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72화
“레디, 액션!”
잠시 얼빠진 얼굴로 있던 정가람이 정신을 차리고 대충 물을 닦고 있는 소년을 불렀다.
“너, 너……!”
정가람은 모래가 묻은 것도 털지 않고 벌떡 일어나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조금 조심스럽게, 하지만 솔직하게 물었다.
“……죽으려던 거…… 아니었어?”
색이 바랜 수건으로 팔을 닦고 있던 소년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죽으려는 사람이 왜 수건을 가지고 와?”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물기가 많이 사라진 소년과 달리 아직 흠뻑 젖은 생쥐 꼴인 정가람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조금 전 소년의 분위기는 당장에라도 파도에 휩쓸려 나갈 것만 같이 연약해 보였다.
정가람이 우물쭈물 대는 사이 대충 물기를 닦아낸 소년이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 싶었던 정가람은 얼른 소년의 가방을 붙잡았다.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 저기…… 나 수건 좀 빌려줘.”
민망한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정가람을 말없이 보던 소년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건네주었다.
“고마워!”
반색한 정가람이 얼른 수건을 받아 들고 바닷물을 닦아냈다. 이미 젖은 수건이라 그다지 흡수력은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침부터 다 젖은 채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런 정가람을 보던 소년이 가방 옆에 놓여 있던 겉옷을 입었다. 방수라지만 제법 젖은 정가람의 패딩과는 달리 물기 한 점 없는 겉옷이었다.
그걸 본 정가람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진짜 오해한 것 같았다.
‘근데 이런 아침부터 옷을 입고 들어가면…… 다들 나처럼 오해할 것 같은데…….’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면, 아니, 적어도 상의만 벗어줬더라도 오해는 하지 않았을 거다.
‘벗기엔 너무 춥나?’
잠시 생각하던 정가람이 이곳저곳을 닦던 수건을 있는 힘껏 짰다.
주르륵. 바닷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두어 번 대충 물기를 닦아낸 정가람이 소년에게 수건을 돌려주었다.
“여기. 잘 썼어.”
소년은 말없이 수건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 거친 몸짓에서 나오는 못마땅함에 정가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가방을 멘 소년이 뒤로 돌고 정가람도 패딩을 탁탁 털고 휴대폰과 셀카봉을 챙겨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일출을 보고 싶었지만, 더 있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몸도 조금 으슬으슬한 것 같았다.
“내일 보러 와야겠다.”
남는 게 시간이니까.
희미하게 웃은 정가람이 축축하게 젖은 패딩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으음? 잡혀야 할 게 잡히지 않았다. 사색이 된 정가람이 패딩과 바지 주머니를 뒤집었다.
없다. 없어!
패딩을 뒤집어 탈탈 털던 정가람의 시야로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바다가 들어왔다. 정가람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텅 빈 주머니를 보면 저 넓고 푸른 바다 어딘가에 자신의 카드가 있을 게 뻔했다.
한순간에 여행 자금이 든 카드를 잃어버린 정가람이 마른세수를 했다. 숙소에 비상용 카드가 있긴 했지만 여기서 숙소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절망하는 정가람의 시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년이 보였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정가람은 얼른 소년에게로 뛰어갔다.
“저기! 있잖아!”
정가람의 부름에 잘못 걸렸다 싶어, 한숨을 내쉰 소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추운 날씨 탓인지 달려온 탓인지, 조금 창백해진 듯한 얼굴의 정가람이 민망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나 차비 좀 빌려주라…….”
소년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돈 없어.”
“……어 ……어, 진짜 바로 돌려줄게. 카드가 숙소에 있어서. 아니, 그게 아까…… 바다에 빠졌나 봐.”
‘널 구하려다가 바다에 빠졌나 봐.’
라고 말하려던 정가람이 말을 바꾸었다. 수건에 겉옷까지 밖에 있었던 걸 보면 제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그 탓에 정가람도 소년도 몸을 떨었다.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민하던 소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집까지 따라올 수 있으면.”
“고마워!”
소년의 대답에 정가람이 활짝 웃었다.
실랑이할 것 같았는데 금세 대답한 걸 보니 얘도 많이 추웠나 보다.
소년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정가람이 소리쳤다.
“아! 잠깐만! 나 휴대폰 좀 가져올게! 기다려! 여기서 기다려 줘!”
이번엔 휴대폰하고 셀카봉을 놔두고 갈 뻔했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달려가면서도 소년이 먼저 갈까 싶어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확인하는 정가람의 모습에 소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휴대폰을 들고 온 정가람과 함께 소년은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컷, 오케이!”
민희경 감독의 목소리에 스태프들이 우르르 몰려와 두 배우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바다에 들어갔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젖어 있어 추워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새하얀 수건들에 둘러싸인 서준과 김한석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난로의 열로 따뜻해진 대기실 안에는 따뜻한 유자차 두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수건을 미라처럼 두른 서준과 김한석이 한껏 풀어진 얼굴로 따뜻한 유자차를 마셨다.
* * *
천천히 하늘이 밝아지고 해가 뜨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일출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민희경 감독이 촬영본을 돌려보았다. 그 뒤에 서 있던 기획팀장과 촬영감독도 흥미로운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네. 한석이도 서준이도 잘해줬어요.”
기획팀장의 물음에 대답한 민희경 감독이 말을 이었다.
“매니저님. 오늘 촬영은 이걸로 끝낼게요. 대기실로 가서 옷 갈아입어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기실로 향했다. 촬영이 끝났다는 소리에 조감독은 촬영장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철수 준비로 촬영장이 시끌벅적해졌다.
민희경 감독은 한 번 더 촬영분을 돌려보았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살아 있던 어두운 권윤찬과 해맑은 정가람의 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준비한 연기가 아닌데…….”
“그러게요.”
모니터 속 김한석의 연기에 촬영감독이 감탄했다. 기획팀장도 동의했다. 민희경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서준이랑 연습했대요.”
“그런 것치고는 서준이 연기가 안 보이니까 더 신기하지. 준비 기간이 짧아서 직접 시범을 보여줄 것 같았거든. 시범을 보여주면 그걸 따라 하는 게 보통인데 말이야.”
누군가를 따라 한다면 티가 날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그 짧은 시간, 캐릭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 김한석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이 배우가 가르치는 재주가 있나 봅니다.”
보통 천재들은 가르치는 건 못한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역시 이서준.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한석이도 잘 배우고요.”
모니터 속에서 열연하는 서준과 김한석을 보던 세 사람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 * *
숙소로 돌아온 민희경 감독이 서준과 김한석을 불렀다. 서준은 쌩쌩했는데 김한석은 일찍 일어난 데다가 따뜻한 물에 씻고 나온 탓인지 조금 졸려 보였다.
“두 사람 다 오늘 수고했어.”
“준비는 되게 오래 걸렸는데 촬영은 금방 끝났네요.”
“다시 찍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해줘서 그렇지.”
민희경 감독의 말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김한석도 감독님의 칭찬에 헤헤 웃었다.
“이제 권윤찬이 나오는 씬의 촬영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한석이는 지금 연기톤을 유지하면서 더 깊이 분석하면 될 것 같고. 서준이는 다음 주부터 서울에서부터 촬영하면 되겠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정과 촬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민희경 감독이 대기실을 떠나고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부산에 왔으니까 좀 놀다가 갈래? 아니면 바로 올라갈래?”
그 말에 김한석이 반쯤 감겼던 눈을 번쩍 떴다. 몰려오던 졸음이 싹 사라진 듯한 얼굴이었다.
“서준이 형. 우리 팬텀 보러 가요!”
“그럴까?”
김한석의 말에 서준이 혹한 얼굴로 말했다.
‘친구들도 오늘 보러 간다고 했고.’
“그래, 그러자.”
“그리고 돼지국밥도 먹어요! 원래 몸이 좀 으슬으슬할 때는 돼지국밥을 먹어야 한대요!”
김한석의 말에 서준과 안다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김종호 : 돼지국밥?
>김종호 : 돼지국밥은 거기가 제일 맛있지.
>김종호 : (주소)
서준과 김한석은 김종호에게 추천받은 돼지국밥집으로 향했다.
조금 낡은 듯한 돼지국밥집의 벽에는 연예인들의 사인이 가득 붙어 있었다. 김종호와 이지석, 박도훈 등 지인들의 사인도 있었다.
“형도 사인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키득키득 웃으며 말하는 김한석에 서준이 작게 웃었다.
“그럼 오늘 못 돌아다니지 않을까?”
“그건 그래요. 형이 있으면 엄청 몰려들 거예요. 근데 매니저님이랑 같이 안 와도 돼요?”
김한석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을 먹기에도 점심을 먹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유명한 맛집이라 손님이 몇 팀 있었다. 여행을 온 듯 젊은 손님들도 있었다.
들키면 바로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김한석의 표정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경호원분들이 계시거든.”
편하게 놀러다니라며 안다호는 따라오지 않았지만, 근거리에서 경호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경호원이요?”
“서울에서부터 같이 오셨어.”
“전혀 몰랐어요.”
김한석이 경호원들을 찾기 위해 눈을 반짝이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저분이에요?”
“아니.”
“저분? 아니면 저쪽에 있는 남자분?”
“아니야.”
서준과 평상복을 입고 있던 경호원들이 김한석의 헛다리에 웃고 말았다. 더 이어지려던 김한석의 경호원 찾기는 돼지국밥이 나오면서 멈추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뽀얀 국물이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은 서준은 자신의 취향대로 간을 맞추고 먹기 시작했다. 김한석의 말대로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자 으슬으슬하던 몸에 열이 돌았다.
‘맛있네!’
종호 삼촌이 추천할 만한 가게였다.
서준의 앞에 앉은 김한석도 상기된 얼굴로 열심히 흡입하고 있었다. 촬영 전에 먹은 아침은 벌써 소화된 듯했다.
“형. 부산에서 촬영하면 여기저기 둘러봐요.”
“그래. 그러자.”
“일주일만 일찍 왔으면 불꽃축제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그럼 사람들이 많아서 촬영을 못 했겠지.”
“그건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워하는 김한석의 모습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밤 촬영분도 있으니까 감독님이 허락하시면 작은 폭죽이라도 사서 해볼까?”
“좋아요! 잔뜩 들고 와야지!”
맛있는 돼지국밥으로 배를 채운 서준과 김한석은 가까운 영화관으로 향했다.
[팬텀]이 개봉한 날이라서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지만, 다행히 구석 자리가 남아 있었다. 서준은 김한석과 함께 [팬텀]이 상영될 제7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2시간 후.
씨앗 호떡을 한 손에 쥔 김한석이 입을 열었다.
“재미는 있는데 왠지 조금 아쉬운 느낌이에요.”
서준도 손에 든 씨앗 호떡을 한입 베어 먹으며 말했다. 해바라기 씨앗이 씹히는 식감이 좋았다.
“1편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1편이요?”
서준의 말에 김한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1편이라서 이것저것 넣을 게 많으니까 복잡해진 거지. 캐릭터가 어떻게 히어로가 됐는지 이 히어로의 신념이 뭔지, 설명을 해줘야 하잖아. 설명도 해야 하고 한 편의 이야기도 끝내야 하니까.”
“아…….”
“팬텀을 만화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설명이 지루하고 팬텀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 설명이 어렵지. 그 완급 조절이 중요한데 시나리오 팀이 너무 완벽하게 만들려고 했나 봐.”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첫 작품이니 힘이 안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아무런 기대도, 기준이 없어 편하게 만들었던 시즌 1들의 영화와는 달리 시즌 2의 영화는 기대는 산더미 같았고 기준도 아주 높았다.
“시즌 1이 있어서 부담감도 있었겠지.”
“그렇구나.”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아. 2편이 중요하겠네. 그리고 [어셈블]처럼 히어로들이 다 같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려면 다음에 나올 새 히어로 영화에서는 이번 평가를 잘 소화할 필요도 있고.”
“마린사도 고민이 많겠네요.”
“그렇겠지.”
냠냠, 씨앗 호떡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김한석이 문뜩 떠오른 것을 물어보았다.
“서준이 형. 만약에 대본이 들어왔으면 팬텀 역 했을 것 같아요?”
이서준이 팬텀을 연기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김한석의 물음에 서준이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대본은 별로였어. 영화 보니까 감독이 힘낸 것 같더라.”
어?
서준과의 ‘대사를 통해 알아보는 캐릭터의 본심!’ 수업으로 단번에 그 속에 든 뜻을 파악한 김한석이 입을 쩍 벌렸다.
“대본 들어왔었어요?!”
아니, 기자들은 왜 이런 대박 기사를 안 쓴 거야?!
놀라는 김한석의 모습에 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번 읽어보라고 들어온 거지, 꼭 출연해 달라는 건 아니었어. 아직 진 나트라 이미지도 남아 있으니까 마린사도 그렇게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더라.”
대본이 마음에 들면 진 나트라 이미지도 무시하고 출연하려고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서준이 형이라면 또 시리즈 영화 해도 되지 않아요?”
자기가 더 아쉬워하는 김한석의 모습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 생존자들 대본도 있었거든.”
“아, 그럼 생존자들 출연하죠. 백번 봐도 생존자들이죠.”
서준의 말에 단번에 납득한 김한석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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