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69화
늦은 저녁.
영화 제작사, 단홍의 한 회의실.
“주인공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 같네요.”
민희경 감독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심사를 봤던 감독들은 오디션이 끝나고 늦은 시간까지 캐스팅을 위해 남아 있었다. 민희경 감독은 붉은 기가 희미하게 보이는 눈으로 책상에 쌓인 지원서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다음 배역을 정해볼까요?”
둘러앉은 감독들이 자신이 체크해 놓은 지원서를 팔락팔락 넘겼다. 감독들의 입에서 여러 이름들이 나왔다. 김주경, 양주희, 전성민…… 이 중에서 누군가를 뽑는다는 것이 힘들 정도로 잘하는 아역 배우들이 많았다.
“요즘 이 정도로 잘하는 신인 배우들도 없는데…… 빨리 다들 성인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작품과 배역에 어울리는 새롭고 연기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는 캐스팅 디렉터가 한쪽에 모아둔 지원서를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제 : 여행]에 뽑힌 건 아니지만 캐스팅 디렉터의 마음에 든 아역 배우들의 지원서였다.
“만들어지는 작품은 많아졌는데 연기 잘하는 배우는 거기서 거기거든요. 너무 익숙해서 이미지도 고정되고…… 이런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면 더 선택권이 넓어지겠죠.”
캐스팅 디렉터가 환하게 웃었다.
“복사본을 가져가고 싶지만…… 안되겠죠?”
“네. 개인정보가 있어서 안 됩니다.”
기획팀장의 말에 캐스팅 디렉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휴대폰 메모장에 배우들의 이름과 특징, 연기 실력을 간단히 메모했다. 연기를 계속한다면 이름하고 얼굴만 알아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잠깐의 인연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그사이에도 회의는 계속되었다.
* * *
[가제 : 여행]의 오디션이 열렸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주인공이 확정된 영화 제작사 단홍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코코아엔터에 계약서 보내고.”
“네!”
단홍은 가장 먼저 영화에 빠질 수 없는 주인공 섭외를 시작했다.
99.999%로 이서준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매니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한 것은 아니기에 계약서부터 작성해야 했다.
“오디션에 합격한 배우들한테도 연락하고.”
“넵!”
오디션이 바로 어제였지만 단홍의 실행력은 빨랐다. 직원들도 평소보다 더 재빠르게 움직였다.
기획팀장이 휴대폰으로 날씨를 체크했다.
이제 10월 중순.
“더 추워지면 촬영하기 힘들어져.”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촬영을 시작해야 했다. 고생할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떠올라 좀 더 일찍 대본을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획팀장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팀장님! 플러스에 연락할까요?”
일기예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기획팀장이 직원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어쩔 수 없지.’
기획팀장도 수정 전 대본을 보았다. 그걸로는 이서준 배우를 캐스팅하기 힘들었을 거다.
‘한강에서 그 대본을 읽어봤으니 마음에 들었으면 벌써 촬영 시작했겠지.’
이서준 배우가 직접 들고 온 대본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지원할 영화 제작사도 많았고 플러스+라는 든든한 투자자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단홍이 제작을 맡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단홍의 기획팀장은 아쉬움을 접고 입을 열었다.
“그래. 바로 연락해서 약속 잡아.”
“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촬영 장소 섭외 시작했답니다!”
임시 제목이 여행인 만큼 이번 영화는 야외 촬영이 많았다.
그 어느 때보다 촬영 장소를 구하는 것이 중요했다. 화면에 비치는 배경이 작품과 어울림을 고려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촬영을 할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관리가 가능한 곳이어야 했다.
‘더욱이 배우가 이서준이니까 말이야.’
몰려들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다른 야외 촬영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터였다. 코코아엔터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기획팀장이 말했다.
“김종호 배우는?”
서준이 오디션을 참가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여행]에 나올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들을 여럿, 후보에 올려둔 단홍이었다. 그중 주인공의 아버지 역할이 있었는데 기획팀에선 만장일치로 김종호 배우를 선택했다.
“김종호 배우밖에 없죠!”
“아직 생존자들의 이미지가 남아 있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아버지와 주인공의 사이가 나빴다면 모르지만 [여행]에서도 [생존자들]처럼 부자의 사이는 좋았다. 오히려 [생존자들]에서의 가족 같은 이미지가 [여행]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힘들게 살아 돌아왔는데 시한부라니……!”
울먹울먹한 직원들의 모습에 김종호가 제1순위 후보가 되었다.
기획팀장의 말에 전화를 들고 있던 직원이 아쉬운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영화 촬영 중이랍니다.”
“영화? 기사 못 봤는데?”
당연히 김종호가 출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획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사는 오늘 내보낼 예정이었답니다. 갑작스럽게 잡힌 출연인 것 같던데요. 저쪽도 아쉬워하는 눈치더라고요.”
이쪽도 정말 아쉽다.
기획팀장이 이마를 짚었다.
“김종호 배우가 아니면 누굴 쓰지?”
“그러게요.”
예상도 못 한 곳에서 막혀 버렸다. 머리를 벅벅 긁은 기획팀장이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다른 후보 배우들을 언급했다. 직원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직원의 얼굴에 당황이 가득했다.
“팀장님! 플러스에서 왔습니다.”
기획팀장이 눈을 끔벅이다가 시계를 보았다. 한 바퀴도 돌지 않은 분침이 보였다.
“……우리 조금 전에 연락하지 않았어?”
1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 * *
미리내 예고는 월요일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주말에 오디션을 봤던 연기과 때문이었다. 연기과 2학년 1반도 마찬가지였다.
“오디션 잘 봤어?”
양주희의 물음에 전성민이 대답했다.
“그럭저럭? 주인공 지망이었는데 다른 배역도 시키더라고. 다른 것도 준비해서 가서 다행이었지. 너는?”
“난 첨부터 조연이었어. 그래도 할 만큼은 한 것 같아. 서준이 넌?”
“음. 열심히 했어.”
서준의 말에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준의 열심히라니.
지금까지 서준과 함께 연기 수업을 들었던 친구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얜 진짜로 너무 열심히 하니까 말이야.’
서준과 같이 연습하면 연기력이 늘까 싶어 해봤는데 너무 빡세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었다.
“잘했겠네.”
“엄청 잘했겠어.”
아이들의 말에 서준이 웃다가 물었다.
“오디션 결과는 언제 나올까?”
“글쎄. 보통 일주일 내로 나오기는 하는데…….”
“난 저번에 2주까지 기다린 적 있어.”
“합격했어?”
“아니.”
전성민의 말에 아이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을 데굴 굴렸다. 전성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오디션 한두 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맞아. 아역이 워낙 적어야지.”
“옛날에는 더 적었대.”
금세 회복한 아이들이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준이까지 오디션 결과 기다리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그치?”
“당연히 합격하겠지만 말이야. 아, 근데 너 언제 오디션 봤어?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봤다는 애가 없던데?”
양주희의 물음에 서준이 대답했다.
“난 마지막 타임에. 하운이랑 같이 봤어.”
“와. 또 만났다고?”
미리내 예고에 입학하고 서로서로 실기 시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던 터라 아이들도 서준과 김하운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머리를 싸매고 수학 숙제를 하고 있던 김하운이 이름을 불리자 고개를 들었다.
“불렀어?”
“서준이랑 같은 타임에 오디션 봤다며?”
“어. 1학년에 김한석? 걔도 같이 봤어.”
그렇게 말한 김하운은 다시 수학 숙제로 시선을 돌렸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김하운의 펜에 김주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숙제 있었어?”
김주경의 물음에 서준과 아이들의 얼굴에 놀람이 서렸다.
“……응. 안 했어?”
“까먹었나 봐!”
경악한 김주경이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서준과 두 친구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김주경과 김하운을 보다가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첫 수학 수업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
“대단하다. 김주경. 김하운.”
서준과 아이들이 짝짝 박수를 쳤다.
무사히 수학 수업을 들은 김주경이 책상 위로 쓰러졌다. 김하운도 비슷한 상태였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두 아이의 모습에 서준과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2교시 영어지?”
“수학 다음에 영어라니…… 시간표 미친 듯.”
서준이 영어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데 어디선가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놀란 아이들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반 아이 하나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오디션…… 발표 났어.”
“……뭐? 벌써?!”
순식간에 교실이 시끄러워졌다. 다들 수업 시간에 꺼놓은 휴대폰을 켜느라 바빴다.
“어제 봤는데 오늘 결과가 나왔다고?”
“주인공이야 서준이겠지만. 다른 배역도 이렇게 빨리?”
“으아아아. 봐야 하는데 안 보고 싶다!”
그 소식에 2반에도 전해졌는지 옆 교실도 시끌벅적해졌다. 곧 1학년과 3학년도 시끌벅적해질 터였다.
서준도 휴대폰을 꺼냈다. 다호 형에게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안다호 : [가제 : 여행] 오디션 합격!
>안다호 : 축하해!
>안다호 : 다른 배우들한테도 합격 소식 전했다고 하더라.
>안다호 : 친구들 중에 있어?
오디션 합격.
그 단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학교에 합격했을 때 들었던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꼭 신인 배우가 되어 첫 작품에 캐스팅된 것처럼 설렜다.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서준에게 양주희가 물었다.
“합격이래?”
“응.”
서준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양주희와 전성민이 활짝 웃었다.
“축하해!”
“축하해. 너 오디션 합격 축하하는 건 처음이네.”
“그러게. 맨날 캐스팅되니까.”
“앞으로도 오디션은 드물 것 같은데 합격 축하 파티라도 열까?”
전성민의 말에 서준이 조금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웃었다. 진짜 파티라도 열 것 같은 친구들의 대화에 넋을 놓고 있던 김주경도 정신을 차렸다.
합격한 배우가 있으면 떨어진 배우도 있는 법.
대다수의 아이들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난 떨어졌어.”
“나도. 우리 반엔 서준이 말고 없는 거 아니야?”
서준의 합격 소식과 아이들의 불합격 소식에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김하운도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조금 머뭇거리던 김하운은 김주경의 불합격 소식을 듣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휴대폰을 켰다.
[영화 제작사 단홍입니다.]
로 시작한 문자를 읽던 김하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숨이 턱 막혔다. 움직임을 멈춘 김하운의 모습을 발견한 아이들이 슬금슬금 김하운의 뒤로 향했다. 그리고 문자를 보았다.
아이들이 놀라 크게 외쳤다.
“김하운 합격이래!”
“오오오!!”
떠들썩한 2학년 1반의 분위기에 교실 문 앞에 서 있던 영어 선생님이 볼을 긁적였다.
“1학년 선생님도 그러더니…… 왜 영어 수업 시간에만 이러지?”
영어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2학년 아이들이 놀란 참새 떼처럼 자신의 자리로 흩어졌다.
* * *
점심을 다 먹고 급식실에서 나오는 서준에게 김한석이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그 모습에 친구들은 서준과 김한석에게 손을 흔들고는 매점으로 향했다.
“형! 저 합격했어요!”
“축하해.”
서준도 빙그레 웃으며 김한석을 축하해 주었다.
“아, 형도 합격 축하해요! 아까 대본 받아서 봤는데 잠깐 나올 줄 알았는데 꽤 길게 나오는 역할인가 봐요. 제가 맡은 배역은 권윤찬이라고 형이랑 동갑이래요! 형한테 반말이라니!”
김한석이 키득키득 웃자 서준도 따라 웃었다.
그때 김한석과 서준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안다호 : 서준아.
>안다호 : 첫 촬영만 이번 주 금요일에 먼저 한다는데.
>안다호 : 할 수 있겠어?
>안다호 : [첫 촬영분 대본.hwp]
문자를 본 서준이 눈을 깜박이다 대본을 눌렀다. 서준이 빠르게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읽었던 [가제 : 여행]의 내용을 떠올렸다.
“으음. 한석아. 네가 맡은 역 이름이 뭐라고?”
“권윤찬…… 이요…….”
김한석의 시선도 휴대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한석의 소속사에서도 안다호와 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낸 것 같았다.
곧 김한석이 고개를 들었다. 환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형. 어쩌죠? 저 금요일까지 캐릭터 분석 못 할 것 같은데…….”
“그러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라…… 제대로 분석해서 찍어야 하는데 말이야.”
대충 분석한 첫 부분과 제대로 분석한 뒷부분의 연기 톤이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심각한 두 사람의 모습에 ‘이서준 오디션 합격 축하파티’를 위해 매점에서 과자를 한 아름 사서 돌아오던 친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준이 턱을 매만졌다.
자신이야 미리 대본을 받은 데다가 빠르게 캐릭터를 분석할 수 있었다.
‘정 시간이 없으면 생의 도서관에서 하는 방법도 있지만.’
김한석은 대본도 이제 받았고 자신처럼 빠르게 캐릭터를 분석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그늘진 김한석의 얼굴을 보고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한석아.”
“네?”
“학교 마치고 우리 집에서 같이 연습할래?”
서준의 말에 김한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서준의 말을 이해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형이랑 같이 연기 연습이라니!
“네! 할래요! 하고 싶어요!”
열정적인 김한석의 모습에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조금 힘들 테지만, 우리 열심히 하자.”
“네!”
환하게 웃는 김한석에게 들고 있던 과자를 놓칠 정도로 질겁하는 2학년 선배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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