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75화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부터 듣지는 못했지만, 상황은 파악했다. 두 손에 음료를 든 서준이 오른쪽 운동화를 반쯤 벗었다.
이곳은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저 배우가 지나던 길에 김하운을 발견한 게 아니라는 거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온 거네.’
서준은 곧바로 남자와 김하운이 있는 곳으로 가 뭐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서준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 세계의 어두운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 한국 할 것 없이 연예계의 뒷소문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작품도 많으니까 말이다.
‘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몰라.’
자신은 괜찮았다. 하지만 김하운은?
서준은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김하운이 저런 사람에게 방해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서준은 발끝에 달랑달랑 매달린 운동화를 적당히 먼 곳을 노리고 찼다. 서준의 발에서 벗어난 운동화가 벽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큰 소리가 들리자, 계속 이어가려던 김진철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김하운을 보던 김진철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힘들면 말해. 감독님께 말해줄게.”
“…….”
짐짓 상냥한 투로 말하는 김진철의 모습에 서준은 순간 ‘왼쪽 운동화는 저놈의 뒤통수에 날려야 하나’, 생각했다. 생의 도서관에 기억 조작 능력이 몇 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런 짓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보통 이런 상황에서 인기척을 느낀다면 놀라 도망칠 텐데 여유롭게 연기하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연기력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역 배우에게 조언하는 척하던 김진철이 자리를 뜨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하운은 양팔의 옷소매로 흐를 것 같은 눈물을 닦아냈다.
“여기서 뭐 해?”
새롭게 나타난 그림자에 눈시울이 붉어진 김하운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두 손에 음료수를 들고 한쪽 신발만 신고 있는 서준이 서 있었다.
* * *
“이 날씨에도 차가운 음료수를 주더라. 주스 줄까?”
“……응.”
속이 답답할 땐 차가운 걸 먹어야지.
자신의 오렌지 주스를 김하운에게 건넨 서준이 따뜻한 유자차를 마셨다. 유자차도 좋아했다. 유자차를 마시는 서준은 오른쪽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김하운은 자신에게 음료 두 잔을 건네고 한 발로 폴짝폴짝 뛰어가 운동화를 가져오는 서준을 보고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서준과 김하운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음료를 마셨다. 김진철 같은 사람이 또 올까 봐 사람들이 꽤 들락날락하는 곳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잘하려고 하니까 몸이 굳더라.”
김하운이 슬픈 얼굴로 제 마음을 토해냈다.
서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할수록 마음대로 안 돼서 같이 촬영하는 배우들에게 미안하고 너한테도 미안하고.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다른 촬영은 괜찮았는데…….”
서준이 김하운을 바라보았다.
패닉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
서준의 친구라는 게 부담이 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한 번 어긋나면 끝까지 어긋나는 셔츠의 단추처럼 김하운도 처음을 잘못 끼웠을지도 몰랐다.
‘다 풀고 새롭게 끼우는 수밖에 없지.’
그러려면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당사자가 힘을 내야 했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얼굴이 평소대로만 해도 괜찮다고 말해도 전혀 들릴 것 같지 않았다.
아마 친구라서 그렇게 말해주는 거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서준 말고 아주 객관적인 사람들의 말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서준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스태프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있었네요. 김하운 배우.”
“네?”
“민 감독님이 찾으세요.”
‘감독님 같은.’
김하운이 스태프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천천히 창백해지는 김하운의 얼굴에 서준도 함께 일어났다.
“같이 갈까?”
“……그래도 될까?”
“밖에서 기다려도 되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서준에 김하운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요.”
민희경 감독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서준과 김하운을 반겼다.
생각보다 밝은 민희경 감독의 얼굴에 김하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사무실 안에 있던 제작사 기획팀장과 캐스팅 디렉터의 얼굴에 몸이 굳어버렸다. 순간 김진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진짜 바꾸려고?’
김하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사이 서준은 민희경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감독님. 저도 같이 들어도 될까요?”
“김하운 배우가 괜찮다면요.”
“하운아. 괜찮으시대. 너도 괜찮지? ……하운아? 김하운?”
서준이 김하운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눈도 깜짝 안 하는 모습이 아주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서준이 얼이 빠진 김하운을 잡아 소파에 앉혔다.
“뭐 좀 마실래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민희경 감독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김하운이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물을 마셔도 체할 것 같았다. 기가 죽은 듯한 김하운의 모습에 민희경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어…… 네?”
“이서준 배우 같은 엄청난 배우를 섭외한 것도, 같이 출연하는 배우 중에 그런 배우의 친구가 있는 것도 처음이라…… 이런 분위기가 될 줄은 몰랐어요.”
김하운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김한석은 처음부터 서준과 함께 와서 웃고 떠들며 잘 연기하길래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변명이야.’
민희경 감독이 씁쓸하게 웃었다.
기대하고 있었던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라 조금 들떠 있어 촬영장 내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NG가 나서야 엑스트라들에게서, 스태프들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촬영장 내 분위기를 다잡아야 하는 감독의 실책이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제대로 연기를 못한 건데요……!”
당황하는 김하운에게 민희경 감독이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김하운의 옆에 앉은 서준이 눈을 데굴 굴렸다. 슬쩍 보니 오디션 지원서 같았다.
“오디션 때 김하운 배우가 보여줬던 연기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연기가 부족한 게 아니라 좀 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해서 가지고 왔어요.”
의아한 표정의 김하운이 오디션 지원서를 들었다.
[김하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오디션 지원서에 자신이 적지 않았던 것들이 붉은 펜으로 적혀 있었다.
-발성 좋음.
-권윤찬?
-표정 연기가 인상 깊은데…….
-분위기 표현 좋음.
“어…… 이건?”
김하운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맞냐는 듯 확인하는 듯한 표정에 민희경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오디션 심사 때 기록한 거예요. 여기 보면 알겠지만 주조연으로 나오는 권윤찬 역을 고려했을 정도로 김하운 배우의 연기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오.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 NG를 여러 번 내는 상황이라면 연기에 대해 이런저런 지적을 할 텐데 민희경 감독은 연기에 대한 지적이나 조언보다는 김하운의 자신감을 북돋워 줄 생각인 것 같았다.
‘연기는 충분하니까 말이지.’
오디션 연기가 인상 깊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김하운도 그 말을 이해했다.
자신의 연기를 믿어주는 민희경 감독의 모습에 조금 가라앉았던 김하운의 눈 주위가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얼굴도 천천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시 지원서로 고개를 내린 김하운이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붉은 펜으로 적힌 평가들에 가슴이 덴 것처럼 뜨거워져 왔다.
그사이, 서준은 민희경 감독이 캐스팅 디렉터에게 시선을 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촬영 현장에 이미 일이 끝났을 캐스팅 디렉터가 왜 왔는지 모르겠다.
의아해하는 서준의 눈빛에 캐스팅 디렉터가 웃으며 명함과 시놉시스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김하운의 눈이 시놉시스를 한 번, 캐스팅 디렉터를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구나 캐스팅하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로 향했다.
‘서준이를 캐스팅하러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김하운과는 달리 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코코아엔터로 보내면 될 텐데?’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이내 웃으며 김하운의 앞에 놓인 오디션 지원서 때문에 어중간하게 놓인 시놉시스와 명함을 김하운 쪽으로 밀어주었다.
김하운은 멍하니 자신의 앞으로 온 시놉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캐스팅 디렉터를 바라보았다. 캐스팅 디렉터가 웃으며 말했다.
“오디션 볼 때부터 마음에 들었어요. 팀장님이 도통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않아서 촬영장까지 찾아왔습니다. 촬영장도 안 알려주시려고 했다니까요.”
캐스팅 디렉터의 투덜거림에 기획팀장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오늘 촬영이 끝나면 김 배우에게 전화번호 가르쳐 줘도 되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조연을 제안받으면 저희 영화는 조금 덜 신경 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걱정이 좀 많습니다.”
“어…….”
“조연! 조연이요?”
고개를 끄덕이는 캐스팅 디렉터에 김하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준이 웃으며 김하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조연이래!
“네. 오디션 끝나고 김하운 배우가 딱 생각나는 대본이 들어왔거든요. 이건 그 시놉시스니까 읽어보고 연락해 주세요. 다른 후보들도 있는데…….”
캐스팅 디렉터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장담하죠. 우정한 감독님도 김하운 배우가 마음에 쏙 들 겁니다.”
“……!”
익숙한 이름에 서준과 김하운의 눈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우정한 감독님 차기작 하세요?”
서준과 함께 [역]을 촬영하고 한동안 활동을 하지 않은 우정한 감독이었다.
“네. 지금 캐스팅 중입니다.”
우와.
서준과 김하운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한순간 쏠려 버린 관심에 민희경 감독과 기획팀장이 작게 웃었다.
“이래서 오늘 촬영이 끝나면 알려드리려고 했습니다.”
기획팀장의 말에 김하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미리 알았다면 집중력이 조금 흩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오디션 지원서와 시놉시스를 내려다보는 김하운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조연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도 기뻤지만, 자신의 연기가 이렇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김하운 배우.”
“……네?”
김하운이 고개를 들었다. 민희경 감독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쉐도우맨1의 윌리엄. 알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이름의 등장에 우정한 감독의 시놉시스를 마지막 남은 해바라기 씨를 바라보는 먹이 주머니가 가득 찬 햄스터처럼 바라보던 서준이 고개를 들었다. 김하운도 눈을 깜빡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단 한 번.
엑스트라였지만 엑스트라가 아니었던 그 장면.
짧게 나오고서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었던 그 장면을 김하운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는 이 장면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만들고 싶어요. 저희 영화가 개봉하면 꼭 한 번은 언급되는 장면으로요.”
민희경 감독의 말에 얼떨떨하던 김하운의 얼굴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는 이서준 배우가 되겠지만 그걸 받쳐줄 연기가 필요해요. 그래서 저는 권윤찬 역 다음으로 이 역을 신중하게 뽑았습니다.”
그게 바로 김하운이었다.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김하운의 모습에 민희경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자신감을 가져요. 김하운 배우의 연기는 정말 멋지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김하운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고작 엑스트라 배우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눈에 서린 진심이 보여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낸 김하운이 씩씩하게 말했다.
기운을 차린 김하운의 모습에 서준과 어른들이 미소를 지었다.
“저 조금만 연습해도 될까요?”
“그럼요. 걱정말고 여기서 편하게 연습해요.”
민희경 감독이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나자 기획팀장, 캐스팅 디렉터도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김하운 배우! 꼭 연락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나가던 캐스팅 디렉터의 말에 서준과 김하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김하운의 옆구리를 찔렀다.
“네 연기 진짜 인상 깊게 보셨나 봐.”
“킁. 그러게.”
김하운이 코를 훌쩍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기대하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힘이 났다. 얼른 연습하고 싶어졌다. 그런 김하운의 모습에 서준이 입을 열었다.
“나도 나갈까?”
“아니. 괜찮아.”
서준의 말에 김하운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혼자 있으면 또 누가 올까 봐 걱정이 됐다.
무서운 게 아니다.
지금 이 기분을 조금이라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촬영에, 연기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그런 김하운의 각오를 알아챈, 코코아엔터에서 연습생들이 종종 그러듯 프렌드 실드가 되어버린 서준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래. 그럼 나 조금만 잘게.”
“어, 누울래? 비켜줘?”
오디션 지원서와 시놉시스를 보물인 양 껴안고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김하운을 서준이 말렸다.
“괜찮아. 나 시끄러워도 잘 자니까 편하게 연습해. 아, 나중에 시놉시스 보여줄 수 있어?”
“그래.”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하운을 바라보던 서준이 씨익 웃고는 눈을 감았다.
* * *
서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던 공간이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으로 바뀌고 소파에 앉아 있던 서준은 어느새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앞을 바라보던 서준이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곧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잘된 건 잘된 거고…….”
새까만 문이었다.
“가만히 놔둘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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