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76화
좋아하는 건 연기, 영화, 드라마, 연극, 배우 등.
싫어하는 건 연기에 방해가 되는 것.
“싫어하는 거에 배우가 들어가는 건 싫은데 말이야.”
추가. 다른 배우 괴롭히는 배우.
새롭게 추가된 항목에 가볍게 한숨을 쉰 서준이 악의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밝은색의 책들이 모여 있는 선의 도서관과는 달리 무채색에 가깝고 어두침침한 색들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단순한 표지가 있는가 하면 날카로운 발톱에 긁힌 듯한 표지도 있었다.
새로운 책을 읽을 시간은 없으니 서준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중에서 능력을 고르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읽은 책이네.”
선의 도서관에 가는 만큼 악의 도서관에도 들렀다. 선의 도서관에서 그러는 것처럼 악의 도서관에서도 책을 읽고 능력을 확인하고 활용법을 생각했다. 덕분에 읽은 삶의 책도, 삶의 책에서 나온 능력도 많았다.
서준은 불길하게 빛나는 능력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배우가 배우를 괴롭히다니…….’
물론, 배우라는 게 다양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인 만큼 모두 착하고 친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건 꽤나 착잡한 일이었다.
배우라는 직업을, 연기를 사랑하는 서준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오히려 지금까지 안 만난 게 이상한 거긴 하지.”
배우만이 아니라, 감독, 작가, 제작사, 매니저, 소속사. 아니, 연예계까지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학교, 회사, 일상생활 등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나올 수 있는 문제였다.
“앞으로는 안 괴롭혔으면 좋겠는데…….”
서준이 모든 문제를 고칠 수는 없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일은 막고 싶었다. 김하운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말이다.
그때, 서준의 눈에 한 삶의 책이 들어왔다.
자신을 사용하라며 홀리듯 빛나는 삶의 책은 불길한 분위기만큼 암울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죽이는 건 좀.”
책을 본 서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책의 빛이 조금 시든 것 같기도 했다. 어깨를 으쓱인 서준은 다른 삶의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준은 선의 도서관이 있는 만큼 생명을 소중히 했고 악의 도서관이 있는 만큼 죽음을 가까이 했다. 그래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며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을 할 정도로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아역배우를 괴롭게 만든 그 배우가 자신이 벌인 만큼의 죗값을 치렀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의 오지랖이었다. 거기에 나쁜 짓은 생각도 못 하게 예방하는 능력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음. 이걸로 할까?”
악의 도서관 조금 안쪽.
한 책장 앞에 선 서준이 반들거리는 표지의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두운 푸른빛의 책표지가 빛에 반짝였다.
* * *
서준이 눈을 떴다.
능력이 감겨 있는 오른쪽 손목 부분이 서늘해져 왼손으로 손목을 매만졌다.
움직이는 인기척에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던 김하운이 옆을 바라보았다.
“어? 일어났어?”
“응. 연습은 잘돼가?”
“으음. 한번 봐줄 수 있어?”
“그래.”
김하운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하운이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그사이 민희경 감독에게서 받은 듯한 NG 장면들이었다. 처음엔 잘하다가 움찔거리는 김하운의 모습이 보였다.
“최대한 날 신경 안 쓰는 건 어때?”
“……같이 촬영하면서 널 신경 쓰지 말라고?”
김하운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도 옆에서 그런 연기력과 아우라를 뿜뿜 내뿜으면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너랑 나랑 감정선이 완전히 다르잖아. 아마 실수한 것도 내 감정에 물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여기 봐. 시선이 내 쪽으로 오면서 움찔하잖아.”
김하운은 서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재생되는 자신의 모습에 집중했다.
연기를 이어가던 김하운의 시선이 짧게 서준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다음부터 김하운의 연기가 흔들렸다.
“……그런 것 같네.”
“쳐다보지도 말고 아예 신경을 쓰지 마. 원래 그런 내용이잖아.”
마른세수를 한 김하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네 감정 연기에 안 휘둘리겠냐마는…… 해볼게.”
“그리고 연기하기 전에 한석이 모습 떠올려봐.”
“김한석?”
“응. 일주일 쉬고 학교 온 날. 그거 몇 배 정도로 감정을 올린다고 생각하면 어떤 감정인지 이해하기 편할 거야.”
서준의 말에 칠렐레팔렐레 웃으며 학교를 돌아다니던 1학년의 모습이 떠올린 김하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서준은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김하운을 놔두고 먼저 촬영장으로 향했다.
촬영장에는 커피차에서 받아온 음료와 쿠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배우들이 있었다. 그중 시끌벅적한 곳, 중앙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네.’
서준은 엑스트라 배우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김진철을 한 번, 자신의 손목을 한 번 바라보았다. 검푸른 빛깔의 금속 팔찌처럼 손목을 두르고 있는 문양이 보였다.
[(악)루문토스의 사냥-중상급]
사냥감에게 쌓인 어두운 감정을 섭취하여 자신의 몸을 부풀립니다.
사냥감보다 성장하면 해당 사냥감을 잡아먹습니다.
[주의] 사냥감의 감정을 일부 조종할 수 있습니다.
루문토스는 먹잇감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쌓여 있는 어두운 감정을 먹으며 몸을 부풀린다. 그러다가 최대치로 성장하게 되면 먹잇감을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는 뱀 형태의 마물이었다.
여기서 ‘어두운 감정’은 루문토스가 기생하고 있는 사람이 떠올리는, 아직 실행되지 못한 범죄 계획부터 실행한 범죄 계획의 피해자들에게서 받은 원한까지 해당된다.
물론 실행에 옮기지 않은 계획 정도는 그렇게 큰 감정을 만들지 못한다.
쉽게 보기 힘든 마물이라 루문토스가 있던 세계에서도 어린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하면 루문토스 뱀에게 꿀꺽 먹혀 버린다.’ 하고 교훈적인 옛날이야기 정도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 탓에 정령으로 여겨지긴 했지만.’
그냥 어두침침한 감정을 보면 입맛을 다시며 잘, 얼른 익어가길 바라는 마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제법 큰 루문토스는 자신의 마기를 이용해 사람을 충동적이게 만들어 죄를 쌓이게 만든 후 꿀꺽 잡아먹기도 했다.
서준의 마기가 손목을 감싸고 있던 루문토스의 문양으로 향했다.
팔찌처럼 손목을 두르고 있던 루문토스의 검푸른 비늘을 반짝 빛나더니 서준에게만 보이는 실체를 가졌다.
서준의 손바닥 안에 작은 실뱀 같은 루문토스가 올라왔다. 다행히 [(악)루문토스의 사냥-중상급]은 적정 거리 안에만 있으면 발동 가능한 능력이었다.
서준이 바닥에 쭈그려 루문토스를 놓아주자 루문토스는 촬영장을 기어가 김진철의 발목을 감쌌다. 꼬리를 문 루문토스의 모습이 이내 사라졌다.
서준은 잘 매어져 있는 신발 끈을 매만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루문토스의 사냥-중상급이 발동됩니다.]
[[(악)루문토스의 사냥-중상급]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낮아집니다.]
[(악)루문토스의 사냥(하급)이 발동됩니다.]
[(악)루문토스의 사냥-하급]
사냥감에게 쌓인 어두운 감정을 섭취하여 자신의 몸을 부풀립니다.
사냥감은 무게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악)루문토스의 사냥-하급]은 [(악)루문토스의 사냥-중상급]과는 달리 사냥감을 먹지 않는다는 점과 루문토스의 무게에 익숙해질 수가 없어 언제나 무거운 무게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쪽 다리 정도는 차지하려나?’
김하운이나 다른 피해자들의 원한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지만 서준은 루문토스가 조금 자라서 김진철의 한쪽 다리를 칭칭 감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쪽 다리에 익숙해지지 않은 무게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생활하는 것이니만큼 연기도, 일상생활도 불편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서준의 시선이 김진철에게로 향했다.
서준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김진철의 행동이 한두 번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김진철의 죄와 피해를 본 사람들의 원한을 발견한 루문토스가 눈을 빛냈다.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하나하나 꿀꺽꿀꺽 삼켰다.
루문토스가 순식간에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실 같았던 두께가 손가락만 해졌고, 손가락만 하던 두께가 손목만 해졌다. 발목을 감싸고 있던 작은 실뱀이 길이와 두께를 늘려가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금세 성장한 루문토스는 똬리를 틀 듯 김진철을 빙글빙글 둘러쌌다.
‘……으음.’
김진철을 거의 뒤덮고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로문토스를 보던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생각보다 죄가 많은 사람이었나 보다.
‘원래 능력이었으면 벌써 먹혔겠네.’
하급으로 등급이 낮아져서 김진철을 잡아먹진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실체가 없으니 깔려 죽지도 않겠지.’
적절한 능력 선택이었다며 만족한 서준은 이내 김진철에게서 신경을 끄고 촬영을 준비했다.
* * *
김진철은 갑자기 답답해진 공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깨도 무거워지고 머리도 뭐가 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팔과 다리는 움직이긴 했지만, 모래주머니를 여러 개 차고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뭐지?’
어쩐지 뒷목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김진철은 소름이 돋았다.
잠을 잘못 잤나, 병원에라도 가 봐야 하나 고민하는 김진철의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연습을 끝내고 돌아온 김하운이었다. 김진철은 혈색이 도는 김하운의 얼굴에 쯧, 혀를 찼다.
‘글렀군.’
김하운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지금 김하운을 대신할 새로운 배우를 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김하운이 빠진다면 대본을 숙지하고 있고 가장 가까이에서 같은 장면을 연기한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몇 번 배역을 빼앗아본 적이 있는 김진철이 눈알을 데굴 굴렸다.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그렇게 나이가 중요한 역할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서준을 위주로 찍을 텐데 엑스트라의 나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서준과 민희경 감독이 알았다면 인상을 찌푸렸을 만한 생각을 하며 김진철이 고민했다.
‘발을 밟을까?’
대사를 칠 때나 표정 연기를 이어나갈 때 흐름을 끊기 좋은 방법이었다. 상체를 찍을 때는 하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실수했다고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번 티 나지 않게 방해하면 다시 주눅이 들 터였다.
김진철이 촬영 장면을 떠올리며 적절한 때를 찾고 있을 때,
‘윽?!’
루문토스가 그런 김진철의 계획을 날름 삼키고 몸을 키웠다. 갑자기 더 무거워진 무게에 놀란 김진철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 * *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왠지 엉거주춤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김진철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던 김하운은 조감독의 외침에 촬영에 집중했다.
대본의 내용을 떠올리고 칠렐레팔렐레 웃으며 학교를 돌아다니던 김한석을 떠올렸다.
엑스트라들도 모두 제 자리로 향했다.
진료실 안쪽.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서준은 호흡을 골랐다.
매번의 촬영을 처음처럼, 신중하게, 온 힘을 다해. 서준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 서준의 뒤에는 부모 역의 김호영과 최현희가 서 있었다.
“레디,”
민희경 감독의 목소리에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서준의 감정이 바짝 당겨졌다. 배우 이서준에서 고등학생 정가람으로 바뀌는 과정은 몇 번을 봐도 신기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던 김호영과 최현희도 촬영에 집중했다.
“액션!”
카메라에 아직 모를 병에 대한 원인과 치료,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으로 시끌벅적한 대기실이 보였다.
큰 병이면 어쩌나, 생각보다 큰 병에 걸릴 확률은 높지 않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옅은 불안감이 보였다.
중앙에 대기실을 두고 양쪽으로 나뉜 진료실.
먼저 왼쪽 복도의 진료실에서 문 열리는 소리도 조심스러운 듯한 가족이 나왔다.
멍한 표정의 소년과 부부.
그리고 곧바로 오른쪽 복도의 진료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가족이 나왔다.
이쪽도 소년과 부부였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오른쪽 복도의 가족에게로 달려갔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민희경 감독이 눈을 깜빡였다.
‘김진철 배우 움직임이…… 느린데?’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에 당장이라도 컷을 외치고 싶었지만 벌써 멈추기엔 김하운 쪽의 느낌이 좋았다.
“어떻게 됐어?”
형을 본 소년이 울음을 터뜨렸다.
넋이 나간 듯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던 정가람이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쟤도…….’
쟤도 나처럼.
동질감에 울컥한 정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래. 나 아니래……!”
시끄러운 가운데 그렇게 크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가 정가람의 귀에 꽂혔다.
“나 아니래……! 다른 병이래! 이건 약만 먹으면 낫는데!”
“그것 봐! 아니라고 했잖아!”
“아이고. 하느님. 부처님……!”
“흐어어엉……!”
앞으로의 삶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엉엉 우는 소년의 얼굴이 정가람의 눈에 담겼다.
소년과 가족은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세상에 있는 모든 신께 감사를 드리며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함께 기뻐하는 소년의 가족들이 정가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왜지. 왤까.
시끌벅적하던 대기실의 소음은 갑자기 귀가 먹먹해진 듯 들리지 않았고 시야에는 오직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왜 나지?
왜 나야?
쟤는 괜찮은데…….
왜 나만…… 왜 나만……?
정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숨이 천천히 느려졌다가 가빠져 왔다. 입술과 턱이 덜덜 떨리고 꾸욱 주먹 쥔 양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다.
그때 등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울음소리인데도 정가람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나. 진짜 죽는구나.’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정가람의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왼쪽에는 시한부를 선고받은 소년이, 오른쪽에는 삶을 약속받은 소년이 서 있었다.
이서준의 절망과 김하운의 행복은 마치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인 양, 결코 섞일 수 없는 빛과 어둠처럼 촬영장에 내려앉았다.
“……오케이!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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