낸 서준은 촬영 감독의 옆에 앉았다.
“촬영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네.”
촬영 감독의 되묻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제 : 여행]에서는 두 가지 촬영 장면이 나갈 예정이었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영화 촬영처럼 촬영 감독이 찍는 장면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너튜브 방송 장면처럼 서준이 직접 들고 찍는 듯한 장면이었다.
물론 그 ‘너튜브 방송 장면’도 너무 흔들리지 않게 휴대폰 카메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촬영 카메라로, 서준이 직접 찍는 듯이 촬영 감독이 찍고 있었다.
조금 전 촬영도 그랬다.
셀카봉이 없었으면 서준의 얼굴에 카메라 들이댈 뻔했다.
“어차피 찍는 거 제가 직접 찍는 것도 현장감이 있어서 좋지 않을까요? 아니면 홍보용으로 써도 괜찮을 것 같아요.”
!
서준의 목소리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민희경 감독과 기획팀장이 번쩍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서준이는 연기하느라 카메라에는 신경 못 쓸 테니 흔들려서 못 쓰는 장면도 있겠지만…… 덜 흔들리는 장면은 사이사이 편집해서 넣을 수도 있어.’
‘홍보용은 흔들리는 그대로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없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배우와 감독과 기획팀장에 촬영 감독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시간도 많으니까.”
서준과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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