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71화
토요일.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철썩.
처얼썩.
푸른 파도가 새하얀 물거품을 만들어내며 밀려오는 부산의 한 바닷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이제 가을도 다 지나가는 터라 사람이 거의 없어 무거운 박스를 든 사람들이 넓은 모래사장을 마음대로 쏘다녔다.
“이쪽! 이쪽에 놔둬!”
“모래 안 들어가게 조심해라!”
무거운 박스 안에서 이런저런 장비들이 나왔다. 몇 사람이 달라붙자 바람을 막을 천막이 순식간에 세워지고 찬바람을 이겨낼 난로들도 이곳저곳 자리를 잡았다.
“좀 많은 거 아닌가?”
한쪽 면이 탁 트였는데도 따뜻한 천막 안에 스태프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때라면 이 난로의 반도 없어 조금 쌀쌀했을 터였다.
“따뜻하면 좋지.”
“그건 그렇지만…… 뭐, 상관없나?”
그냥 궁금했을 뿐인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타난 민희경 감독과 조감독도 주변을 살피며 촬영을 준비했다. [가제 : 여행]의 첫 촬영이라 따라온 기획팀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래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
방해가 되지 않게 멀리서 촬영장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생각보단 덜 춥네.”
날카로운 눈으로 촬영장과 날씨를 살피는 안다호의 모습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새벽이라고 춥다며 숙소에서부터 서준을 꽁꽁 싸던 안다호가 떠올랐다. 아직 겨울도 아닌데 목도리와 장갑은 너무했다.
“한석이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더 자라고 했어요.”
“잘했어.”
반쯤 뜬 눈으로 아침을 먹고 차 안에서 담요를 덮고 곤히 자고 있을 김한석의 모습이 떠올라 서준은 작게 웃었다.
안다호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기예보로는 비는 안 올 것 같던데.”
“바람도 잔잔하고요.”
풍랑주의보가 뜨면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날씨에 미소를 지은 안다호가 서준에게 물었다.
“따뜻한 차라도 마실래?”
“네. 마실래요. 뭐 있어요?”
“유자차도 있고 코코아도 있고.”
“유자차 주세요.”
안다호와 서준이 웃으며 길 한쪽에 세워둔 차로 향했다.
* * *
촬영 준비가 끝나가는 듯싶자 서준은 김한석과 함께 촬영장 옆에 마련된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한쪽이 트여 있는, 민희경 감독이 모니터링할 천막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사방이 막혀 있는, 배우들이 대기할 천막이었다. 두 천막 모두 여러 대의 난로로 따뜻한 상태였다.
“옷이 많네요.”
“NG가 얼마나 날지 몰라서 여러 벌 가지고 왔어요. 마르는데도 시간이 걸리니까요. 자, 여기 앉아요.”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서준과 김한석이 의자에 앉아 화장을 받았다. 두 사람이 맡은 역할이 특수분장이 필요한 역이 아니라서 가벼운 화장이었다.
슬슬 지나가는 붓에 조금 간질간질함을 느끼던 김한석이 입을 열었다.
“밖에 춥던데…… 물에 들어가면 더 추울 것 같아요.”
“물속은 괜찮을걸. 원래 물속 온도가 바깥보다 한두 달 늦게 변한대.”
서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김한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물속 온도는 9월하고 10월이 제일 따뜻하다는 거지.”
“정말요? 근데 왜 추운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김한석의 모습에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속은 따뜻한데 바깥이 춥잖아. 젖으면 더 춥게 느껴지고.”
“아하.”
“한 번에 촬영 끝내고 바로 들어오면 괜찮을 거야.”
“맞아요! 특훈도 했으니까요!”
김한석의 말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그때, 천막의 입구가 열리고 민희경 감독이 들어왔다. 쌀쌀한 바깥바람이 천막 안으로 함께 들어왔다.
“날씨가 추우니까 최대한 적은 컷으로 갈게. 큰 실수가 아닌 이상 오케이할 거니까 두 사람 다 마음 편하게 해줘. 시간도 신경 쓰지 말고.”
원래는 해뜨기 직전에 촬영을 마쳐야 하지만 그렇게 시간까지 지켜가며 찍을 생각은 없었다. 급하게 촬영 날짜를 잡은 것도 그랬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촬영하기 위해서는 한 컷 정도는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는 것이 제작사 단홍과 민희경 감독의 생각이었다.
‘미리 대본을 받은 서준이랑 달리 한석이는 아직 캐릭터 분석이 덜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주인공인 서준을 중심으로 찍는 만큼 김한석은 조금 부족해도 괜찮았다.
민희경 감독이 컨디션은 괜찮나, 하며 두 배우의 얼굴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바다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만 들어가고.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구급차도 준비되어 있고 구조대원들도 있었다. 과한 대처이긴 했지만 만에 하나의 사고가 일어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네. 그럴게요.”
“넵!”
씩씩하게 대답하는 두 배우의 모습에 빙그레 웃은 민희경 감독이 물었다.
“근데 특훈은 무슨 이야기야?”
밖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서준과 김한석이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한석이도 저도 물속에서 연기하는 거 처음이니까요. 날씨도 추우니까 최대한 물에서 하는 연기에 익숙해지려고 연습했어요.”
민희경 감독이 눈을 깜빡였다.
“연습할 곳이 있어?”
“수영장이요.”
서준의 말에 김한석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경 감독과 방금 들어온 기획팀장이 눈을 크게 떴다.
“수영장을 빌려서 연습했어요! 물도 따뜻해서 엄청 편하게 연습했어요!”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는 조금 놀기도 했다. 그 쉬는 시간이 길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말이다. 김한석이 해탈한 듯 허허 웃었다.
수영장을 빌려?
스케일이 남다른 슈퍼스타에 민희경 감독과 기획팀장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두 사람의 표정에 서준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큰 곳은 아니었어요.”
촬영 장소인 바다와 비슷한 환경의 파도 풀을 빌리고 싶었는데 그건 빌릴 수가 없다고 해서 집과 가까운 수영장을 몇 시간만 빌렸다.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큰 문제가 없으면 촬영은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준의 말에 민희경 감독과 기획팀장은 놀란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났다.
촬영장 한편에 자리 잡은 구급대원들과 구조대원들은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서 이서준을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촬영 현장을. 개봉하면 지인들에게 이야기해 줄 게 많을 것 같았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외침에 스태프들이 화면에서 벗어나고 의상을 갈아입은 서준과 김한석이 소품을 챙겨 각자 자신의 위치에 섰다.
촬영 감독이 카메라 화면에 뭔가 걸리는 게 없는지 확인했다. 아직 해도 안 뜬 상황이라 조명은 너무 밝지 않게 주의해야 했다. 천막 안에서 모니터로 보이는 화면을 꼼꼼히 살펴본 민희경 감독이 6년 만에 크게 외쳤다.
“레디,”
모두 소리를 죽였다.
“액션!”
인적이 거의 없는 모래사장.
셀카봉을 들고 어두운 하늘을 보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바다 저편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모습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으. 춥다!”
패딩으로 몸을 싸매고 있지만 막을 수 없는 맨얼굴은 찬 바람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도 소년, 정가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실제로 일출을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언제 뜨려나?”
마음이 들떴다. 바다가 가까워진다고 해가 빨리 뜨는 것은 아니지만 정가람은 괜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철썩, 철썩.
새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파도가 점점 가까워졌다.
‘잘 찍히고 있나?’
정가람이 셀카봉 끝에 달린 휴대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 코끝이 새빨갛게 물든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이 웃겨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바다를 바라보려는 정가람의 시선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정가람이 휙 고개를 돌려 다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휴대폰 화면 끝에 걸린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걸 발견한 정가람이 급하게 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밀려들어 오는 파도와 반대 방향으로, 바닷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은 파도에 밀려 휘청휘청거리면서도 계속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깨가 축 처지고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종아리까지 오던 바닷물이 허벅지까지 차오르고 천천히 허리춤까지 향하기 시작했다.
“어…… 어!?”
놀란 정가람은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셀카봉을 내팽개치고 달려나갔다. 패딩을 벗을 정신도 없었다.
“저기요!”
모래사장을 달려가던 정가람이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다에 발을 디뎠다.
찰박! 운동화를 적시는 물소리가 들렸다. 거친 파도를 거스르며 정가람이 앞으로 나아갔다. 가까이서 보니 어른이 아니라 자신의 또래처럼 보였다.
“야! 잠깐만!”
그 외침에 소년이 잠시 멈칫하기는 했지만, 곧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소년이 있는 곳까지 단박에 달려온 정가람이 소년을 붙잡았다.
“이거 놔!”
“뭐 하는 거야!?”
소년이 발버둥 쳤다. 정가람이 더욱 힘껏 소년을 껴안았다. 물살이 일었다. 양보 없는 대치가 이어졌다.
그 심각한 분위기에 촬영장에 있던 구조대원들이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고등학생이라고? 두 배우를 카메라로 찍고 있는 촬영 감독이 없었다면 당장 뛰쳐나갔을 터였다.
실랑이의 결과는 금방 나왔다.
승자는 정가람이었다. 어쩌면 조금씩 들려오는 인기척 때문인지도 몰랐다. 정가람은 더이상 움직이는 것을 포기한 듯 힘을 뺀 소년을 데리고 바다를 나왔다.
힘을 너무 쓴 모양인지 정가람은 모래사장으로 나오자마자 바닥으로 쓰러졌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소년도 정가람의 옆에서 숨을 쌕쌕 내쉬고 있었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두 소년은 말없이 숨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호흡을 가라앉힌 정가람은 시선을 돌려 앉아 있는 소년을 보았다. 흠뻑 젖은 모습이 꼭 물에 빠진 생쥐처럼 보였다.
‘아, 나도 그렇겠네.’
패딩부터 옷, 속옷까지 몽땅 젖어버렸다. 숙소에 갈아입을 옷이 있지만, 일출을 보러온 거지 수영하러 온 게 아니라서 수건은 없었다. 어쩌지? 한숨을 내쉰 정가람의 시야에 일어나는 소년이 보였다.
또 바다 쪽으로 걸어가나,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걸어간 방향은 바다 반대쪽이었다. 정가람이 고개를 돌려 바닷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걸어간 곳에는 낡아 보이는 가방이 놓여 있었다. 자신의 가방인 양 자연스럽게 가방에 손을 넣은 소년이 뒤적거리기를 잠시, 색이 바랜 수건이 하나 튀어나왔다.
수건.
수건이었다.
“……어?”
소년이 색이 바랜 수건으로 이곳저곳을 닦고 있었다.
어어?
홀딱 젖은 정가람이 얼빠진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컷!”
민희경 감독의 컷소리가 들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뛰쳐나갔다. 흠뻑 젖은 서준과 김한석의 위로 커다란 수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천막 안으로 이동했다.
난로가 여러 개 놓인 천막 안은 따뜻했다. 안다호가 두 배우에게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물을 마시며 몸을 좀 녹인 두 배우가 몸을 뒤덮은 수건을 하나둘 떼어냈다.
“형. 그거 알아요? 아까 저 잠깐 발이 땅에 안 닿았어요. 번쩍 들려서 옮겨진 것 같은 거 있죠?”
김한석의 말에 홀딱 젖은 상의를 벗고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던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에서 방울방울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청량한 모습이 화보나 다름없어 김한석과 안다호가 속으로 감탄했다.
대충 물기를 닦아낸 서준이 입을 열었다.
“소금기도 있고 모래도 묻어서 숙소로 돌아가면 제대로 샤워해야 할 것 같네.”
“그러게요. 근데 서준이 형. 우리 오케이에요? NG에요?”
NG라면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생각보다 바닷물도 차갑지 않고 스태프들의 대처도 빨라 생각보다 춥지도 않아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저 이 찝찝한 상태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응? 못 들었어?”
“들을 정신이 없었어요.”
수건은 쏟아져 내리지, 어화둥둥 번쩍 들려 천막 안으로 옮겨져 그럴 정신이 없었다. 김한석의 말에 젖은 머리카락을 새하얀 수건으로 털고 있던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오케이래. 잘했어.”
서준의 말에 김한석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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