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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64화 (364/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64화

어느새 서준은 공모전 심사가 아니라 즐기는 마음으로 응원봉 디자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예전 핼러윈 때 분장했던 늑대인간도 있었고 카메오로 출연했던 재수사도 있었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악령의 아기 무당과 작은 숟가락을 손에 든 두 뺨이 통실통실한 아기 서준도 있었다.

서준과 함께 [응원봉 공모전] 게시판을 둘러보던 안다호가 말했다.

“으음. 이젠 응원봉 디자인이 아니라 팬아트 같지 않아?”

“그러게요.”

서준이 직접 본다는 사실을 안 새싹들이 디자인 한쪽에 적어놓은 ‘서준아! 사랑해!’라는 문구를 발견한 서준이 하하하 웃었다.

그렇게 얼마간 응원봉 디자인인지 팬아트인지 그림이 담긴 편지인지 모를 게시글들을 보던 서준이 파인패드에서 눈을 뗐다.

“다호 형.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건 그런데…… 응원봉으로 만들긴 대부분 힘들 것 같네.”

“왜요?”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수처럼 콘서트나 행사 같은 건 드무니까 실제로 사용하는 별로 없겠지만 한 번 만들면 디자인을 바꾸지 않는 이상 계속 쓸 거 아니야. 어느 한 작품의 이미지로 응원봉을 만들기보다는 공통된 이미지로 응원봉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

안다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팬들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다를 텐데 한 작품으로만 만들면 아쉽고…… 앞으로도 찍을 작품이 많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래요.”

하긴.

후에 더 좋은 작품, 더 재미있는 작품, 인생작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한 작품의 이미지로만 응원봉을 만들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럼 어떤 걸 고르지…….’

진지한 얼굴로 게시판을 둘러보는 서준을 보던 안다호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공모전 기간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고르면 돼.”

안다호의 고개가 연습실 내의 시계로 향했다.

“으음.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볼까?”

“네.”

팬들의 사랑만큼 디자인도 많아 눈이 조금 뻐근했다.

두 눈을 가볍게 매만지는 서준의 모습에 안다호가 웃으며 대본 하나를 들고 왔다. 대본의 등장에 언제 피곤했냐는 듯 눈을 반짝이는 서준이었다.

“대본은 공모전 심사하는 동안에는 2팀에서 추천하는 거로 하나씩만 줄게. 집에 가서 심심할 때 읽어봐.”

“어떤 작품이에요?”

“단홍에서 온 건데 괜찮더라고. 다른 배우들은 아직 안 정해졌고 감독님은 이번 작품이 두 번째 작품이래. 첫 번째는 흥행 못 했고.”

서준은 안다호의 설명을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첫 작품이 망하고 두 번째 작품이라니.

한강에서 만났던 감독님과 같은 이력이었지만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감독님은 아닐 것 같았다.

“오디션이 있다고 하는데, 괜찮지?”

“네. 괜찮아요.”

대본만 좋으면 오디션이 무슨 상관이랴.

작품 욕심이 많아 제 손으로 각색한 연극을 무대에 올린 적도 있는 서준이었다. 그런 서준을 잘 알고 있는 안다호와 2팀도 별 고민 없이 서준에게 단홍의 대본을 추천할 수 있었다.

‘이제 다들 서준이한테 뭐가 가장 매력적인지 아는 눈치란 말이지.’

코코아엔터, 배우 이서준 전담 2팀으로 들어오는 대본의 느낌이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그냥 던져보는 대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름 있는 제작사들은 제법 좋은 작품이나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하고 색다른 작품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서준이라는 배우가 그 어떤 조건들보다 작품이 마음에 들 때 움직인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좋은 작품을 인질로 삼고 후려치는 제작사도 나오겠지만…….’

그걸 미리 막고 배우가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을 편하고 즐겁게 연기할 수 있게 하는 게 매니저와 소속사의 일이었다.

‘오디션이야 그냥 거쳐 가는 거나 다름없지.’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자신의 배우의 실력을 믿고 있는 매니저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눈을 반짝이며 대본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배우에게 대본을 건네주었다.

얼른 대본을 받아 든 서준이 첫 장을 바라보았다.

대본의 첫 장에는 제목과 감독, 그리고 제작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

서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여기서 볼 줄은 정말로 몰랐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가제 : 여행]

[감독 : 민희경]

[제작사 : 단홍]

민희경.

그 세 글자에 한강에서 만났던 감독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좋은 대본 써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대본의 첫 장을 넘겼다.

‘좀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어떤 대본이 나왔을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 * *

영화 제작사, 단홍.

기획팀은 평소처럼 일하면서도 다른 곳에 신경이 쏠린 것처럼 보였다.

“언제 올까?”

“글쎄. 코코아엔터는 먼저 들어온 것부터 검토한다니까 밀려 있는 작품이 많으면 늦게 오겠지.”

“대본 보낸 지 며칠 안 됐는데도 기다리기 힘드네.”

“한다, 안 한다 답을 줘야 진행을 할 텐데 말이죠.”

“코코아엔터 요새 바쁘잖아. 서준이 응원봉 공모전도 진행 중이고 새 아이돌 그룹도 데뷔할 예정이고.”

이서준의 팬인 이윤주의 말에 옆자리의 동료가 물었다.

“응원봉 디자인 봤는데 좋은 거 많던데? 넌 어떤 게 가장 좋았어?”

“난 내의원 스노우볼. 성녕대군이랑 허의관이 손잡고 있는 게 너무 마음에 들더라. 근데 스노우볼은 안 흔들 것 같아.”

“왜?”

“눈 오는 겨울이라니…… 슬프잖아.”

“아. 성녕대군 겨울에 죽었지.”

크윽.

동료의 말에 드라마가 생각나 울컥한 이윤주였다.

슬퍼하는 이윤주를 보며 동료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직원이 이야기에 합류했다.

“저도 그거 봤어요. 하나 사고 싶더라고요. 그게 1등 할까요?”

응원봉 구입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일반인마저 ‘하나쯤은’ 하고 사고 싶은 디자인들이 꽤 있었다.

슬픔에서 벗어난 이윤주가 입을 열었다.

“근데 다른 디자인도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뭐가 1등이 됐든 아쉬울 것 같긴 해.”

“그러네. 한 번 나오면 끝이니까. 자기가 원하는 걸 바꿔 끼울 수도 없고 말이야.”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던 이윤주가 동료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숨까지 멈춘 이윤주가 멍하니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응? 뭐가?”

고장 난 듯, 상태가 이상한 이윤주의 모습에 동료가 눈을 끔벅였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어?”

눈에 불을 켜고 빤히 쳐다보는 이윤주의 모습에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번 나오면 끝?”

“그 뒤에!”

“……바꿔 끼울 수도 없고?”

“그거 좋다!”

이윤주가 눈을 반짝이며 새하얀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대놓고 딴짓을 하는 이윤주의 모습에 동료는 볼을 긁적였다.

그사이 다른 쪽은 코코아엔터에서 나올 새로운 그룹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레드크라운 다음 그룹이 언제 나올까 했는데 이제 나오네.”

“코코아엔터에서 새 그룹 나오는 텀이 좀 길긴 하죠.”

“그래도 다들 나왔다 하면 가요계를 뒤집어놓잖아. 브라운블랙에 화이트에 레드크라운에. 3연속 성공이라니. 대형 기획사만 하지 않아?”

다들 고개를 끄덕이다가 갸웃했다.

“근데 코코아엔터 정도면 대형 기획사 아니에요?”

“그렇다기엔 소속 연예인 수가 적은 것 같은데?”

“이서준이 있잖습니까.”

아아.

일제히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걸그룹이야? 보이그룹이야?”

“보이그룹요. 건너 건너 듣기로는 이서준 친구들도 있대요.”

오오.

직원들이 감탄했다.

“이서준 친구라니 엄청 잘할 것 같은데?”

“그러게요.”

이서준과 보이그룹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은 기획팀장이 들어오자마자 조용해졌다. 동료가 종이에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이윤주의 팔을 툭툭 쳤다.

“오디션용 대본은 준비됐어?”

이서준이 참가하는 만큼 화제가 될 것이 당연했다. 그러면 당연히 영화도 화제가 될 터였고 특종을 원하는 기자들이 영화 내용을 기사화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단홍은 작품과 조금 연관이 있는 수정 전 대본으로 오디션용 대본을 따로 준비할 계획이었다.

기획팀장의 물음에 직원 하나가 대답했다.

“네. 민 감독님이 어제 조금 수정해서 주셨습니다.”

“오디션이 열리는 만큼 내용 유출 안 되게 조심하고.”

“팀장님!”

그때 직원 하나가 기획팀장을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직원의 밝은 표정에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직감했다. 기획팀장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다.

“이서준 배우. 오디션 본답니다!”

* * *

“게시판에 새 오디션 올라왔더라.”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고 돌아온 전성민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친구들에게 영어 문제를 설명해 주고 있던 서준은 그 오디션이 무언지 알 것 같았다.

“뭔데? 영화? 드라마?”

“촬영은 언제쯤이래? 나 드라마 다음 달에 끝나는데…….”

“난 무리. 연극 준비 중이라서.”

“연말 공연 연습이랑 겹치려나.”

“난 성적이 안 돼서 내년에는 아예 활동 못 할 것 같음.”

“나도. 엄마가 지금부터 공부하래.”

드라마, 영화를 촬영하거나 연극에 출연 중인 아이들 그리고 지금부터 수능을 볼 때까지는 아무 촬영도 하지 않을 예정인 아이들 빼고는 다들 전성민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영화사는 단홍이고.”

“오오오!”

“단홍이면 큰 회사잖아!”

“역도 찍었고!”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서준에게 쏠렸다가 전성민에게로 향했다. 전성민이 한마디씩 뱉을 때마다 확실하게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의 반응에 서준이 웃고 말았다.

“역은 무슨 역이래?”

김주경의 질문에 전성민이 대답했다.

“조연들이랑 주인공 뽑는대.”

“……주인공이라고?”

조연이라면 예상했지만…… 주인공이라니?

그 말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공이 어린가 봐.”

“보통 나이 어린 캐릭터라도 주연이면 성인 배우들 중에서 뽑지 않나? 교복 입히면 되니까.”

“생존자들처럼 다른 어른 역할이랑 같이 나오는 거 아니야?”

아이들이 하나둘 휴대폰을 꺼내 새로 올라온 오디션에 대해 알아보았다. 주인공이라고 하니 출연 중인 영화나 드라마, 수능 때문에 관심이 없었던 아이들도 흥미로운 얼굴로 오디션 사이트를 뒤졌다.

서준도 휴대폰을 꺼내 단홍에서 올라온 오디션 공고를 읽어보았다. 대본 유출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서준이 봤던 대본과는 줄거리가 달랐다.

‘그래도 비슷한 곳은 있네.’

짧게 올라온 캐릭터 설명을 읽던 김주경이 입을 열었다.

“……이거 한석이가 잘할 것 같은데?”

“……그러게.”

김주경의 말에 아이들은 몇 주 전, 본의 아니게 미리내 예고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연기과 1학년을 떠올렸다.

* * *

미리내 예고 연기과 1학년 1반.

새로 뜬 오디션 공고에 아이들이 시끌벅적 떠들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단홍! 단홍이라고!”

“올! 김한석! 딱 너한테 맞는 역할인 것 같은데?”

난리 난 친구들의 반응과 달리 김한석으로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주인공의 설명에 적힌 세 글자가 김한석의 눈에 박혔다.

[시한부]

바로 몇 주 전.

시한부 바로 직전까지의 경험을 몸소 체험했던 김한석에게 익숙하다 못해 아직도 조금 가슴이 뜨끔한 단어였다.

“나도 오디션 볼 거긴 한데…… 주인공 연기보다는 주인공 친구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한 아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때 마음 졸였던 건, 아무래도 주인공 마음이라기보다 그런 주인공을 걱정하는 친구들 마음이었으니까.”

“한석아.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생각나?”

친구의 말에 김한석이 기억을 더듬었다.

“으음. 어떤 마음인지는 알 것 같긴 해.”

초조하고 불안하고 무섭고.

솔직히 병 때문이 아니라 걱정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죽을 뻔했다.

“우리 또래 중에 너보다 주인공 마음을 잘 아는 배우가 어디 있겠어?”

“맞아!”

그때, 1학년 1반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김한석과 아이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1반 아이들 중 가장 인맥이 넓은 반장이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야! 이서준 선배님 단홍 거 오디션 보신대!”

……네?

생각지도 못한 최종 보스의 등장에 김한석과 친구들이 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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